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백지수랑 맞는 일요일 아침
* * *
달그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깼다. 마른 세수를 하고 폰을 켜 시간이랑 날짜를 확인했다. 7시 21분. 3월 14일. 화이트데이였다. 못 깰까봐 연속으로 만들어 둔 알람을 다 꺼버렸다. 어제와 같은 차림을 한 백지수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해?”
백지수가 주방용 유리 계량컵에 노른자를 풀고 있었다.
“에그타르트 만들어.”
“오븐도 있었나?”
“샀어.”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백지수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흘깃 보고 도로 계랑컵에 시선을 고정했다.
“일단 세수나 하고 와.”
화장실로 들어가 빠르게 세수하고 나왔다.
“뭐할까?”
“내 폰 보이지. 그거 레시피 맞춰서 계량해. 그리고 섞으면서 불에 올리고 데워.”
백지수가 폰으로 띄운 레시피를 보면서 저울에 소스팬을 올리고 생크림과 우유, 설탕량을 맞췄다.
“실수로 설탕 2 그램 더 넣었어.”
백지수가 냉장고에 휴지시킨 슈크레 반죽을 꺼내 12개로 소분했다.
“더 달콤해졌네. 개꿀. 그거 불에 올리고 빨리 비켜. 이거 그램 수 확인해야 되니까.”
소스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슬슬 섞었다.
“나 더 할 거 없어?”
“나 이거 조금 시간 걸릴 거 같으니까 그거 거품 올라오면 바로 끄고 노른자에다가 조금씩 부으면서 섞어줘. 아 그리고 오븐 180도로 예열도 해주고. 예열 먼저 해줘.”
“응.”
오븐을 예열시켰다. 소스팬 속 우유를 슬슬 섞었다.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어느새 거품이 올라와서 가스레인지를 껐다. 데워진 우유를 계량컵 안에 조심조심 흘려 넣고 섞어 주기를 반복했다. 백지수가 뭐하나 봤는데 에그타르트 팬에 반죽을 눌러 담고 있었다. 필링을 들고 가 옆에 섰다.
“된 거에다가 부어?”
백지수가 나를 째려봤다.
“안 돼.”
“왜? 시간 아끼고 네 일도 줄어드는 건데.”
“필링을 손수 채워넣고 예열된 오븐에 넣는 뿌듯함, 그 기쁨을 네가 아세요? 내놓으세요.”
필링을 건네줬다. 백지수가 양손으로 받아서 타르트지 위에 고루 부어서 80에서 90퍼센트 쯤씩 채워넣었다. 백지수가 양손에 실리콘 오븐 장갑을 쓰고 틀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오븐 열어줘.”
왠지 웃음이 나왔다. 백지수가 에그타르트 틀을 양손으로 소중히 들어올리고 미간을 찡그린 채 오븐을 노려보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런 것 같았다.
“응.”
오븐을 열어주었다. 백지수가 조심조심 집어넣고 오븐을 닫은 다음 30분을 맞췄다.
“30분이면 돼?”
“보고 안 됐으면 더 하면 되지.”
백지수가 오븐 장갑을 벗고 테이블에 두었다. 오른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보여주었다.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뭐하냐?”
“하이파이브. 보면 몰라?”
“지랄.”
백지수가 피식 웃으면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러곤 싱크대로 가 손을 씻었다.
“근데 좀 의외다.”
“뭐가?”
“너 요리하는 거.”
“내가 요리하는 게 이상해?”
“응.”
손을 털고 수건에 비벼 물기를 없앤 백지수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뭐가 이상한데?”
“넌 걍 다 시켜먹을 줄 알았어. 요리하는 거 엄청 귀찮잖아.”
“내가 그렇게 게을러 보이냐?”
웃었다.
“왜 웃냐?”
“왜 오늘은 보이디 안 써?”
“내 맘이다.”
“넌 내가 뻔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갈 사람으로 보이디?”
백지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존나 적당히 해라.”
“싫은디.”
“미친 놈. 너 에그타르트 안 줘.”
백지수가 자기 폰을 덥석 집고 어딘가로 빠르게 걸어갔다. 화났다고 대놓고 티내는 게 애교라도 부리는 거 같았다. 웃으면서 뒤따라갔다. 백지수가 2층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왼손목을 붙잡았다. 백지수가 뒤돌았다. 얼굴이 여전히 붉었다.
“야.”
“응?”
“내가 2층 올라올 생각하지 말랬지.”
“하루 지났잖아.”
“올라와도 된다고 할 때까진 안 돼.”
“알겠어. 나 에그타르트 줄 거야?”
“줄게. 그니까 따라오지 마.”
“응. 근데 2층에 뭐 있길래 그렇게 막는 거야?”
“너 내가 왜라는 질문하지 말라고 한 이유 잊어먹었어?”
“말해주기 뭐하거나 마땅히 말해줄 게 없어서 안 하는 게 맞다?”
“기억하면 왜 자꾸 캐묻는 건데.”
“감추면 더 알고 싶어지잖아.”
김세은이 알몸을 감췄을 때처럼. 비밀이 있다는 걸 아예 모른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감추려는 시도는 선물상자를 포장하려는 것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비록 그 상자가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당히 해.”
“응.”
백지수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대체 2층에 뭐를 숨기길래 오는 걸 막는 걸까. 정확히는 2층이 아니라 백지수 방일 텐데, 그 안에 뭐를 뒀을까. 궁금했지만 의문을 해소하는 데 사용할 단서는 하나 없어서 관심을 꺼두는 게 차라리 생산적이었다.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간 새벽에 이수아가 문자를 딱 하나 보내왔다.
[무슨 일 있었냐?]
답장은 안 보냈다.
발렌타인 데이 때 내게 초콜릿을 준 애들에게 기프티콘을 보냈다. 거의 조공을 받아서 하사품을 건네는 명나라라도 되는 양 초콜릿바를 받았다면 사탕 한 통을 주는 식으로 푸짐하게 돌려주었다. 아버지 돈 펑펑 쓰기의 일환이었다. 근데 이것도 또 나중되면 케이크나 아이스크림 같은 거로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손해가 아니게 되고 말았다.
기프티콘을 보내는데 메시지도 같이 남기는 게 정말 죽도록 귀찮았다. 적당한 멘트를 만들어서 보내주는 매크로라도 있었으면 했다. 꾸역꾸역 다 보냈다.
기프티콘을 보내는 게 시간이 꽤 오래 걸려서 백지수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블랙진에 흰 셔츠 차림을 한 백지수가 일어서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셔츠 속으로 하얀 브래지어와 살이 비쳐보였다. 하체에 달라붙는 블랙진은 백지수의 골반과 허벅지를 드러냈다. 솔직히 자극이 너무 강한 옷차림이었다. 내가 남자로 안 보이나?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왤케 봐?”
내 쪽으로 오면서 시선을 느꼈는지 백지수가 물었다. 백지수가 오븐 앞에 쭈그려 앉아 속을 들여다보았다.
“너 나 보자마자 세수하라 했으면서 넌 왜 지금 씻었어.”
“내 맘.”
백지수가 오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안 마주보고 대답하는 게 이수아 같았다. 아, 또 이수아 생각이다.
“얼마 남았어?”
“거의 다 된듯?”
백지수가 의자에 앉아 폰을 꺼내서 양팔을 테이블에 대고 보았다.
“오. 깊콘 감사.”
“응.”
“왤케 비싼 거로 주냐?”
“너도 돈 좀 나가는 거 줬잖아.”
“근데 이거랑 비교가 안 되잖아.”
“내 맘.”
백지수가 피식 웃고 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미친 놈.”
“칭찬으로 앎.”
“네, 네.”
“고맙다는 말은?”
백지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촉촉한 머리가 물방울을 떨어뜨렸다. 물방울은 백지수의 가슴께를 덮은 하얀 셔츠에 스며들었다. 물에 닿은 부분이 살에 달라붙어 살색을 더 노출시켰다.
“존나게 고마워요 온유씨?”
“어. 근데 지수야.”
“... 너 왜 갑자기 어색하게 이름 부르냐?”
“할 말 있어서.”
백지수가 표정을 굳혔다. 나를 마주보는 얼굴이 상기됐다.
“어. 해.”
“너 옷 왜 그렇게 입어?”
백지수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존나 빡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얼굴색이었다.
“... 한 번 더 왜라고 묻기만 해봐. 그땐 진짜 뒤졌다.”
“... 미안해.”
“존나 옷 입는 거 내 맘이지 왜. 꼬와?”
“아니. 좋은데.”
“...”
띵, 오븐이 소리를 냈다. 백지수가 말 없이 일어나 오븐 속을 확인했다. 다 됐는지 장갑을 끼고 오븐을 열어 틀을 꺼냈다. 달고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백지수가 테이블에 틀을 내려놓았다.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진 에그타르트가 당장이라도 집어먹어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진짜 먹고 싶다.”
“기다려. 아니다. 그냥 기다리지 말고 커피나 해줘.”
“커피?”
“저기 정수기 옆에 원두 스틱 있거든. 그거 컵에 하나 넣어. 그리고 그거 녹을 정도로만 뜨거운 물 넣어. 그리고 섞은 다음에 냉장고에서 우유 꺼내서 부어. 그 다음 달달해질 때까지 헤이즐넛 시럽 넣어. 시럽도 정수기 옆에 있어.”
“알겠어.”
일단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컵 두 개를 준비해 스틱을 하나씩 쏟았다. 물을 조금씩 붓고 젓가락 하나를 꺼내 다 섞었다. 우유를 붓고 헤이즐넛 시럽도 균등하게 넉넉히 넣었다. 내 거를 한번 마셔봤다. 충분히 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얼마나 달게 해?”
“존나 달게.”
나는 조금만 더, 백지수는 그보다 더 넣었다. 젓가락으로 백지수 거를 먼저 섞고 내 거를 섞었다. 싱크대에서 바로 씻어서 다시 수저통에 놓고 다른 젓가락을 꺼내 왼손 약지와 소지 사이에 끼우고 컵을 양손에 들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감사.”
백지수가 바로 마셨다.
“어때?”
백지수가 엄지를 들어올렸다.
“개존맛.”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도 마셔봤다.
“진짜 맛있다. 뭐야 이거?”
“톡으로 보내줄게.”
백지수가 신나서 폰을 두들겼다. 톡을 확인해서 뭔가 보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에그타르트 먹어도 되지 않아?”
“어 먹어.”
젓가락으로 비집어 올라오게 하고 오른손으로 꺼내서 바로 입에 집어넣었다. 포슬포슬하고 고소하고 달달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아 담백했다. 완벽한 음식이었다. 칼로리만 빼면.
“너 맨날 이런 식으로 먹어?”
“응?”
백지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완전 살찔 거 같은데. 너 몸매 관리 어떻게 해?”
“운동. 내가 백수 아니랬지.”
“엄청 열심히 하는가봐?”
“어.”
백지수가 왼손을 내밀었다. 젓가락으로 에그타르트를 빼고 왼손 위에 올려주었다.
“오. 센스. 난 젓가락 달라 한 거였는데.”
“척하면 척이지.”
에그타르트를 베어 물었다. 절로 미소지어졌다.
“맛있다.”
백지수가 마주 웃었다. 백지수가 눈웃음을 짓는 건 또 생소했다.
“그치.”
“너 웃는 거 진짜 예쁘다.”
“... 지랄...”
백지수가 커피를 마셨다. 이상하게 그 뒤로는 별 대화 없이 먹기만 했다. 에그타르트를 다섯 개 먹어치우고 커피를 리필해서 아침을 풍족하게 먹었다.
“잘 먹었어.”
“만 원입니다.”
백지수가 오른손바닥을 내밀어보였다. 생각보다 너무 만족스러워서 진짜 달라면 줄 수도 있었다. 지갑을 꺼냈다. 백지수가 웃으며 내 등짝을 때렸다.
“됐어 미친 놈아. 이거로 깊콘 값 대충 갚은 거다?”
“차고 넘칩니다.”
뒷정리를 하고 머리도 감고 소파에 앉아 좀 더 폰을 만지다가 시간이 8시 반인 걸 보고 백지수에게 나간다고 말한 뒤 기타를 챙겼다. 이제 집에 가서 앰프와 마이크를 챙기고 서유은을 만나러 가야 했다.
수면의 질부터 아침 식사까지 만족스러워서인가, 왠지 오늘 하루는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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