〈 72화 〉 밤 (8)
* * *
“근데 얘 어제는 없었잖아.”
내가 말했다.
“얘가 사흘에 두 번 정도 찾아와 가지고. 어제가 안 오는 날이었나봐.”
“으응.”
왼손 네 손가락으로 잿더미의 턱을 간질였다. 잿더미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그르릉댔다.
“얘 근데 왤케 깨끗해?”
“모르겠어. 어쩌면 얘가 내 집에만 오는 게 아니라 다른 집에도 가 가지고 누가 얘 씻긴 걸 수도 있고?”
“오 꽤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근데 좀 괘씸해지네 얘.”
“왜?”
“아니 집사를 고를 거면 하나만 고르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 집사로 만드는 게 가당키나 한가?”
백지수가 투덜거리고는 나를 째려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백지수가 시선을 잿더미에게로 돌리고 잿더미의 두 발을 잡던 양손을 놓아주었다. 잿더미는 신체의 자유를 얻고도 백지수의 다리 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웅크리고는 눈을 감고 잠들려 했다. 은은한 미소를 띄운 백지수가 잿더미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천천히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럴 거 생각하면 진짜 존나 괘씸하네...”
백지수가 또 투덜댔다.
“그게 그렇게 싫으면 그냥 박대하시든가요.”
“아니 근데 존나 귀엽잖아. 집 앞에서 존나 냐옹대는데 그걸 무시할 수도 없고.”
“근데 고양이 이런 식으로 웅크리고 자는 거면 경계심 세우는 거라던데.”
“그냥 체온 낮으면 체온 높이려고 이러기도 한데. 따뜻해지면 몸 점점 풀리겠지.”
“안 풀리면?”
“그럼 그건 너 때문이겠죠.”
“네 앞에서 잔 적 있어?”
“어. 접때 존나 편하게 배 까면서 잠들었죠.”
“으응.”
“넌 고양이들 식빵 자세 한 거밖에 못 봤지?”
“그거 봤음 된 거지. 근데 얘 이름 왜 잿더미라 했어? 더 예쁜 이름 많잖아.”
백지수가 나를 째려봤다.
“뭐 있는데 더 예쁜 게.”
“왤케 무섭게 쏘아붙이세요.”
“빨리 뱉기나 하세요.”
“다시 생각하니 잿더미는 얘 털 색이랑 정말 어울리고 어감도 좋아서 입에도 잘 달라붙는 예쁜 이름 같네요.”
“그치?”
“네.”
“알면 됐어.”
백지수가 말한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잿더미의 몸이 점점 펴졌다.
“근데 엄청 빨리 잠든다 잿더미.”
“피곤했나보지.”
“네 다리가 편한 것도 있는 듯.”
백지수가 나를 째려봤다.
“그거 듣기에 따라서 존나 변태 같기도 한 거 알지?”
“죄송.”
“왜 그런 개소리를 했는지 해명이나 해보세요.”
“네 허벅지가 두툼해서?”
“이런 개 미친 놈이!”
백지수가 발끈했다. 잿더미가 놀라서 일어나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도도도 달아났다. 백지수도 일어나서 내게 뛰어오려 했다. 일단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쪽으로 뛰어 도망치려했다.
“야! 2층 올라가지 말랬지!”
“안 때린다고 약속하면.”
“안 때려!”
계단 중간에서 멈춰섰다. 백지수가 내 오른 팔뚝을 양손으로 붙잡고 고개 숙여 숨을 골랐다.
“하아... 개새끼 진짜...”
“2층에 뭐 있는데 그렇게 꽁꽁 감추세요?”
“하... 알 거 없어 병신아...”
“네.”
도로 내려갔다. 잿더미가 바닥에 있던 츄르 봉투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잿더미!”
백지수가 소리쳤다. 잿더미가 얼굴을 빼내려 몸을 낮추고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머리가 봉투에 끼여서 빠져나오지 못 했다. 백지수가 쿡쿡 웃으며 다가갔다.
“잿더미ㅡ.”
이번엔 다그침보다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백지수가 잿더미 앞에서 쭈그려 앉아 봉투를 더 뜯어 잿더미가 머리를 뺄 수 있게 했다. 잿더미의 머리가 빠지고 백지수가 곧장 잿더미의 두 앞다리를 붙잡았다.
“방금 자다가 또 먹으려고? 왜 이리 욕심이 많아요?”
백지수가 아기라도 들 듯이 잿더미의 겨드랑이에 엄지와 검지 사이 손아귀를 넣어 들었다. 잿더미의 초롱초롱한 눈이 백지수를 바라보았다. 백지수가 배시시 웃었다.
“잿더미. 언니랑 올라가서 잘래요?”
냐앙, 하고 잿더미가 울었다. 백지수가 그걸 긍정의 대답으로 알아들었는지, 알겠어 알겠어, 라고 말하고 잿더미를 품에 안아 오른손만으로 받치고 왼손으로는 츄르 봉투를 들어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조금 황당했다. 잿더미한테 친구를 뺏긴 느낌도 들었고. 인정하기는 싫은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왜 잿더미는 2층으로 데려가? 종 차별하는 거야?”
백지수가 멈춰서서 고개만 돌려 나를 봤다.
“응.”
“좀 억울한데.”
“꼬우면 고양이로 태어나든가 하셨어야죠.”
“근데 걔 여자 맞아?”
“응.”
잿더미가 냐앙, 하고 울었다. 백지수가 잿더미를 내려보며, 으응, 안겨 있는 거 힘들지, 올라가자, 라고 말하고 다시 다리를 놀렸다. 따라 갈 수는 없어서 그냥 소파에 털썩 앉고 문자를 보냈다.
[근데 잿더미 말고도 여기 찾아오는 고양이 있어?]
[아니.]
[근데 왜 잿더미만?]
[말 할 게 많아서 걍 안 답함.]
[전화 가능?]
전화가 걸려왔다. 백지수였다.
ㅡ너 한시라도 다른 사람이랑 안 있으면 견디질 못 하냐?
“응.”
ㅡ존나 중증이네.
냐아, 소리가 들렸다.
ㅡ으응, 잿더미 바로 자려고요? 뚱냥이 되면 안 되는데? 좀 이따 자요.
“난 잿더미 다음이야?”
ㅡ하. 너 진짜 정신과 가봐야 될 거 같은데.
“아냐 나 이러는 거 컨셉이야.”
ㅡ좆까. 구라인 거 다 티 나거든.
“티 나면 옆에 좀만 있어주면 안 돼?”
한숨 소리가 들렸다.
ㅡ너 사람 미치게 한다.
“미안해.”
ㅡ그런 건 네 여친한테나 해.
“나 여친 없어.”
내가 말하고도 놀라울 정도로 즉답이었다.
ㅡ... 그럼 만들든가.
“만든다니, 뚝딱 하고 생기는 게 아니잖아, 연인이라는 게.”
ㅡ아 어쩌라고. 네가 알아서 해. 누구를 사귀든 반려동물 키워서 껴안고 살든.
“알겠어.”
또 한숨 소리가 들렸다.
ㅡ너 씨발 일부러 그러지.
“뭘.”
ㅡ지금 존나 시무룩해진 거. 내가 지금 내려가서 너 끌어안고 머리 쓰다듬어주기라도 해줘? 그거 바라서 존나 토라진 척 하는 거야?
“됐어. 필요 없어.”
ㅡ그럼 그따구로 말하지 말라고.
“... 의도한 건 아냐. 미안해.”
ㅡ후우... 네가 또 그러면, 아니 됐다. 끊어.
“응.”
전화를 끊었다. 백지수 말대로 이상한 건 나였다. 한숨이 나왔다.
의지를 하려거든 여자친구에게 하라는 것도 맞는 말일 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전화를 걸어도 좋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얘기할 시간을 뺏을 수도 없었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전화를 걸 수 없었다. 김세은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감춰야 했으니까.
그냥 불을 끄고 폰을 충전기에 꽂은 다음 소파에 누워 눈 감았다. 잠이 모든 감정과 감각을 절개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체감 상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도 정신은 또렷했다. 무언가를 바라는 건 그걸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시답잖은 상념만 떠올랐다. 왼팔을 뻗어 폰을 손에 쥐었다. 백지수한테 문자를 보냈다.
[나 잠 안 와.]
[나 보고 어떡하라고.]
[나 재워주면 안 돼?]
[지랄하지 마.]
[나 불 끄고 한 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는데 못 잤어.]
[중간중간 폰 만진 거 아냐?]
[아냐 진짜로.]
[너 지금 진심으로 진지하게 부탁하는 거야?]
[응]
3분 간 답장이 안 왔다.
[10분 뒤에 올라와.]
[고마워.]
김세은에게 잘 자라는 문자를 보냈다. 6분 정도가 지나고 전화가 왔다. 김세은이었다.
“어 세은아. 근데 옆에 아무도 없어?”
ㅡ응. 잘 자라고 말하려구 전화했어. 지금 자려 했어?
“응.”
ㅡ빨리 잔다. 암튼. 잘 자?
“잘 자 세은아. 사랑해.”
ㅡ나두 사랑해. 잘 자.
“응. 끊을게.”
ㅡ응.
전화를 끊었다. 잠시 멍 때리며 기다리다가 10분이 지난 걸 보고 백지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올라갈까?]
[어 올라와.]
[이불이랑 베개 챙겨?]
[어.]
베개에 이불을 돌돌 말아 끌어쥐고 2층에 올라가 백지수의 방문 앞에 섰다. 베개와 이불을 오른팔만으로 잡고 휴대폰을 쥔 왼손으로 노크했다. 곧 문이 열렸다. 백지수의 방은 무드등 빛만 있어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침대 왼편에 잿더미 있으니까 조심해.”
“응.”
쿠션이 깔린 커다란 박스 안에서 배를 까고 잠든 잿더미를 보며 살풋 웃었다.
“귀엽다.”
“근데 존나 골칫덩이야 진심. 내 쿠션도 바치고.”
“잘 안 쓰는 쿠션이라서 준 거 아냐?”
“그래도 내 거 준 거잖아.”
“글킨 하지.”
백지수의 침대는 크기가 상당히 컸다. 세 명은 잠들 수 있을 듯했는데, 그 정도 크기임에도 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았다. 백지수가 자기 베개와 이불을 왼편으로 밀어냈다.
“알지?”
백지수가 물었다.
“응.”
오른편에 이불과 베개를 내려놓고 펼쳐서 누웠다.
“불 끈다.”
“응.”
백지수가 무드등을 껐다. 창가의 커튼이 달빛 한 점도 들여보내지 않아 시야가 어두웠다.
“지수야.”
“왜.”
“고마워.”
“어.”
5분 정도 눈 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조용히 소리를 냈다.
“지수야, 자?”
“안 자.”
“나 잠 안 와.”
“어떡해달라고.”
“재워줄 수 있어?”
“미친 놈.”
백지수가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와.”
“오라고?”
“들었음 걍 와.”
오른손으로 침대 시트 바닥을 더듬으며 몸을 꿈틀대서 백지수에게로 가까이 갔다. 어느 순간 팔이 만져졌다.
“뭐야?”
“내 오른팔.”
“막는 거야?”
“안으로 들어와 병신아.”
“... 응.”
품으로 들어갔다. 내 오른 상완 위로 백지수의 왼팔이 얹혀졌다. 가슴이 막 두근거렸다. 백지수가 나를 안았다.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조심히 눌러 나를 더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원하는 대로 끌려갔다. 내 이마가 백지수의 가슴과 맞닿았다. 브라를 입지 않은 게 확실했다. 내가 뱉은 숨이 백지수의 몸에 가로막혀 곧바로 돌아와 내 얼굴을 덥혔다. 백지수가 왼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문득 백지수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고개를 들려 했는데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꾹 눌렀다.
“너 고개 들면 뒤져.”
“응.”
백지수의 등에 내 오른팔을 감으려 했다.
“하지 마.”
“알겠어.”
오른팔을 도로 내 옆구리 위에 얹고 눈을 감았다. 따스하고 포근했다. 잿더미가 골골대는 소리가 들렸다.
“잿더미 꿀잠 자네.”
“너도 좀 자 병신아.”
“네.”
신기하게도 잠이 솔솔 왔다. 말단부터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고 곧 의식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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