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버스킹하는 날 (15)
* * *
돌아온 백지수는 흰색 긴팔 티셔츠에 흰색 스트라이프 셋이 양옆으로 있는 검은 레깅스 차림이었다. 복장이 조금 가볍지 않나 했는데 집 온도가 빠르게 올라갔다. 꾸준히 술을 집어넣은 나는 그냥 자체로 체온이 올라서 땀이 흐를 정도였다. 외투를 벗고도 더 벗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일러 온도 좀 줄여주면 안 돼?”
“아 맞다. 미안.”
백지수가 보일러 온도를 줄였다. 체감 온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백지수가 감자칩을 하나 집어 먹었다. 으적대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나 옷 벗어도 돼?”
“안에 더 입었어?”
“아니.”
“안 돼 미친 새끼야. 개소리하는 거 보니까 슬슬 취하나 보다?”
“몰라. 그냥 온도 좀 올라서.”
“... 술 마셔서 체온 오르는 거 일시적인 거고 시간 좀 지나면 오히려 떨어진다니까 걍 있어.”
“응.”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매콤한 시즈닝이 된 나초칩을 씹어먹었다. 먹고 마신 게 역으로 올라오려는 느낌이 조금 들었다. 취해가는 것 같았다. 백지수의 얼굴을 보는데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지수야.”
백지수가 흠칫했다.
“응?”
“취한 거 확인 어떻게 하지?”
“잠만. 쳐볼게.”
백지수가 핸드폰을 두드렸다.
“어, 눈 감고. 팔 하나 앞으로 쭉 뻗어.”
지시하는 대로 했다.
“그리고 눈 감은 상태로 검지만 세워서 네 코 끝 눌러봐.”
검지를 세우고, 팔을 굽혀서 코 끝을 누르려 했다. 근데 콧대를 눌렀다.
“나 취했나?”
“근데 이게 안 취해도 못 찾는 사람도 있대.”
“그럼 다른 방법 뭐 있어?”
“으음. 한 발로 서 있기. 15초 동안. 근데 네 입으로 1000부터 뒤로 세보래.”
“응. 한 입만 더 하고.”
한 모금을 마셨다. 바닥까지 조금 남아서 그냥 다시 목을 꺾어 잔을 비웠다. 의자에서 일어나 옆으로 조금 걸었다. 백지수가 소리를 냈다.
차렷 자세로. 띄운 발은 대충 30도 각도로 해주면 되는 거 같애. 몸 흔들리거나 균형 잡으려고 팔 쓰면 취한 거래.
넵.
차렷 자세를 하고 왼발을 띄웠다.
천. 구백구십구. 구백구십팔. 구백구십칠. 구백구십육. 구백구십오. 구백구십사. 구백구, 어.
오른팔을 휘적여서 균형을 잡았다.
취했네.
아냐. 아직은 아냐.
도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직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는 정신 안 나갔어.
더 마시면 너 진짜 뇌세포 날아가는 거 아냐?
어느 정도는 교환해도 돼.
... 후회 안 해?
뭘?
나한테 얘기해주는 거. 네 얘기 들어주는 사람이 나라는 거 후회 안 할 거 같냐고.
안 해, 절대.
다시 술을 넘기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몸을 뜨겁게 데우는 차가운 술. 짜고 매콤한 나쵸칩. 너 눈 좀 풀린 거 같은데? 음? 그래? 어. 너 지금 좀 맛 간 거 같애. 안 되겠다. 너 더 마시지 마. 안 돼애... 안 되는 게 안 돼. 백지수가 술들을 다 앗아갔다. 내 잔에 있던 것을 다 버리고 물을 채워넣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젠 말할 수 있지? 으음, 아마. 얘기해줘. 잠, 깐만. 기억 좀 하고. 오른팔을 테이블에 대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디서부터 말하지. 근데 너 진짜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애? 안 말해. 내가 안 말할 줄 알고 나한테 털어놓으려 한 거 아냐? 맞아, 맞아. 아. 작년 여름인가 가을인가. 그때부터 우리 엄마가, 아빠랑 많이 싸웠다? 아니 사실 싸운 것도 아냐. 그냥 엄마가 화내고 아빠는 가만히 지켜보는? 되게 이상했어. 보통 싸운다고 하면 주먹 오가는 거처럼 서로 상처 입히는 거잖아. 근데 물건 막 던지는 거는 엄마인데, 아파하는 것도 엄마였어. 아빠는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무시하고 반응도 안 하고 그랬는데, 그니까, 상호작용을 안 했어. 맞아. 이거였어. 싸움도 하나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잖아? 근데 아빠는 상호작용을 안 해서 싸움이라는 게 성립을 안 했던 거야. 근데 이 무시라는 게, 반응해줄 가치도 없다는 뜻을 품어서, 방어인 동시에 공격이 되어서 엄마를 괴롭힌 거야. 그래서 엄마가 화내면서도 엄마가 아파한 거야. 살도 빠지고. 병원도 자주 가고. 그러다가 이혼 얘기 나오고. 왜 그런가 난 알지도 못했어. 엄마는 나한테 말 안 해주려 하고, 아빠는 꺼림직해서 내가 말 안 섞었으니까. 언제 이혼 변호사가 찾아와서 그때 알았어. 그 사람이 나한테 말해준 게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 나. 아버지가 내연녀가 있어서 이혼 소송하시려는 거야. 백지수가 부들부들 떨었다. 개 씨발 새끼... 아, 미안해. 안 물어보고 욕해서. 괜찮아. 이혼 소송 얘기까지 했지. 근데 엄마가 나 맘 고생할까 걱정해서 그런가, 합의 이혼을 하기로 했어. 되게 후딱 됐어. 합의 이혼 절차 밟고, 나 누구랑 살 거냐, 하는 건 밴드부랑 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빠랑 같이 살기로 했고. 그리고 숙려 기간? 그거 지나고. 근데 이혼 딱 되자마자 아빠가 집으로 무슨 젊은 여자를 초대하더라? 몇 살이길래? 서른 두 살. 우리랑 열 네 살 차이. 근데 초대 수준이 아니었어. 자고 가기도 했으니까. 거의 그냥 식구가 늘은 느낌? 조금씩 자기 물건 가져와서 쓰고. 미친 년이네. 그니까. 근데 또 어느 사이에 그 여자랑 아빠가 재혼해가지고, 집에 중 3 딸도 데려와서 살더라. 딸이 중 3이라고? 그럼 고딩 때...? 어. 고 1때 출산. 암튼. 내 여동생 된 그 여자 딸, 걔도 존나 이상해. 싸가지 말아먹어가지고. 걔 때문에 우리 집이 우리 집이 아니라 걔네 집이고 내가 거기에 끼어 사는 느낌 들고 그랬다니까. 근데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오늘 있잖아. 응. 버스킹 때 엄마가 오기로 했다? 원래 엄마가 이혼한 뒤로는 서울을 안 올라왔단 말야. 근데 나 보겠다고 큰 맘 먹고 서울로 오시기로 했어. 응. 일곱 시에 오기로 했는데, 안 보였어. 노래 하고 나서도. 전화 세 번 넘게 걸어도 안 받고. 근데 그때 누가 등 뒤에서 검지로 나 톡톡 건드리는 거야. 뒤돌아보니까 누가 있었는 줄 알아?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도로 다물었다. 새엄마. 그 여자가 있었어. 우리 엄마 말고. 상황이 뻔하잖아. 엄마가 그 여자 얼굴 보고 사라진 거. 미칠 거 같아 가지고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근데 이 미친 여자가 쫓아 온 거야. 뭔 일인지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그래서 어떡했는데? 우리 엄마인 척하지 말라고 했지. 양팔 잡고. 근데 끝까지 자기가 엄마 아니라고 부정은 안 하더라. 지독하게.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냐 그 여자? 몰라. 그런 거 같애. 암튼. 집에 돌아가면 또 그 여자 있을 거고, 그 여자 다시 보면 그땐 진짜 내가 미쳐버릴 거 같아서, 너한테 부탁한 거야. 얘기 들어달라고. 재워달라고. 애써서 미소지어 보였다. 고마워. 둘 다 해줘서. 백지수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안아줄까? 응. 백지수가 일어서서 다가왔다. 너른 품에 안겼다. 괜찮아? 응. 나만 품어서 끙끙 앓지는 않게 됐으니까, 좀 편해진 거 같애. 어떻게 참았어. 그니까. 나도 모르겠어.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존나 애인데 남들 다 모르게 감추고 혼자 끙끙대고. 미련하게. 남들 알려줘서 좋은 얘긴 아니잖아. 후우, 그치. 그래서 이 얘긴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안 한 거야? 응. 다른 사람한테 얘기할 맘은? 없어. 진짜? 진짜로. 누구한테 말해. 글쎄. 김세은? 김세은은 왜? 몰라, 그냥. 나 지금 토하고 싶어. 어? 어. 빨리 가. 백지수가 날 놓아줬다. 화장실로 달리듯 걸어가 변기통 앞에 무릎 꿇었다. 쏟아졌다. 몸을 뜨겁게 데운 차가운 술과 짜고 매콤한 나쵸칩이 형체를 잃고 위액과 섞인 채로.
다시 살피니 뒤풀이로 먹은 고기도 있었다. 내 옆에 쪼그려 앉은 백지수가 왼손으로 내 등을 쓸고 있었다.
“괜찮아?”
“응. 나 일어서게 손 좀 줄래?”
“어.”
백지수가 먼저 일어나서 왼손을 건넸다. 백지수의 오른손에는 물을 담은 비어 머그가 들려 있었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무릎을 짚어 일어났다. 세수하고 수건을 쓴 뒤 수돗물로 입을 세 번 헹궜다.
“마셔.”
옆에 선 백지수가 오른손에 든 비어 머그를 내게 건넸다. 받아서 마셨다. 물이 달았다. 그 자리에서 다 마시고 도로 돌려줬다.
“고마워.”
“너 잠은 어디서 잘래?”
“왜. 침대에서 자게 해줄 거야?”
백지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원하면?”
“너는 어디서 자고.”
“소파. 그거 반 정도 침대야.”
“장난이야. 내가 소파에서 자야지.”
“알겠어.”
“나 입에서 술 냄새 안 나?”
“존나 나.”
피식 웃었다.
“근데 왜 거리 안 두고 옆에 있어줘?”
“너 픽 쓰러질까봐.”
“나 그렇게 안 약해.”
“내 가슴에 파묻혀서 질질 짠 거 누구?”
할 말이 없어서 대답 없이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 백지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 존나 말 없이 나 뚫어져라 보지 마라.”
“왜?”
“걍 존나 무안하니까 하지 말라고.”
“알겠어.”
백지수가 오른손 검지로 내 얼굴에 삿대질했다.
“그리고. 너 내가 왜라고 하지 말랬지.”
“까먹었다.”
“조심해라.”
“네.”
“나 씻을 거니까 2층 올라오지 마.”
“2층에도 욕실 있었나?”
“내 방에 딸린 화장실 있어. 내가 이거까지 말해줘야 돼?”
“너 지금 너무 날 서있다.”
“2층 올라오지 말라는 거 대답이나 해.”
“알겠어.”
대답을 들은 백지수가 화장실을 나가서 나도 따라 나갔다. 백지수가 말 없이 내게 비어 머그를 넘겨주고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중간 쯤에서 뒤돌아 나를 보며 다시 삿대질했다.
“너 나 내려올 때까지 1층에 존나 가만히 쑤셔 박혀 있어.”
“말 좀 험하게 하지 마.”
“후우... 어. 미안. 가만히 있어야 돼.”
“응.”
대답을 들은 백지수가 2층으로 올라갔다. 비어 머그에 다시 물을 채워서 마셨다. 소파에 앉아 등을 파묻듯 기댔다. 이곳이 집보다 편안했다. 농담이 아니라, 집은 집이 아니었다. 집은 집으로서의 의미를 잃은지 꽤 오래였다. 집이 수행해야 할 기능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정서적 안정감 부여 측면에서 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공간은 지금 내가 있는 백지수의 별장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은,
여기에서 살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