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밤 (5)
* * *
백지수가 대문에 열쇠를 집어넣으면서 내가 오른손에 든 봉투를 흘깃 봤다.
“뭐냐?”
“아인슈패너랑 초코 머핀.”
“디저트 누구 건데.”
“네 거.”
백지수가 현관문을 열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진 느낌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구름 뒤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나 살찌라고?”
다시 고개를 내려 백지수를 봤다.
“싫음 내일 먹든가 하면 되지.”
“너 때매 열받아서 지금 먹어야 화풀릴 듯.”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타방에 기타와 베이스 케이스를 내려놓고 나와 백지수가 어디 있나 봤다. 백지수는 주방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서 폰을 보고 있었다. 테이블에 아인슈패너와 초코 머핀을 차차 내려놨다. 백지수가 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야.”
“응?”
“머핀 너 반 먹어.”
“네가 다 먹지.”
“못 먹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럼 나 먹을 테니까 커피 마셔도 돼?”
“너 안 자게?”
“못 잠 네가 재워주면 되지.”
백지수가 기겁했다.
“개 미친 소리 당연하게 하지 마 미친 새끼야...”
픽 웃었다.
“잘 수 있어. 피곤해서.”
“그럼 커피는 네가 알아서 하시고.”
“네.”
컵에 원두 스틱을 타 우유를 많이 붓고 시럽을 적당히 넣었다. 백지수가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접시 갖고 와.”
“응.”
나도 손을 씻고 왼손으로는 접시를, 오른손으로는 잔을 들고 가 의자에 앉았다. 백지수가 손으로 머핀을 반 나눠 한 덩이를 접시에 올렸다.
“접시에 있는 거 네가 드삼.”
백지수가 초콜릿이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입에서 빠져나온 손가락에 묻은 침에 조명 빛이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뭔가 부끄러워서 접시 위 머핀으로 눈을 돌렸다. 커피를 한 모금하고 머핀을 들어 한 입 작게 베어물었다. 고개 들어 백지수를 봤다. 백지수는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어서 열심히 오물거리고 있었다.
“배고프셨나봐요?”
음식물이 들어 있는 탓에 말을 하지는 못하는 백지수가 눈을 찌푸렸다. 좁혀진 미간이 퍽 보기 좋았다.
“너 중국 미녀 같애.”
백지수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피식 웃었다. 머핀을 꿀꺽 삼키고 아인슈패너를 한 입 빨아들여 마신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존나 쫒겨나기 싫으면 설명 잘해야 될 거다.”
“서시. 병 있어서 항상 가슴 위에 손 얹고 눈 찡그리고 다닌다던 미녀 있잖아. 물고기가 얼굴 보고 헤엄치는 법을 잊어서 그대로 가라 앉았다는 얘기도 붙은 미녀.”
“존나 배배 꼬아서 말하네...”
백지수가 다시 아인슈패너를 한 모금했다.
“근데 그거 원래는 그런 뜻 아닌 거 알아?”
“뭐, 장자 얘기하게?”
백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아네?”
피식 웃었다.
“아는 게 신기한 거긴 해.”
“그니까. 왜 아세요?”
“넌 왜 아세요?”
“난 그냥 좀 잡다한 상식 느낌으로?”
“그게 상식이면 내가 몰랐다고 가정했을 때 무식한 사람 되는 거 아냐.”
“아니아니, 알기 어려운 상식이라는 거지.”
“그래서, 뭔 뜻인데요?”
“네가 설명해봐.”
“침어낙안인데, 이건 나중에 파생된 거고. 본 뜻은 사람들이 미녀라고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도 동물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라서, 물고기는 밑으로 도망치고 새는 하늘로 날아간다는 거지. 만물은 상대적이다? 대충 그런 의미를 갖는 내용.”
“잘 아네.”
“칭찬 감사.”
“의외다.”
백지수가 다시 머핀을 한 입했다. 목으로 넘기는 걸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의외라니?”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 너 철학은 관심 없는 줄. 아니, 다른 건 몰라도 동양철학은 아예 모를 줄 알았어.”
“어째서 그런 이미지가 잡힌 거죠?”
“너 존나 팝송 러버잖아.”
“그럼 내가 뭐 희랍 철학이나 대륙 철학 같은 거만 찾아봤을 거 같애?”
“너 지금 존나 철학과 같은 거 알아?”
“약간 비하적 의미가 담긴 거 같은데?”
“그건 네가 그렇게 받아들인 거고.”
“일체유심조다?”
백지수가 웃었다.
“개 재수 없어.”
나도 마주 웃었다. 커피를 한 모금하고 다시 머핀을 베어물었다. 단 맛의 연속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맛있다.”
“응. 여기가 디저트 맛집이야.”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기분 좋은 듯 미소지으며 답했다.
“지수야.”
“응?”
“너 웃는 거보다 눈 찡그리는 게 더 예쁜 거 같애.”
백지수가 미간을 좁혔다.
“장난?”
“아니 진심으로.”
커피를 다시 한 입 마셨다. 어느새 절반 이상을 마시고 말았다.
“맞다 지수야.”
“왜.”
“방금 집 들어올 때 달이 구름 뒤로 갑자기 숨더라?”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폐월 드립이야?”
“응.”
“그래서 달이 누구 보고 숨은 건데.”
“너라고 해줄까?”
백지수가 일어났다.
“너 일로 와봐.”
“아 죄송해요.”
백지수가 뒤에서 헤드락을 걸어왔다. 그리 아프게 조여오지는 않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가슴의 뭉클함에 숨을 못 쉬는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져가는 게 느껴지기는 했다. 등받이가 높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다. 목을 두른 백지수의 오른팔에 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풀어주세요.”
사실 안 풀어도 됐다.
“쫓겨나기 싫음 말 예쁘게 하랬지.”
“네.”
“근데 왜 초딩처럼 말해.”
“아는 애한테서 말투가 옮았나봐요.”
“너 초딩이랑 친구야?”
“초딩 같은 애가 주변에 있어요.”
“몇 살인데.”
“중3이요.”
“여자?”
“그게 중요해요?”
“물어볼 수도 있지.”
여자라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남자앤데요.”
“어.”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 지금.”
백지수가 헤드락을 풀었다. 그러곤 도로 자리에 앉으러 가지는 않았다. 뒤돌아보려고 했는데 백지수가 두 손으로 내 머리 양옆을 잡아서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했다.
“뭔데 또?”
“지금 뒤돌아보지 마.”
“나 진짜 지금은 왜라는 질문 못 참겠는데?”
“하지 마 미친 새끼야.”
“알겠어 고개 안 돌릴게.”
존나 궁금했다. 멀지 않은 뒤에서 조용히 심호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안 가 백지수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
“질문 안 받아.”
백지수가 다시 머핀을 먹었다. 음식물을 넘기는 걸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어디 아파?”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안 아파 병신아.”
“아프냐고 물어본 게 욕할 일이야?”
“... 미안.”
“미안하면 이따가 나 재워줘.”
“지랄...”
백지수가 아인슈패너를 마셨다. 휘핑크림이 윗입술에 묻었다.
“너 존나 왤케 끼부리냐?”
“네 윗입술에 휘핑크림 묻음.”
“아, 너 때문이잖아. 존나 정신 사나워서 생각 없이 마셔가지고... 갑자기 왤케 맛 없어졌나 했네.”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날름대서 크림을 없앴다.
“남았어.”
“아 씨...”
백지수가 일어나서 싱크대에서 물을 틀어놓고 오른손으로 입술을 닦았다. 돌아온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남은 머핀 네가 먹어.”
“왜요?”
“먹을 맘 없어졌으니까 네가 먹으라고.”
침 묻은 손가락으로 몇 번 만져댄 머핀을 나더러 먹으라고?
“진심이야?”
“그럼 버려?”
“아깝잖아, 네가 먹어야지.”
“머핀 4500원이지.”
“어.”
백지수가 왼손 중지와 엄지로 초코 머핀을 집어들었다.
“돈 보낼게. 버린다?”
“아냐 내가 먹을게.”
“지금?”
“그럼 언제 먹어?”
백지수가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네가 말한 거다.”
백지수가 내 왼쪽에 서서 오른팔로 헤드락을 걸어 오른손으로 내 턱을 잡고 내 입에 머핀을 가져다 댔다. 말을 하고 싶었는데 불가능했다. 입을 열면 머핀이 들어오는 거였고 고개를 돌리면 백지수의 가슴에 머리를 비벼대는 거라 변태로 몰리는 길이었다. 손을 올려 제지할 수도 없었다. 자지가 발기해버려서 손은 그걸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입을 벌렸다. 백지수의 침이 묻은 머핀이 입 안에 들어왔다. 백지수가 헤드락을 풀고 흡족한 듯 미소지었다.
“맛있어?”
입에 고인 침이 백지수가 먹다 남긴 머핀 조각을 뒤덮었다. 덕분에 머핀은 물기를 머금었다. 내 침인지 백지수의 침인지 분간하기 어려워 기분이 미묘했다. 사실 백지수의 침일 리는 적었다. 성분 분석을 한다면 3%는 될까? 하지만 기분은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야릇했다.
“맛있냐구요?”
머핀을 만진 손가락을 탁탁 턴 백지수가 다시 물었다. 팔짱을 끼고 있어서 가슴이 부각됐다. d컵인가. 그런데 이수아보다는 조금 더 큰 느낌이었다. 그럼 e컵?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한 모금하고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뒤 입을 열었다.
“먹을 때 물어보면 안 되지. 아까 내가 계속 너 다 먹고 나서 말 걸었잖아.”
“오. 그건 안 가르쳐준 건데 기특하다?”
웃겼다.
“알면 너는 왜 안 지키는데요.”
“교수권 남용.”
“아 이런 사람들은 진짜 선생 자격 박탈해야되는디.”
“진짜 뒤진다?”
“미안하디.”
“레슨. 뇌절은 한 번도 용납 안 된다.”
“알겠디.”
“너 두 대만 때려도 돼?”
“안 되는디.”
“미친 놈아 적당히 하라고. 응?”
백지수가 내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다. 조금 쓰라렸다. 왼팔을 뒤로 해 왼손으로 등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만해라?”
“안 할게.”
“나 이제 씻으러 올라갈 거니까 2층 올라올 생각하지 마라.”
앉은 채로 고개만 뒤로 돌려 백지수를 쳐다봤다.
“너 진짜 2층에 뭐 숨겼길래 그래?”
“안 알려줘.”
백지수가 계단을 올라갔다. 나도 씻어야겠다 싶었다. 빨리 남은 걸 먹고 컵과 쓰레기를 치운 다음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머리에 물을 쏟았다. 하루가 끝나간다는 실감이 났다. 바디워시를 바르는데 몸이 조금 추웠다. 사람을 껴안고 싶었다. 그보다는 껴안아지고 싶었다. 수건으로 몸기를 털어내고 입던 옷을 도로 입고 나갔다. 소파에 그대로 있는 이불을 두르고 뒤뚱뒤뚱 걸어 헤어드라이기 앞으로 가 머리를 말렸다. 머리를 다 말렸을 즈음엔 추위는 가셨지만 허함이 남았다. 소파에 앉아 카페에서 본 두 명과 맞팔했다. 쌓인 문자에 일일이 답변했다. 글로 말이 오가도 허함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텅 빈 느낌이 너무 강해서 머리를 말리려 내려온 백지수를 보고 무심코 안아달라는 말을 할 뻔했다. 그런 내가 한심하고 병신 같아서 한숨만 푹 내쉬었다.
“왜 한숨?”
하얀 수건을 목에 걸치고 머리를 말리던 백지수가 헤어드라이기를 끄고 물었다.
“그냥.”
백지수가 피식 웃었다.
“할 말 있음 해. 나 머리 말리고 들어줄게.”
“고마워.”
진심으로 이 순간 백지수가 내 옆에 있다는 게 너무 다행스럽고 고마웠다. 보는 것만으로 빈 곳이 살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조금 미소지을 수 있었다. 언젠가 꼭 보답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