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57화 (57/438)

〈 57화 〉 서유은 (4)

* * *

한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13곡 아님 14곡 정도 한 거 같았는데 벌써 시각은 1시 58분이었다. 2시까지 해야 해서 아쉽게 지금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밴드부 공식 sns 계정 PR를 덧붙임으로써 마무리했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관객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인증샷 찍어도 될까요? 모자이크 처리 할게요.”

시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볼 건 다 봤다 싶은 사람들과 피사체가 되는 게 부담이 되는 사람들은 은근슬쩍 뒤쪽으로 빠지는 게 보였다. 카메라 앱을 켰다. 셀카 모드로 바꾸고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유은아. 이리 와.”

“앗, 네!”

서유은이 옆으로 왔다. 한 발짝 정도 거리가 있었다.

“더 붙어.”

“네, 네? 네!”

서유은이 반 발짝 쯤 거리를 좁혀왔다. 서유은의 왼어깨에 손을 얹고 상체를 기울여 가까이 했다. 서유은이 흠칫했다가 카메라 렌즈를 보며 미소지었다. 관객들과 도시의 정경을 배경으로 검지와 중지로 v를 한 우리 둘이 서있었다. 사진을 세 장 찍은 다음 빠르게 확인했다. 뒤돌아 관객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서유은이 내가 하는 걸 보고 나서 관객들을 향해 거의 반절했다.

“감사합니다아!”

같이 사진을 찍자는 극소수의 사람과 사진을 찍고 이동할 채비를 했다. 시작할 때 열어 놓은 상태로 바닥에 팽개친 기타 케이스 속에는 사람들이 넣어준 지폐가 몇 장 들어있었다. 그것들을 손으로 쓸어 모아서 대충 접은 다음 서유은의 기타 케이스 주머니에 쑤셔넣고 마이크 스탠드를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아직도 정신이 빠진 듯한 서유은을 챙겨서 광장을 빠져나갔다. 택시 타는 곳으로 걸었다.

“서, 선배애...”

“응?”

“저 이제 괜찮아요...”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왼손목을 놓아주었다.

“선배 너무...”

서유은이 말하다 말고 입을 앙 다물었다. 귀여워서 미소지었다. 택시 트렁크를 열어 짐들을 차차 집어넣었다.

“너무 뭐?”

“너무 능숙해요오...”

“뭐가 능숙하다는 거야?”

“그냥... 그냥 다 능숙해요오...”

“기타 줘.”

“네에...”

택시 뒷문을 열어주고 먼저 들어가게 했다. 뒤따라 들어가고 닫았다.

“서울숲으로 가주세요.”

“네엡.”

택시가 출발했다. 서유은을 바라봤다.

“뭐가 능숙하다는 거야?”

“아니 그게요오...”

서유은이 고개를 숙이고 검지로 자기 허벅지를 쿡쿡 눌러댔다.

“어제 전화로 버스킹 도와달라고만 했는데 영화 보고 밥 먹는 거까지 너무 당연하고 부드럽게 약속 잡으시구, 또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오늘은 서울숲까지 같이 가기로 해서 그 다음에 단합까지 같이 가는 거잖아요오...”

“응. 그게 왜?”

서유은이 나를 봤다. 좁혀진 미간은 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느냐는 추궁의 뜻을 담았고, 축 처진 눈썹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는 슬픔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런 의미를 헤아리기 이전에 이 표정 자체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 먼저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어요오...”

“너 귀여워서.”

“이렇게 칭찬하는 것도 그래요오...”

고개를 갸우뚱했다.

“약속 잡는 거랑 칭찬하는 게 왜?”

“진짜 모르시겠어요...?”

“응.”

“아니이... 칭찬은 몰라도, 약속은, 저랑 거의 하루종일 같이 있는 거잖아요오...!”

서유은이 답답하다는 듯 몸을 들썩였다. 이러는 모습도 애교 부리는 거 같아서 귀여웠다.

“그래서, 데이트 같아?”

“네! 선배는 맨날 이래요? 아무한테나?”

“어? 너 화낼 줄도 알아?”

“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안 그래.”

“... 네...?”

“너 말고 다른 사람한테 이렇게 한 적 없어. 내가 선톡도 안 하는 타입이랬잖아. 선약도 잘 안 잡아. 만난다고 해도, 내가 나서서 뭐 하자고 한 적도 적고.”

“...”

서유은의 얼굴이 급속도로 익어갔다.

“아, 아니이... 그럼요오...”

“응?”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 거예요오...?”

“뭘?”

“그냥... 다요...”

근데 어떤 지점에서 나 보고 잘 알고 능숙하다고 하는 건지 진짜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근데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하는데?”

“보통 어리바리하지 않아요...? 처음이면...?”

“그런가? 난 잘 모르겠네.”

“... 전 뭔가 알겠어요.”

“뭐를?”

“안 말해줄 거예요.”

서유은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여자들은 종종 말을 안 해주는 걸 즐기는 듯했다. 나한테만 이러는 건지. 만약 그렇다면 좀 슬플 것 같았다.

서유은이 더 말을 안 섞어줄 듯해서 폰을 꺼내고 사진 수정 어플로 광장에서 찍은 사진 속 관객들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공식 sns 계정에 접속했다. 서유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은아.”

“네.”

폰을 왼손으로 바꿔 들어 서유은이 보기 편하게 팔을 내밀었다.

“방금 찍은 사진 sns에 올린다?”

서유은이 눈을 크게 떴다.

“언제 모자이크 처리 하셨어요?”

“방금.”

“그게 바로 돼요?”

“응. 어플로.”

“우와아...”

“올린다?”

“네, 네! 올려도 돼요!”

신입 보컬이 대책 없이 신청한 버스킹을 도와줬다는 내용을 대충 적어 업로드했다. 김세은이랑 얘기할 때 알리바이가 될 내용이라 완전 대충 적지는 않았다. 물론 엄청 정성을 들인다 해도 의심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리 많이 정성을 쏟지도 않았다.

서울숲 앞에서 내렸다. 짐들을 챙기고 입구로 들어가며 짐 보관 어플을 켜 인근 상가 안에 기타를 제외한 것을 다 맡겼다.

“맞다 유은아. 너 기타 케이스 뒷주머니에 돈 들어 있어.”

“네? 진짜요?”

“응. 한번 열어봐.”

서유은이 벤치를 툭툭 털고 앉아 기타 케이스 뒷주머니를 열었다. 그러고는 대충 접은 돈을 꺼내고 지퍼를 닫은 뒤 다시 케이스를 맸다. 서유은이 돈을 왼손바닥에 올리고 오른손을 합쳐 내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선배가 도와주셨으니까 다 가지세요...!”

서유은이 내 눈치를 살폈다. 요동치는 입을 보고 있자니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미치도록 알고 싶어졌다. 서유은의 입에서 나올 만한 혼잣말을 상상했다. ‘선배가 이 돈 다 가지는 게 당연한 상황인 거면,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생색내는 거 아닌가...?’ 내지는 ‘이 돈에 내 지분이 얼마나 된다고 이런 소리를 당당히 한 거지...?’였다. 웃었다.

“서, 선배애... 웃지 마시고요오...”

“너 다 가져.”

“... 왜요오...?”

“원래 버스킹이나 행사 처음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한테 몰아주거든. 무명은 얼마 버는 것도 아니니까, 다 모아야 돈 좀 만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해. 얼마나 적냐면, 밴드로 공연을 다녀도 하청 내려오면서 우수수 떼이고 음향감독한테 또 떼여서 30만원 50만원 받아. 한 명 당이 아니라 다 합쳐서 그 정도. 그래서 그런 식으로 성취감도 주고 동기 부여도 하고 으쌰으쌰하는 거지. 서로 음악 접으면 안 되니까.”

“아.”

서유은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갑자기 꾹 다물었다.

“왜?”

얼굴이 발그레진 서유은이 양손을 다시 내게 내밀었다.

“거짓말이죠. 지금 한 말.”

“어느 지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선배 얼굴이요.”

“응?”

“거짓말쟁이.”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왜 저 속여요?”

“속인 건 아냐. 혹시 알아? 내가 말한 것처럼 사는 음악가들이 있을지. 그럼 내가 말한 게 사실인 거지.”

“저 팔 빠져요 선배.”

서유은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립밤만 한 입술은 혈색이 돌아 예쁜 분홍빛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 뭔데요?”

제 아무리 얼굴을 찌푸리고 눈썹을 씰룩여도 서유은은 심술난 햄스터 이상으로 표독스러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상했는지 알기 어려웠다.

“우리가 시작하는 거야. 초심자 있으면 돈 몰아주기. 서로 음악 접지 않게 한다는 좋은 취지도 있고. 어때. 의미 있지 않아?”

“...”

“좋지?”

“좋아요. 좋은데요.”

“좋은데?”

“약속해요.”

서유은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무슨 약속인데?”

“일단 약속해요.”

“이거 불공정계약이야.”

그러면서도 나는 새끼손가락을 마주 꼈다.

“선배 절대 음악 안 접기. 무슨 일 있어도.”

여전히 찡그린 미간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웃어요오!”

“아니, 어떻게 안 웃어.”

“저 진짜 진지한데요?”

“응. 그래서 더 웃긴 거야.”

“아아아.”

서유은이 왼발 오른발을 번갈아 굴렀다.

“앙탈 부리지 마.”

“선배 때문이잖아요오.”

“내가 음악 접을 거 같애?”

“그런 건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요.”

“혹시 모른다니?”

“그... 돈 안 벌려서 다른 일 찾고 음악은 영영 안 하게 되는 그런...”

서유은이 외투 자락을 붙잡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너 드라마 많이 보지.”

“네? 네. 근데, 이거랑 그거랑은 별개죠!”

“안 접어, 노래.”

“이미 알고 있거든요.”

서유은의 얼굴에 웃음이 걸쳐졌다. 마주 웃었다.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해맑음을 서유은은 갖고 있었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평소와 비교했을 때 오늘 웃은 횟수가 월등히 많은 느낌이었다.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