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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52화 (52/438)

〈 52화 〉 버스킹하는 날 (16)

* * *

숙취해소음료를 마시고 초코 아이스크림 콘을 먹으며 메시지들을 훑었다. 어머니에게서는 여전히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두드드, 전화가 왔다. 서유은이었다.

“어 유은아.”

ㅡ어어, 선배...

“응. 말해.”

ㅡ혹시 내일 약속 같은 거 있으세요...?

“약속? 없는데, 왜?”

ㅡ제가요, 사실은, 좀 전부터 몸이 너무 근질거려서, 오늘 노래 할 줄은 모르고, 얼마 전에 어플로 버스킹 신청해놨거든요오... 같이 해주실 수 있으세요...?

“언제 하는데?”

ㅡ내일이요!

언제인지 묻는 말이 떨어지지마자 준비했다는 듯 바로 답하는 게 귀엽고 웃겼다.

“내일 하는 건데 지금 부탁하면 어떡해.”

ㅡ진짜 죄송해요오... 부담되는 억지스런 부탁인 거 아는데도 선배 말곤 제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어...

“알겠어. 같이 해줄게. 근데 그럼 원래 너 혼자하려 했던 거야?”

ㅡ네... 근데 오늘 해보니까 너무 떨려서... 혼자는 절대 못할 거 같아 가지고요... 감사해요...!

“어디서 하는데?”

ㅡ왕십리역 이벤트 광장이요!

“... 거기 진짜 아무 것도 없는데? 마이크도 없어.”

ㅡ허억! 그럼 어떡해요?

“괜찮아. 내가 챙길게. 근데 어플로 했다면서. 신청할 때 써 있는 거 안 봤어?”

ㅡ네에...

“왜?”

ㅡ계속 고민하면 안 할 거 같아서 그냥 다 안 읽고 바로 신청해버렸어요... 안 함 또 후회할까봐... 너무 경솔했죠...? 죄송해요...

“아냐. 실행력이 좋은 거지.”

ㅡ감사해요오...

왠지 장난기가 돌았다.

“경솔한 것도 맞고.”

ㅡ아, 네에... 죄송해요오...

재밌었다. 너무 놀리기 좋았다.

“일정은 어떻게 잡았어?”

ㅡ저, 한 시부터 두 시까지요.

“곡리스트는?”

ㅡ왕십리 cgv에서 ‘Once’ 특별 재상영한다고 해서, ‘falling slowly’ 부르고 관객분들한테 신청곡 받아서 부르려고 했어요.

또 놀려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너 좀 혼나야겠는데?”

ㅡ네에? 왜요...?

“첫 곡했는데 관객이 안 모일지도 모르잖아. 모인 사람이 신청곡을 던져줄지 안 던져줄지도 모르는데. 위험한 거였어 진짜.”

ㅡ아... 죄송해요오...

진짜 너무 재밌었다. 이러니까 완전 관심 있는 여자애 괴롭히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것 같았는데, 멈출 수 없었다. 술 기운이 남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계속 놀리고 싶었다.

“만약 관객이 네 레파토리에 없는 곡을 신청했다고 쳐. 어떻게 대응할 거야?”

ㅡ어어... 제가 그 곡은 몰라서요...

“봐봐. 버벅이잖아. 그 곡 가수가 누구냐고 묻고 그 가수 곡 중에 네 레퍼토리에 있는 거 중에 선택하라고 하든가, 모르는 곡이라 다른 신청곡 해주시면 좋겠다고 하든가, 바로 나왔어야지.”

ㅡ근데 저 처음이잖아요...!

울컥해서 겨우 한 마디 반박하는 것도 귀엽고 웃겼다.

“그니까. 처음이면서 왜 혼자하려 한 거야. 게다가 한 시간? 엄청 길잖아. 진짜 대책 없는 거였어.”

ㅡ죄송해요오...

“혼날 만큼 혼난 거 같아?”

ㅡ모르겠어요... 아니 더 혼내실 거 있으시면 더 혼내주세요...

조금 분해서 그런가, 숨이 많이 섞인 목소리가 야릇했다.

“아냐. 버스커 신청은 언제 했어?”

ㅡ좀 옛날에 했어요. 중 3때였나 암튼.

“바로 된 거야?”

ㅡ네.

“대단하네.”

ㅡ아녜요...

기뻤는지 또 톤이 조금 높아졌다. 나도 모르는 새 입꼬리가 올라간 게 느껴졌다. 아까 기억을 끄집어 낼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그리 좋지는 못했는데. 조울증 환자라도 된 느낌이었다.

“유은아.”

ㅡ네.

“내가 버스킹할 때 징크스 있다고 했잖아. 기억나?”

ㅡ네. 버스킹 하기 전에 배 채워두셔야 한다고...

“응. 그니까 내일 점심 같이 먹을래? 내가 살게.”

ㅡ저야 좋죠!

“그래? 다행이네. 요즘 혼밥을 너무 자주해서 남이랑 밥 먹으면서 대화하는 법을 까먹을 거 같았는데.”

ㅡ네? 선배 인싸잖아요.

“나? 나 아싸야. 다른 학교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사람을 두루두루 만나는 편도 아니고. 남한테 먼저 연락하는 타입도 아니고.”

ㅡ아뇨. 제가 확신하는데, 선배 아싸 아니에요.

이상하게 이런 데에서 단호하네.

“그럼 아싸는 아니지만 인싸도 아닌 걸로.”

ㅡ아뇨 선배 인싸라니까요오?

“알겠어. 나 인싸라고 하고. 한 시부터랬지? 우리 내일 조금 일찍 만나자.”

영화표를 찾아보면서 말했다.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갈 거니까 열 시에 상영하는 걸 보면 적당할 거 같았다.

ㅡ네? 왜요?

“나 원스 안 봤거든. 봐야 주제곡 느낌을 살릴 거 아냐.”

ㅡ아...

“싫어?”

ㅡ아뇨! 좋아요! 같이 봐요!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주섬주섬 떨어진 것들을 수습하는 건지 물건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ㅡ아, 저, 그, 네. 괜찮아요. 아무 것도 아녜요.

“응. 열 시에 상영하는 거로 예약해둔다?”

ㅡ넵.

“유은아.”

ㅡ... 네...?

“내일 뭐 먹을래?”

ㅡ저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어요.

“먹고 싶은 거는?”

ㅡ으음... 저 선배가 해주시는 스테이크랑 파스타 먹어보고 싶어요.

“그건 좀 어려운데.”

ㅡ그쵸? 그니까 선배가 메뉴 결정해주세요.

“왜 나한테 메뉴 결정권을 넘겨주려고 하는 거야?”

ㅡ저 지금 딱히 먹고 싶은 게 생각이 안 나요.

“그럼 내가 막 국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먹으러 갈 거야?”

ㅡ앗... 선배 국밥 좋아하세요?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지금 생각 안 나는 거면 내일 다시 물어볼게. 그땐 당기는 거 생길 수 있으니까.”

ㅡ네. 좋아요.

“유은아.”

ㅡ... 네...?

왠지는 모르겠는데 서유은은 내가 이름을 불렀을 때 가끔 반응이 느렸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안 정했잖아.”

ㅡ아, 맞아요.

정신이 빠졌다 되찾은 사람처럼 반응하는 게 웃겼다.

“유은아.”

ㅡ네.

“왜 내가 이름 부르면 가끔 반응 느려?”

ㅡ아... 그거요...?

“답하기 좀 그래?”

ㅡ조오금 그래요...

“유은아.”

ㅡ... 네...

“알려주라. 안 돼? 유은아.”

ㅡ그만해요오... 알려 드릴 테니까아...

“응.”

ㅡ선배가 제 이름 불러주면, 가끔 진짜 귀에 막 바람이라도 분 거처럼 소름 돋아 가지고, 아 빨리 답해야 되는데, 해도 잠깐 정신 못 차리고 나중에 멘탈 잡아서 답하는 거예요... 근데 그 소름이 기분 나쁜 소름이 아니라 기분 좋은? 놀이기구 탈 때 느낌 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아무튼 그래요.

“알려줘서 고마워 유은아.”

ㅡ하으으... 선배 진짜 그러시면 안 돼요오...

서유은이 말하면서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눈에 그려졌다.

“알겠어 유은아.”

ㅡ그거 진짜 안 돼요오...

“알겠어. 이제 만나는 장소랑 시간 결정해야지. 열 시에 상영하는 거 봐야 되니까 주변에서 만나거나 만나서 같이 갈 거면 더 빨리 봐야겠네. 어디서 만날래? 내가 맞춰줄게.”

ㅡ으음... 그럼 청량리역에서 만나실래요?

“그래. 그럼 몇 시에 볼래?”

ㅡ아홉 시 반이면 되지 않을까요?

“알겠어. 내일 보자.”

ㅡ네! 진짜 감사해요! 내일 봬요!

“응. 잘 자 유은아.”

ㅡ아... 네에... 안녕히 주무세요오...

“응. 너도 내 이름 불러줘볼래? 무슨 느낌인가 알고 싶어서.”

ㅡ아, 네. 잘 자요 온유 선배. 어때요...?

“좋아 유은아.”

ㅡ아... 그러시면 안 돼요 진짜아...

“이제 안 할게. 잘 자.”

ㅡ네... 끊을게요...

“응.”

전화가 끊겼다. 스케줄러에 열 시부터 다섯 시까지 일정을 기록했다. 일정 이름은 ‘서유은’으로 했다. 메시지에 답해야 될 것들에 답하고 있는데 백지수가 2층에서 내려왔다.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털어낸 머리는 축축함과 촉촉함 사이에 있었다. 옷은 긴팔 흰 티셔츠에 검은 레깅스로 똑같았다. 계단을 하나씩 내려올 때마다 생동감을 과시하는 가슴이 시선을 빼앗았다.

“너 나 씻을 때 안 올라왔지?”

폰을 안 보이게 덮어서 내려놓고 두 손을 다소곳이 허벅지 위에 올렸다.

“착한 아이처럼 가만히 있었어요.”

백지수가 피식 웃었다.

“뭔 컨셉이야?”

“착한 아이 이온유 컨셉.”

“아직 취했나보네.”

백지수가 옆에 털썩 앉았다.

“너 진짜 여기서 잘 거야?”

“응.”

“이불 가져온다?”

“벌써 잘 시간이야?”

“자는 건 네가 알아서 하는 거고. 넌 안 씻어?”

“씻어야지.”

“칫솔 새 거 선반에 있으니까 그거 쓰고, 옷은 빌려줄 거 없으니까 그거 그대로 입어.”

“응. 근데 화장실에서 저번 주인가 금요일에 술 마셨을 때 썼던 거 본 거 같은데.”

백지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왜지.

“그거, 그거 쓰면 안 돼. 내가 화장실 싱크대 청소할 때 쓰고 나중에도 써먹어야지 하고 안 버린 거니까 쓰면 안 돼.”

“알겠어.”

“절대 쓰면 안 된다. 아니다. 그냥 내가 따로 둘게.”

백지수가 일어서서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갔다. 그러곤 내가 썼던 칫솔을 챙겨서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너무 분주하게 움직여서 뭔가 수상했다. 위에서 백지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씻어! 그동안 이불이랑 베개 가져다 줄 테니까! 너 씻고 2층 올라오면 안 된다?”

“어.”

답하고 폰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원스의 주제곡 ‘falling slowly’를 반복재생시키고 씻었다. 양치까지 마치고 나왔다. 소파 위에는 이불이 예쁘게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베개 하나와 스마트폰 충전기가 하나 있었다. 백지수는 안 보였다. 백지수가 있었다는 흔적은, 콘센트가 뽑히지 않은 드라이기와 그 주변 바닥에 물이 몇 방울 떨어져 생긴 자국 정도 뿐이었다. 티슈를 뽑아 물을 없애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뒤 콘센트를 뽑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더 할 게 없어서 그냥 폰을 충전하고 불을 끈 뒤 잠들려했지만 도통 잠이 오지를 않았다. 폰을 켜서 백지수에게 전화 걸었다.

ㅡ왜?

“나 잠 안 와.”

ㅡ... 그래서 어떡해달라고?

“나 재워주라.”

ㅡ진심이야?

“반 농담.”

ㅡ반은 진심이라는 거네?

“장난이야.”

ㅡ너 지금 존나 애 같다. 너 주사가 애교 부리는 거야? 아님 애처럼 되는 건가?

“몰라. 아마 후자일 걸.”

ㅡ자.

“자려 했는데 잠이 안 와서 전화 건 건데.”

ㅡ새벽까지 잠 안 오면 그때 다시 전화하든가. 그럼 진심 재워줄게.

“나 그 말 진짜로 알아 들어.”

ㅡ진짜야. 일단 자.

“응. 잘 자.”

ㅡ너도 잘 자.

전화를 끊고 폰을 껐다. 다시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는데, 온도가 적당히 따스해서 잠이 솔솔 왔다. 새벽까지 깨어 있어서 백지수를 괴롭혀보고 싶었는데 몸이 자꾸 수마의 손에 넘어가려 했다. 그냥 새벽에 알람을 맞춰서 그때 깬 다음에 백지수한테 전화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건 또 아니다 싶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피곤해서 귀찮기도 했고.

의식이 빠르게 가라앉아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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