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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54화 (54/438)

〈 54화 〉 서유은 (1)

* * *

택시를 타며 고민했다. 이수아한테 전화를 걸어서 집에 둘이 있는지 확인할까 말까. 뭐만 하면 우리 엄마, 우리 엄마 거리는 이수아면 물어본 걸 알려주기는커녕 어제 뭔 일이 있었는지부터 먼저 캐묻지 않을까. 근데 그렇다고 안 물어보고 들어갔다가 둘이 있으면 어떡하지.

그냥 전화하기로 마음 먹었다. 둘을 마주치는 상황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차라리 이수아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는 게 나았다. 전화를 걸었는데 신호음이 여러 번 가고 나서야 받았다.

“여보세요.”

ㅡ어, 왜.

목소리가 낮았다. 자다가 지금 깼나. 전화를 받고 화도 안 내는 걸 보면 윤가영이 집에 돌아갔을 때 별로 내색을 안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윤가영이 최소한의 양심은 챙긴 듯했다.

“존나 잠만보냐?”

ㅡ아으, 오늘 일요일이야 미친 새끼야...

뭐 눈을 비비거나 마른 세수라도 하는지 이수아가 말을 하지 않았다.

ㅡ아 씨, 몇 시야. 여덟 시 삼십 칠 분? 잠만보는 무슨 존나...

“집에 둘 있냐?”

ㅡ음? 없을 걸?

“나가서 확인해봐.”

ㅡ아냐. 없어.

확인했다기에는 부스럭대는 소리도 안 났다.

“확인도 안 해놓고 뭘 없다고 그러냐.”

ㅡ아 어제 오늘 어디 간다고 얘기하는 거 대충 들었어.

“어.”

ㅡ그래서 너 어제 우리 엄마랑 무슨 일 없었냐?

“네 엄마가 얘기 안 해줬냐?”

ㅡ말 존나 싸가지 없게 하네. 네 엄마? 우리 엄마가 네 새엄마도 되는 거 아니냐?

“말하는 싸가지는 너만 하겠냐?”

ㅡ좆까. 뭔 일 있었는데.

“없었어. 네 엄마가 뭐랬길래 그러는데?”

ㅡ네 노래 잘 부른다고 칭찬 엄청 해주던데. 그리고 너 어떤 친구네에서 잔다고 했는데 어쩌면 돌아와서 집에서 잘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고. 근데 좀 이상한 게, 네가 언제부터 우리 엄마랑 그렇게 친했냐? 아님 초대도 안 한 곳에 참석해준 엄마 정성에 존나 감복하셔서 친해지셨나?

이수아 이 미친 년이. 눈을 감고 감정을 삭였다.

그나저나 친구네에서 잔다고 말하면서 집에서 잘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니. 내가 집에 안 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꽤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안 친해. 부원들 있는데 아는 척 하기 싫어서 안 보이는 데에서 빨리 답해주고 만 거야.”

ㅡ어.

“끊는다.”

ㅡ내가 끊음.

전화가 끊겼다. 싸가지가 조금 없긴 하지만, 그래도 끊는다는 얘기도 안 하고 내 쪽에서 끊는다 소리가 나오자마자 지가 끊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 학생. 내가 이런 얘기해도 될진 모르겠는데, 남의 부모님한테 네 엄마 네 아빠 이렇게 부르는 건 아닌 거 같아. 사람들이 좋게 안 봐.”

“아, 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아니고. 큼큼.”

택시기사 아저씨가 오른손으로 코를 스윽 만졌다. 이후론 말을 안 했다. 내릴 때까지 분위기가 조금 어색했다. 밖에선 말조심을 좀 해야겠다 싶었다. 너무 생각 없이 입을 놀렸다. 요즘 따라 너무 충동적이었다.

집에 들어가 일단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그 다음 연습실을 뒤져 마이크 동시 접속이 되는 블루투스 앰프 스피커와 무선 마이크 둘, 마이크 스탠드 둘을 챙겼다. 기타도 매야 해서 상당히 거추장스럽기는 했지만 마이크를 하나만 써서 얼굴을 가까이 하고 부를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김세은이 인스타나 어디에 올라온 영상을 보고 ‘내가 여자랑 가까워지지 말랬잖아...’ 같은 말을 하며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되도록 오해를 살 일은 피해야 했다.

너무 챙긴 게 많아서 그냥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시간이 남아서 서유은에게 주려고 사탕을 조금 사서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문자를 보냈다.

[유은아 나 청량리역 나와서 공항버스 타는 곳 앞에 있거든? 거기로 올래?]

[아 네 알겠어요. 저 지금 가고 있어요. 진짜 금방이에요!]

금방이라는 말은 사람마다 의미가 조금씩 달랐다. 서유은은 금방을 어떻게 쓰는 애일까.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신호등이 꾸준히 바뀌며 사람들이 지나갔다.

‘방금 봄?’

‘봤어. 근데 어려보이던데?’

‘나도 알아. 아, 근데 너무 잘생겼잖아...’

지나간 여자 두 명이 자기들끼리 소곤대며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 딴엔 이어폰 소리를 고려하고 목소리를 낮춘다고 하는 거겠지만, 나는 남들보다 듣는 귀가 훨씬 밝아서 잘만 들렸다.

처음에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주위에 연예인이 있나 두리번거렸다. 나중에 그게 나를 보고 하는 소리인 걸 알고 나서는 한동안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여성들에게 성적 매력을 뿜어내는 외모라는 것을 자각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으니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고 해야 됐나. 아무튼 그것도 점점 익숙해져서 그런 소리가 들려와도 그냥 무심하게 입꼬리 한 번 안 비틀 수 있었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서유은이었다.

ㅡ저 선배 보여요.

두리번거렸다. 뒤에서 열다섯 발자국 정도 되는 거리에서 서유은이 손을 흔들었다. 전화를 끊고 이어폰을 뺐다. 갑자기 서유은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터벅터벅 걸어오며 어깨를 축 늘였다.

“선배... 저 진짜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선배 키 엄청 크신데 안 그래도 키 작은 제가 옆에 나란히 서서 노래 부르면 전봇대 옆에 쓰레기 봉투 있는 것처럼 비교되고 그러는 거 아닌가 걱정돼요.”

“너처럼 예쁜 쓰레기 봉투는 어디서 사는 거야?”

“네? 아.”

서유은이 배시시 웃었다. 왜 서유은한테는 자꾸 오그라드는 멘트를 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잘 받아줘서 그런 건가.

“근데 진짜 금방 왔네. 시간보다 빨리 왔고.”

“선배는 저보다 빨리 오셨잖아요. 얼마나 기다리셨어요?”

“오 분 정도? 많이 안 기다렸어.”

“다행이네요. 근데 제가 후밴데 더 빨리 왔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됐어.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래.”

“근데 왼손에 들고 계신 거 뭐에요?”

“이거? 휴대용 앰프 스피커.”

“오! 진짜 버스커 된 느낌이에요!”

“너 버스커 맞아. 이건 선물.”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건넸다. 서유은이 꿈뻑꿈뻑 눈을 감았다 떴다.

“... 뭐예요?”

“사탕. 화이트데이잖아.”

그제야 내 손에서 사탕을 받아갔다.

“와아! 선배한테서 이런 거 받을 수 있을 줄 몰랐어요!”

“무슨 의미야?”

“그냥, 선배는 약간, 첫인상이 차가운 건 아니었는데,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야 되나요...? 분위기가 차가운...? 근데 또 보니까 선배가 그런 사람은 아닌 거 같고 그래서... 죄송해요! 아예 말을 안 했어야 됐는데!”

웃었다.

“아냐 괜찮아. 먹기나 해.”

“네에...”

서유은이 포장을 뜯고 입에 집어넣었다. 막대를 잡아 입 안에서 빙빙 돌리고 쪽쪽 빠는 게 공갈 젖꼭지를 문 아기 같았다.

“사탕 좋아해?”

“네 저 단 거 엄청 져아해여.”

사탕을 입에 문 채로 대답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탕이 점거한 서유은의 오른쪽 볼이 불룩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사탕들을 만져 부스럭거렸다.

“지금 주머니에 많은데. 다 줄까?”

“그래도 대여?”

“왜?”

“다른 사람 줄 거 없어지자나여.”

“나한테서 받을 만한 사람들은 다 기프티콘 뿌렸어.”

“그럼 밴드부에서 저만 기프티콘 못 받았어여?”

“대신 만나서 직접 준 거잖아. 너만 특별하게.”

“그렇네여? 헿. 그럼 주세여.”

서유은이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한 움큼 집고 그 위에 올려주었다. 서유은이 이도저도 못했다.

“... 제 기타 케이스 주머니 열고 넣어주실래여?”

“너 바보야?”

“알고 계셨으면 선배가 지적해주셨어야져!”

“지금 화내는 거야? 안 준다?”

“아녀. 죄송해여. 헤헤.”

미소 지으면서 케이스 주머니를 열고 서유은의 두 손이 올린 사탕을 하나씩 집어 안에 넣었다. 얼굴을 슬쩍 봤는데 불만스런 표정이 되게 심술난 햄스터 같았다.

“제가 장난감이에여?”

“어쭈.”

대꾸하며 다시 사탕을 집어들었는데 손을 빼는 와중에 닿은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니 선배애. 이게 뭐예여. 흘리기나 하시구. 빨리 넣어줘여.”

아. 미친. 뒤돌고 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바지춤을 정리했다.

“왜 그러세여...?”

“그냥 좀 불편해서 잠깐. 미안.”

후다닥 나머지 사탕을 집어넣고 주머니에 남아 있던 것도 쑤셔넣었다. 택시를 가리켰다.

“저거 타고 가자.”

“넹.”

정차한 택시의 트렁크를 열었다. 짐을 다 집어넣고 뒷문을 열었다. 서유은이 먼저 들어갔다. 나도 뒷좌석에 탔다. 서유은이 폰으로 주소를 보여줘서 택시가 출발했다.

“너 팝콘 먹을 거야?”

“당연하져! 어니언이랑 치즈!”

“영화 보고 밥도 먹어야 되는데.”

“그 파티션 같은 거 중간에 끼워진 거 사면 돼여.”

“그래 그럼.”

택시에서 내리고 짐 보관 서비스 어플로 인근 상점에 앰프와 기타, 마이크와 마이크 스탠드를 맡겼다. 영화관에서 팝콘과 콜라를 사고 초코 필링이 들어간 츄러스도 둘 샀다. 서유은이 ‘저거 엄청 맛있어보여요!’라고 말하고 눈을 도저히 못 떼길래.

원스는 2관에서 상영했다. 폰을 보여준 뒤 입장했다. 좌석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할 때 객석은 만석에 가깝게 찬 듯했다. 워낙 유명한 영화였으니까. 이 정도면 노래 부를 때 선곡 때문에 주목을 못 받지는 않겠다 싶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팝콘을 먹을 때 손이 안 부딪히게 서로 눈치를 봤다. 그만큼 아이 컨택도 많이 하게 됐다. 손이 부딪히면 마주 보며 눈웃음 지었다. 영화보다 서유은 얼굴을 더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서유은이 내 왼손등을 검지로 콕콕 눌렀다. 나를 건드린 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지는 스크린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크린을 봤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람 부는 고지에 남녀가 서 있었다. 남자가 괜스레 여자의 얼굴 대신 머언 곳에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ㅡ‘그를 사랑해’를 체코어로 뭐라 그래?

ㅡ밀루 에쉬 호?

ㅡ그럼, 미루 예셔?

여자가 은은히 미소지었다.

ㅡ밀루유 떼베.

무슨 뜻인지 자막은 알려주지 않아서 서유은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스크린의 빛만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서유은이, 내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 이상하게, 서유은네 연습실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와 같은 느낌으로, 가슴이 찌르르 떨려왔다. 괜스레 왼손을 펼쳐들었다가 도로 내려서 팔걸이의 끝자락을 쥐었다. 참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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