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서유은 (5)
* * *
“헉... 선배. 이거 봐봐요.”
돈을 펴서 정리하던 서유은이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포스트잇을 집어 내밀었다.
ㅡ두 분 혹시 연인 사이 아니시면,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베이지 트렌치 코트 입은 여자들 중에 제일 키 크고 예쁜 사람이에요. 010xxxxxxxx
“응. 봤어.”
“우와아... 선배...”
“반응이 왜 그래?”
“선배는 익숙하세요? 이런 거?”
“익숙하기는. 근데 왜 내 앞으로 보낸 거라 생각해? 너한테 보내는 걸 수도 있잖아.”
“그게 뭔 소리예요. 그 분이 선배 뚫어져라 쳐다본 거 모르세요?”
“그 분? 바로 떠올라? 누구인지?”
“네. 제일 키 큰 분이면 딱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
“네. 너무 선배만 보셔서 제가 다 민망했는데.”
“으음.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안 봐서 그런가봐.”
“선배애...”
“왜?”
“그렇게 훅 들어 오시면 안 되는데요...?”
“뭐가?”
“선배 의식 없이 그러시는 거 유죄예요오...”
“네가 너무 그쪽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고?”
“아, 아녜요오! 누가 들어도 오해한다니까요오...?”
말하는 자기도 긴가민가해졌는지 끝음이 흐려졌다. 서유은이 지폐를 빳빳하게 펼치고 반 접은 다음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나는 안 보고 길의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가죠 선배?”
“응.”
서유은의 발걸음에 맞춰 나란히 걸었다.
“왜, 왜 웃으시는 거예요...?”
“몰라. 너 보면 막 웃게 돼.”
서유은이 고개를 틀어 나를 봤다.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이번 건 선배도 아시겠죠?”
“조금?”
“조금이 아니라아...”
“건너자.”
서유은의 왼팔목을 잡고 짧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서유은이 어, 어어, 네, 하고 얼빠진 반응을 하면서 어정쩡하게 걸었다. 반대편에 도달하고 손을 놓아주었다. 계속 걸었다. 서유은이 내 속도에 맞춰 발을 놀렸다. 서유은이 내 속도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그럼 서유은이 또 따라오려 들었다.
“하악... 선배애! 저 갖고, 장난치지 마세요오!”
웃었다. 속도를 느릿느릿 걷는 정도로 늦췄다.
“알겠어.”
서유은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고개를 하늘로 쳐들어 숨을 몰아쉬면서 터덜터덜 걸었다.
“하아... 선배는, 배려가, 있다가도, 없네요...”
“너 왜 이리 힘들어 해?”
“선배랑 저랑, 보폭이 다르잖아요오...”
“그렇네. 너 키 몇이지?”
“저, 154.7이요...”
“되게 작긴 하다.”
서유은이 나를 쏘아 봤다. 시선이 조금 따가웠다.
“콤플렉스야? 미안해.”
“저 키 갖고 뭐라 하는 거 진짜 싫어해요.”
“키는 네가 선택하지 못하는 거라서?”
서유은이 눈을 크게 떴다.
“독심술사예요 선배?”
피식 웃었다.
“사람들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하잖아. 나도 그런 생각하거든.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선천적인 요소로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으면 안 된다고. 성별이나 인종이나 그런 거로.”
“선배 속 엄청 깊으신 거 같아요.”
“또 콩깍지.”
“아니라니까요오...!”
서유은의 목소리가 끝자락에서 움츠러 들었다. 아마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서울숲은 햇살이 밝은 날이면 항상 사람이 많았다. 친구와 함께, 혹은 연인과 함께 와서 마냥 걷거나 돗자리를 펼쳐 잡담을 나누었다. 가는 길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었고,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커플들은 식별하기 굉장히 쉬웠는데, 그들은 보통 옷을 바지나 상의를 깔맞춤하거나 손을 잡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통은 둘 다 했다.
“선배애...”
“응?”
“손 잡은 사람들 엄청 많아요...”
“연인들이 많이 오니까.”
“왜 이런 데 데려오셨어요오...”
“그냥 친구 사이도 여기 자주 와.”
“그건 알겠는데요... 근데요...”
“근데 뭐?”
“선배랑 저 기타 매고 있잖아요...”
“응.”
“막, 사람들이 저희 보면서, 아 쟤네는 기타로 맞췄나 보다, 이런 생각하면 어떡해요오...?”
귀여워서 웃었다.
“왜 웃어요오... 저 심각한데에...”
“사람들이 그런 생각하면 뭐 어때. 상관 없잖아.”
“선배는 기분 안 나쁘세요...? 저랑 엮여서 생각되는 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왜 기분이 나쁜데?”
“선배는 키도 크시구... 그냥 다 잘하시는 만능 이런 느낌인데, 저는 그냥 밥 축내는 식충 이런 느낌이구...”
“왜 그리 자존감이 낮아? 너 그럴 이유 전혀 없는데. 키 작은 것도, 그 정도면 귀엽다면서 누구나 좋아할 정도고. 피부도 예전에 김세은이 말했던 것처럼 애기 같고. 얼굴도 예쁘고. 목소리 좋으면서 노래도 잘 부르고.”
“그, 그만해주셔도 돼요오...”
미소지었다.
“더 해도 된다는 거지?”
“아, 안돼요오...”
서유은이 양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쌌다.
“손도 엄청 작으면서 얼굴 다 가려지고.”
“그만해요오...”
“알겠어. 사진이나 찍자. 인별한다면서.”
“찍을 건데, 지금은 안 돼요오...”
“그럼 적당한 데 나올 때까지 좀 더 걷자.”
“네에...”
작은 인공 호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사각형으로 물이 고여있고 중앙에 그곳을 가로지르는 짧은 다리가 있는 데가 보이는 흙길에서 멈춰섰다. 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켰다.
“여기서 사진 찍음 되겠다.”
“네에...”
서유은이 펜스와 줄이 있는 곳에 최대한 밀착했다. 거리를 조금 두어서 서유은을 화면 속에 담았다.
“유은아.”
“네...?”
“발 하나만 살짝 앞으로 뻗어봐. 다른 발은 수직으로 되게 하고. 전신샷 찍게.”
“앗, 네.”
서유은이 포즈를 취하고 카메라 렌즈를 직시해왔다. 다리를 굽혀 네 장 정도를 찍고 다가가 옆에 서서 폰을 보여줬다. 서유은이 머리를 내쪽으로 기울였다. 긴 머리카락이 내 오른팔 위로 흘러내렸다.
“오오!”
“괜찮은 거 같아?”
“네! 완전! 저 사진에서 키 커보이게 나온 적 처음인 거 같애요!”
“네가 비율은 좋잖아.”
“선배 또 습관성 칭찬하신다.”
“사실이니까.”
“진짜 그러심 안 돼요오...”
“나도 사진 좀 찍어줄래?”
“아, 네.”
“제가 찍어드릴까요?”
폰을 든 서유은이 뒤로 몇 발짝 걸었는데 마침 옆을 지나려던 커플 중 여자가 물었다.
“네 찍어주세요. 유은아, 와.”
“저요...?”
“응. 너 말고 누가 있어.”
“폰 저 주세요.”
“아 넵.”
서유은이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여자에게 폰을 건네준 뒤 내 옆에 와서 섰다.
“손 올려도 돼?”
“... 네.”
서유은의 좁은 어깨에 왼손을 얹고 상체를 기울여 눈높이를 낮추었다. 케이스 속 기타가 살짝 기울었다. 오른손으로 브이를 만들고 카메라 렌즈를 보았다. 여자가 화면을 몇 번 눌렀다.
“잘 나왔어요?”
“네. 진짜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폰을 건네받고 사진들을 빠르게 확인했다. 서유은도 확인할 수 있게 폰을 서유은에게 주었다.
“두 분도 찍어드릴까요?”
“아 저희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여자가 답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남자의 옆에 다가가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대었다. 둘이 나란히 걸었다. 방금 애들 키 차이 대박이지 않았어, 라고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엄청 설렐듯, 이라고 여자가 답했다. 시선을 거두고 서유은을 보았다. 서유은은 계속 사진을 넘겨보고 있었다. 서유은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키 차이 너무 나요오...”
“그래서?”
“이걸 인별에 어케 올려요오...”
“근데 찍어준 사람이 우리 어울린다고 했는데?”
“그, 그래도요오...”
“남이 보기에 괜찮으면 그만인 거지.”
“근데 전 안 될 거 같아요오...”
“그냥 올려. 누가 신경 쓴다고.”
“생각해볼게요오...”
이어서 걸었다. 잔디가 깔린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눕거나 앉은 사람이 많았다. 서유은이 하얀 야외 무대를 보았다.
“요기도 무대 있네요? 오면서도 하나 본 거 같은데.”
“여기서 버스킹해보고 싶어?”
“한번 쯤은...? 해도 좋을 거 같아요.”
서유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는 너 혼자해도 괜찮을 거 같아?”
“네? 아뇨오! 혼자는 절대 못할 거 같아요.”
“왜? 오늘도 원래는 혼자하려 했으면서.”
“놀리지 마요오...”
“네가 반응이 커서 자꾸 놀리게 돼.”
“그걸 왜 제 탓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도 그렇고.”
“아, 저 진짜 몰라요.”
서유은이 빠르게 걸었다. 쉽게 따라잡았다.
“미안해.”
“뭐가요?”
“너 놀린 거.”
“그리고요?”
“놀린 거 네 잘못으로 돌린 거?”
“그럼 앞으로 안 하실 거예요?”
“그건 장담하기 어려운데?”
“나빴어요.”
서유은이 거의 달리듯 걸었다. 그것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선배 왜 이리, 빠른 거예요...?”
“운동을 해둬서?”
“이럴 땐, 잡을 수 있어도, 떨어져줬다가 나중에 잡는 게, 예의예요...!”
“처음 알았네.”
“하아...”
서유은이 걷기를 멈췄다. 상체를 숙여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는 게 귀여웠다. 그냥 하는 짓이 다 귀여워보였다.
“그냥 저기 앉아서 쉬지.”
서유은이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네? 어디요?”
“저기.”
가까운 벤치를 가리켰다. 서유은이 터벅터벅 걸어서 벤치에 앉았다. 옆에 앉아서 풍경을 바라봤다.
“벚꽃 없어서 좀 아쉽다.”
“보통 4월 되면, 피어나니까요...?”
“그니까. 벚꽃 피면 진짜 예쁜데. 작년에 찍은 거 보여줄까?”
“후... 네에...”
서유은이 머리를 기울여왔다. 가쁜 숨소리가 점차 잦아드는 게 잔뜩 놀다 지쳐 잠시 쉬는 소동물 같았다. 미소지었다.
“예쁘지.”
“네...”
“벚꽃 피면 다시 올까?”
말하면서 서유은을 바라보았다. 상체를 다시 세워 나를 마주 본 서유은이 눈을 크게 떴다.
“둘이서만요...?”
“네가 편한 대로?”
“그, 그건 나중에 정하기로 해요오...”
“응. 다 쉬었어?”
“네 좀 괜찮아요.”
“다시 걸을까? 시간 아직 많이 남았어.”
“네!”
서유은과 함께 일어났다. 바람이 불어 머리 위 나뭇잎이 살랑였다. 그늘이 걷히면서 햇빛이 안구를 쏘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갑자기 정신이 아뜩했다.
“괜찮으세요...?”
“어. 괜찮아. 가자.”
불쾌한 감각이 사소하게 잔여했지만 일단은 안색을 꾸미고 걸었다. 뭔가 붙잡을 게 간절히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서유은의 손을 잡을 수는 없어서 그냥 양손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독한 감기에라도 걸린 듯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식은땀이 흐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이럴 이유가 없는데.
“진짜 괜찮으신 거예요...?”
“... 아닌 거 같아.”
“어, 어떡해요오...? 좀만 더 앉아서 쉬실래요...?”
서유은이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다 앞을 보기를 반복했다.
“아냐. 괜찮아. 걷다보면 나아질 거야.”
손 잡아줄래, 조금만 안아줄래, 같은 욕망의 말이 수 없이 생겨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그것들 중 정작 입 밖으로 내보내도 좋을 것은 하나 없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다리를 놀렸다. 아무래도 오늘도 백지수의 별장에서 잠들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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