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밤 (4)
* * *
김세은이 보낸 문자를 봤다.
[무슨 일이야?]
뭐라 할까 고민했다. 거짓을 말해도 될까, 어머니는 그래도 된다고 할까, 생각하다가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우리 어머니가 입원하셔서 보러 갔어. 단합은 끝났어?]
다른 사람이 보낸 메시지들도 보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김세은이었다.
“여보세요.”
ㅡ온유야.
나직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이렇게 티내는 걸 보면 아마 주변에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응?”
ㅡ어머니는 괜찮으시대? 무슨 일 때매 입원하신 거야?
“막 사고난 거는 아니고, 몸조리를 잘 못 하셔서 수액 맞은 거야. 아마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이럴 땐 수액 맞아야 된다면서 성화 부리셔 가지고 간 거일 걸.”
ㅡ되게 아끼시나 보다.
“엄청 아끼시지.”
ㅡ으응... 온유야.
“응.”
ㅡ그럼 어머니 얼마나 병원에 계시는 거야?
“나도 몰라. 외조부는 그냥 괜찮아질 때까지 거기 살게 시킬 기세였고, 어머니는 끌려 온 거라 모른다고 해서. 의사한테 물어보거나 해야 됐을 건데. 까먹고 그걸 안 물어봤네.”
ㅡ거기에 오래 계실지도 모른다는 거네?
“그렇지.”
ㅡ그럼 나중에 너 어머니 보러 갈 때 나도 같이 병문안 가서 인사드리면 안 돼?
“왜?”
ㅡ한번 뵙고 싶어서. 어제 오신댔는데 못 오신 이유도 들어보고 싶구. 네 얘기도 이것저것 들어보고 싶구. 그냥 궁금한 게 많아서.
“으응...”
조금 당황스러웠다.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거는 마치, 결혼을 마음 먹은 여자친구가 시어머니될 분을 뵙겠다고 달려드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아무튼 김세은이 주는 인상이 그랬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해야 고등학교 2학년 밖에 안 되는 나이였고. 너무 급했다. 설령 김세은의 의도가 내 생각과는 다르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바는 그랬다.
“난 좋은데, 일단 어머니한테 물어볼게.”
ㅡ근데 어머니는 아셔?
“뭘?”
ㅡ내가 너랑 사귀는 거. 얘기해드렸어?
“했어 오늘.”
ㅡ그럼 된다고 하실 걸?
“무슨 근거로?”
ㅡ나니까?
웃음이 터져나왔다.
ㅡ왜 웃어?
“너 귀여워서.”
ㅡ히힣.
“너는 부모님한테 얘기했어?”
ㅡ나? 난 아직 안 했어.
“응. 근데 단합은 다 끝난 거야?”
ㅡ아니.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어?”
ㅡ응.
“뭐 했어? 아니 지금은 뭐 해?”
ㅡ그냥 한강 와서 얘기하면서 걷다가 앉아있는데?
“으음... 그럼 넌 어떻게 나한테 전화 건 거야? 안 들키고?”
ㅡ나 매니저 오빠한테서 전화하라고 문자 왔다고, 멀리 떨어져서 걸겠다고 얘기했지.
“그렇게 매니저님 갖고 거짓말 쳐도 돼?”
ㅡ되지. 안 될 건 또 뭐야.
스피커에서 음악 소리가 미세하게 새어나왔다.
“누구 노래 불러?”
ㅡ음... 유은이 기타 들고 갑자기 잼하는 거 같은데.
“와. 뭐랄까 되게 청춘스럽다.”
ㅡ풋. 그니까.
“나도 가고 싶다.”
ㅡ왜?
기분 탓인가, 물음이 날카롭게 들렸다.
“너 보고 싶어서.”
ㅡ힝. 나도 너 보고 싶어.
“보러 갈 수 있나? 언제까지 있을 거 같애?”
ㅡ몰라. 대충 여덟 시 반 되면 해산하기로 했는데.
시간을 확인했다. 여덟 시 십 칠 분이었다. 병원이 먼 탓이었다.
“못 가겠다.”
ㅡ왜? 나랑 따로 만나면 되잖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만나면 아홉 시 언저리가 될 거고 그때면 막상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을 거였다.
“너 내일부터 스케줄도 있잖아. 쉬어야지.”
ㅡ반대로 내일부터 스케줄 있으니까 지금 너 보고 싶은 건데.
“안 돼 진짜.”
ㅡ히잉... 알겠어.
피식 웃었다.
“삐지지 마.”
ㅡ그 말 들으니까 더 삐지고 싶어져.
“담에 만났을 때 잘해줄게.”
ㅡ정확히 언제일지는 얘기 안 해주고?
“네가 시간이 나야지.”
ㅡ이번 주는 조금 어려울 거 같은데.
“그럼 안 되는데.”
ㅡ그니까 지금 만나자구.
“만나도 아홉 시 쯤에 만나게 될 건데, 그럼 암것도 못하잖아. 쉬어. 나 때매 너 컨디션 망치기 싫어.”
ㅡ네가 그렇게까지 말함 난 어떡해?
김세은이 애교스럽게 투덜댔다. 피식 웃었다.
“몸 관리 잘 해주면 돼요.”
ㅡ알겠어.
“통화 너무 오래 했다. 더 있다 돌아가면 의심 살지도 모르니까 지금 끊자.”
ㅡ응.
“둘러댈 거리는 정했어?”
ㅡ잡담 좀 했다 하면 되지. 그거 캐물을 사람이 어딨다고.
“그렇네. 사랑해 세은아.”
ㅡ히힣. 나두 사랑해 온유야.
“끊을게.”
ㅡ응.
전화를 끊었다. 세은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날카로운 물건으로 가슴이 쿡쿡 찔리는 듯했다. 나는 정말 김세은을 사랑하는 걸까? 어머니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들어봐야 했다는 생각이 막심하게 들었다. 세은이가 좋은 건 맞지만, 가끔 숨이 막혀서 벗어나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온세상을 가진 듯하다는, 사랑에 관련한 상투적인 표현과는 정반대로 내가 가진 것들을 모조리 통제당하고 빼앗길 듯한 느낌도 들곤 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김세은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성급하게 내가 김세은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예단하고 김세은에게 헤어지자는 뉘앙스를 풍겨서도 안 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리고 나서 나중에 내가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면 그때 펼쳐질 길은 만나는 여자마다 진실함 없이 대하고 정사 후의 상념 속에서 김세은에게로의 회귀와 후회만을 반복하는 우울한 미래 밖에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고 근처 카페를 찾아가 핫초코를 시키고 창가의 일인석에 착석했다. 백지수는 언제쯤 돌아올까. 테이블에 오른팔을 대 턱을 괴고 눈을 감은 채 카페의 어두운 조명과 그루브한 느낌의 pbr&b 음악에 잡념을 묻었다. 피로가 쏟아졌다. 핫초코를 받아가라는 소리에 일어나서 잔을 받고 돌아가 천천히 호록댔다. 나른함에 눈이 감겨왔다. 폰을 꺼내 확인했다. 백지수가 보내온 메시지가 있었다.
[너 어딨냐.]
[네 별장 근처 카페]
[어.]
[어딘지 안 물어봐도 돼?]
[대충 알 거 같아서.]
[너 언제 와?]
[몰라.]
[지금 전화 걸어도 돼?]
[어.]
전화 걸었다. 바로 받았다.
“해산했어?”
ㅡ어. 더 놀 사람은 알아서 나뉘고, 집 갈 사람은 가고 그랬어.
“더 노는 사람은 누구누군데?”
ㅡ걍 남자 조금. 피방 가서 롤 큐 돌리자던 거만 들었어.
“으응.”
ㅡ그건 왜?
“물어볼 수도 있잖아. 근데 넌 나한테 왜라고 질문해도 되는 거야?”
ㅡ레슨 하나 더. 이런 거 일일이 걸고 넘어지지 말고 그냥 모르는 척 자연스럽게 넘어가주기.
“네에.”
ㅡ대답이 시원치 않다?
“알겠습니다.”
백지수가 쿡쿡 웃었다.
“너 지금 혼자 택시 타고 오는 거야?”
ㅡ응.
“내 기타는 왜 네가 갖고 있어?”
ㅡ내가 가위바위보 져서.
“불쌍.”
ㅡ말 짧게 하는 거 왤케 열받지?
“지금 지수씨가 화가 많아서 뭐든 다 아니꼽게 받아들여지는 거 아닐까요?”
ㅡ너 방금 불쌍, 한 것도 일부러 나 화나라고 한 거지.
“아닌데?”
ㅡ너 만나서 봐.
“뭐 어쩌시게?”
ㅡ집 안 들여보내줌.
“아 미안해.”
ㅡ길바닥에서 자기 싫으면 말 예쁘게 하세요?
“네 예쁘게 말할게요.”
ㅡ조심해.
“네.”
백지수가 한숨 쉬었다.
“뭐 걱정 있어?”
ㅡ있어.
“무슨 걱정인데?”
ㅡ너요 이 불청객 놈아.
피식 웃었다.
“고마워.”
ㅡ짜증나.
“짜증날 땐 단 거 먹는 게 최곤데. 네 거 뭐 주문해줄까?”
ㅡ나 아인슈패너.
“지금 테이크아웃으로 시켜?”
ㅡ지금 말고 한 15분 이따가? 근데 아이스 말고 따뜻한 거로.
“알겠어. 디저트는 필요 없어?”
ㅡ야식 먹음 살 찌잖아.
“너 이미 쪘잖아요.”
가슴이랑 허벅지가.
ㅡ너 오늘 길바닥에서 자라.
“아 미안해.”
ㅡ안 봐줘.
“그러지 마. 쪘다는 말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면 진짜 찐 거 같잖아.”
ㅡ진짜 넌 뒤졌다.
전화가 끊겼다. 문자를 보냈다.
[장난인 거 알죠?]
[지랄 ㄴ]
[내가 선 넘는 드립치는 사람은 아니잖아.]
[이미 선 넘었죠?]
[아니, 진짜 뚱뚱한 애 앞에서는 살이나 뚱 자도 못 꺼내잖아. 넌 안 쪘으니까 그렇게 장난치고 하는 거지.]
[내가 기분 나빴음. 그게 중요.]
[어떡하면 화풀어줄 거야?]
[네가 알아서 잘 해보세요.]
피식 웃었다.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김세은한테 많이 들었던 말이라서 그런 거였나.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단 거를 연속으로 먹기라도 한 것처럼. 막상 입에 들어간 거는 핫초코 뿐인데. 피곤했다. 빨리 소파에 눕고 싶었다.
조금 편한 데로 자리를 옮겨서 짧은 시간이라도 몸을 기대거나 하고 싶었다. 잔을 들고 일어서서 두리번거렸다. 전체적으로 유럽풍 가정집스러운 인테리어여서 사각형의 2인 테이블, 4인 테이블도 있었고, 낮은 원형 테이블 앞에 두 명이 앉기 적당한 카우치와 1인 소파도 있었다. 원형 테이블 앞 1인 소파가 탐났다. 그런데 거기 있는 카우치에 이미 여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다른 일행이 있어서 거기에 앉을 예정이라면 앉을 수 없어서 그림의 떡 같았다. 일단 다가갔다. 이 의자 써도 될까요, 라고 물었고, 아, 네, 네, 그냥 여기서 앉으셔도 돼요, 라는 답을 들었다. 답해준 사람 옆에 있던 여자가 무슨 미친 소리야, 라고 조용히 타박하며 손바닥으로 팔뚝을 팍팍 쳤다. 나는 의자를 옮겼다 돌려놓기 귀찮아서, 저 진짜 그냥 여기에 앉을게요, 라고 말하고 거기에 그대로 앉았다.
나 보고 그냥 앉아도 괜찮다고 한 여자가 요 주변에서 사세요, 라고 물어왔다. 아니라고 답하고 핫초코를 마셨다.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얘기하는 동안 머리 아픈 게 가셔서 그냥 주욱 잡담했다. 두드드, 폰이 울려서 백지수인 걸 확인하고 이만 일어나보겠다고 했다. 폰번을 교환하자 해서 빨리 가야 된다고 말하고 인별 아이디를 주었다. 카운터에 가서 아인슈패너 따뜻한 거랑 초코 머핀을 테이크아웃해달라고 했다. 백지수의 전화는 끊긴지 오래라 문자를 확인했다.
[전화 씹냐?]
[아인슈패너 테이크아웃해달라고 했어요.]
[잘 했어.]
웃음이 나왔다. 나온 걸 받고 밖에 나가 백지수 별장 대문 앞에 서서 백지수를 기다렸다. 택시를 보자마자 뛰어갔다. 백지수가 나온 걸 보고 트렁크를 열어 기타와 베이스 케이스를 꺼내 왼어깨에 둘러멨다. 트렁크를 닫으니 택시가 떠나갔다. 백지수가 나를 봤다.
“빠릿빠릿하다?”
“봐주실 거죠?”
“좀만 더 고민해보고?”
“진짜 죄송해요.”
백지수가 피식 웃었다. 나도 마주 미소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