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버스킹하는 날 (13)
* * *
이대로 있으면 분위기만 더 죽 쑬 상황이었다. 정우가 빠져줘야 했다. 손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자 정우야.”
손정우가 자기 접시를 들고 묵묵히 따라왔다.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서도 조용했다.
“정우 왜 이리 죽상이야?”
송선우가 말했다. 손정우가 얼굴을 폈다.
“아뇨.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생각할 거라. 꺼내봐야 할 거 같다.
“정우 실시간으로 김세은한테 차이고 왔어.”
“네? 그건 아니죠 형!”
“정우 너 방금 고백했어? 그래서 시끄러웠던 거야?”
송선우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 하고 탄식을 뱉은 손정우가 마른 세수를 하고 입을 열었다.
“고백은 안 했어요...”
“그럼?”
“그냥 제가 좋아하는 게 티가 많이 났나봐요.”
“뭐?”
송선우가 물은 다음에 대놓고 아학학, 하고 웃어댔다. 송선우가 자기가 웃는 박자에 맞춰서 내 어깨를 때렸다. 손정우가 할 말이 없었는지 고기를 입에 쑤셔넣었다.
“아, 후우. 정우 금사빠였어? 세은이랑 마주칠 기회도 별로 없었잖아. 밴드부에서 몇 번 보고 말았을 건데? 진짜 귀엽다 정우야. 괜찮아. 너면 얼마든지 다른 여자 찾아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송선우가 위로했다. 정우가 우물대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럼 대신으로 사람 만나는 거잖아요. 그런 건 싫어요.”
콜라를 마시던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푸흡 웃었다. 입가에서 턱으로 흐른 콜라가 가슴 위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놀란 서유은이 휴지를 마구 뽑아서 백지수의 입에서 백지수의 가슴과 허벅지 등으로 흐른 것을 닦아주었다. 백지수도 휴지를 뽑아서 입가를 닦았다.
“괜찮아요 언니?”
“하아... 고마워 유은아. 정우야.”
“네?”
“너 그런 멘트 칠 거면 깜빡이 좀 키고 해주면 안 될까?”
“전 진심이었는데...”
“어, 지금 같은 거 조심해달라고.”
“네...”
“왜. 귀엽기만 하구만.”
송선우가 말했다.
“귀여운 건 맞는데, 오글거리는 건 또 별개라서.”
백지수가 답했다. 지금이 물어볼 타이밍이었다.
“근데 정우야. 방금 말한 생각할 거라는 게 뭐야?”
“응? 그거 걍 세은이한테 까인 거 숨기려던 변명 아니었어?”
송선우가 물었다.
“아...”
손정우가 입을 다물었다가 도로 열었다.
“그거 그냥. 근데 이거 꼭 말해야 돼요?”
손정우가 나를 봤다.
“이렇게까지 끌었는데 말 안 해주면 우리 오늘 잠 못 자지.”
“그냥... 세은 선배가 누구를 사귈 처지가 되면, 저한테 기회가 있는 거 아닌가, 사실 방금도 살짝 여지를 준 거 아닌가, 그런 생각했어요.”
“정우야.”
송선우가 안쓰럽다는 듯 손정우를 쳐다보았다.
“포기해.”
“왜요?”
“걍 포기해. 안 돼. 걍, 넌 안 돼.”
손정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송선우를 바라봤다. 송선우가 눈썹을 으쓱였다.
“짝사랑하고 싶음 알아서 해. 난 말해줬다.”
“...”
그 다음부터는 화제가 바뀌었다.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배를 채웠다. 정우가 깨나 열심히 입을 놀렸다. 아마 창피함과 무안함을 감추려 애쓰는 모양이었다. 단톡방에 슬슬, 이라는 말이 많이 나왔을 때 좀만 쉬었다 나가자고 썼다. 6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 내가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다. 각자 알아서 귀가할 시간이었다. 다들 잘 가라며 서로 작별인사했다. 내게는 잘 가라는 말 앞에 잘 먹었어요, 잘 먹었다, 라는 말을 한 마디씩 덧붙였다.
“야상 잘 입었어요 언니.”
서유은이 야상을 벗고 양손을 뻗어 김세은에게 공손히 돌려줬다. 김세은이 왼손으로 야상을 받아들었다. 김세은이 오른팔을 직각으로 뻗었다. 김세은의 오른손이 외투 옷자락 안으로 숨어들었다.
“응. 이온유, 벗겨 가.”
서유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도 마땅히 무어라 지적할 말은 떠오르지 않는지 입만 뻐끔댔다.
“빨리. 안 가져갈 거야?”
대답 없이 오른팔에서 외투를 빼내었다. 김세은이 야상을 오른손으로 옮기고 왼팔을 또 직각으로 뻗었다. 왼팔에서도 빼내고 외투를 걸쳤다. 김세은도 야상을 입었다. 김세은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잘 가 온유야.”
“잘 가.”
“유은아. 가자.”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선배.”
“응. 잘 가.”
서유은이 김세은의 옆에 따라 붙었다. 김세은은 서유은의 어깨에 왼팔을 올리고 서유은은 김세은의 허리에 오른팔을 감고 걸었다. 둘이 멀어지는 걸 보다가 뒤돌아서 택시를 부른다던 백지수를 찾아갔다.
“존나 둘이 화보 찍는 줄.”
팔짱을 낀 백지수가 말했다. 택시가 오나 확인하려는 건지 백지수의 시선은 도로에 고정되어 있었다.
“뭔 소리야?”
“김세은 외투 벗겨주는 거 개 꼴값이었다고.”
“야.”
“뭐.”
“너 왜 이리 귀엽게 구냐?”
“뭐, 뭐?”
백지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너 귀엽다고.”
“조, 존나 훅 들어오지 마 미친 새끼야...”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내 왼팔뚝을 툭 밀쳤다.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밀려나지는 않았다.
“너 지금도 개 귀여운 거 알아?”
“개... 좆까 병신아...”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택시 왔는데.”
“그럼 그냥 타면 되지 뭘 보고하고 있는 건데 미친 놈아.”
“응.”
“존나...”
백지수와 같이 걸어갔다. 트렁크를 열어 내 기타와 백지수의 베이스를 집어 넣었다. 백지수가 택시 뒷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서 내가 들어가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뭐하세요.”
“앞에 앉아.”
피식 웃고 앞문을 열어 앞좌석에 앉았다. 백지수의 별장을 향해 택시가 움직였다.
“같은 데에서 내리세요?”
택시기사님이 정면주시를 하며 물었다.
“네.”
내가 답했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차창을 봤다. 다행히 더 깊이 들어오지는 않아서 편안했다. 일정한 무관심함은 현대인의 미덕이었다. 관심이 과도하면 불편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기사님이 나와 백지수가 서로 가까이 사는지, 무슨 사이인지 등을 캐물었다면 거짓을 꾸며내서라도 답변을 해주어야 할 거였기에 어쩔 수 없이 불편해졌을 것이었다. 김세은은 이런 면에서 덕이 탁월하지는 못했다.
백미러를 봤다. 백지수는 시트에 몸을 편히 기대고 폰을 거의 눈 바로 앞에 둬서 텍스팅을 하고 있었다.
“누구랑 문자해?”
“친구. 밴드부 단톡이나 확인해봐.”
폰을 꺼내서 단톡을 봤다. 별로 볼 내용은 없었다. 1학년 한 명이 밥 먹은 데가 집이랑 상당히 가까웠어서 벌써 집 안에 들어갔다는 것 정도가 정보라면 정보라고 할 수 있었다.
“뭐 없는데?”
“대신 확인 감사.”
픽 웃었다.
“네가 귀여운 거냐 아님 내가 널 귀엽게 보는 거냐?”
백지수가 핸드폰에서 시선을 거두고 날 째려봤다.
“너 적당히 해.”
“뭘.”
“그런 멘트 존나 막 뿌리지 말라고.”
두드드, 전화가 왔다. 김세은이었다.
“나 전화왔다.”
“그래서.”
“받는다.”
“보고할 필요 없어.”
받았다. 바로 볼륨을 줄여 나만 들을 수 있게 했다.
“여보세요?”
ㅡ심심해. 나 집 들어갈 때까지 재밌는 얘기해줘.
“누구야?”
백지수가 물었다. 핸드폰을 조금 떨어뜨리고 말했다.
“김세은.”
“왜 전화했대?”
“심심하대.”
“미치겠네 진짜...”
“왜 네가 미쳐.”
“됐어 전화나 받아.”
“어.”
다시 폰을 귀에 가까이 댔다.
ㅡ너 누구랑 있어 지금?
“백지수. 같이 택시 타고 가고 있는데.”
ㅡ집 방향 같애?
“조금?”
ㅡ맘에 안 들어.
“왜 또.”
ㅡ짜증나. 화나. 왜 같이 가? 그냥 따로 택시 타고 가도 됐잖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잖아.”
ㅡ너 돈 막 쓰잖아. 방금도 돈 혼자 다 냈고. 왜 택시탈 때는 경제인 되는 건데.
“그럴 수도 있지.”
ㅡ... 사랑한다고 해줘.
“지금?”
ㅡ응.
“어떻게 해. 안 되지.”
ㅡ나 지금 가슴 답답해. 미치겠어. 나만 계속 말 많이 하고 넌 짧게 한 마디씩만 하고.
“말 많이 하고 안 하고가 왜.”
ㅡ불공평하잖아. 원래 동등해야 되는 거 아냐?
“글쎄. 네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같아.”
ㅡ근데 내가 그렇게 느낀다구.
답답했다. 백지수가 있어서 내 맘을 속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말을 하는 양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화자가 말에 얼마 만큼의 뜻을 담고, 또 청자가 그 말에서 어느 만큼의 의미를 전달받는지였다. 나는 의미를 눌러담는 송신자라면 김세은은 눈앞에 쌓인 편지 봉투 수만 가늠하는 수신자였다. 정말 중요한 건 봉투 속의 글귀인데.
“상황도 상황이고, 성격인 거니까 그냥 이해해.”
ㅡ히잉. 알겠어.
웃을 뻔했다. 대놓고 귀여운 척을 하는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마냥 귀여워서. 방심했다면 아마 계속 실실 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큰일날 뻔했네.”
ㅡ응? 왜?
“웃을 뻔해서.”
ㅡ나 귀여워서?
“응. 전화 끊어도 돼?”
ㅡ왜?
“힘들어.”
ㅡ나랑 전화하는 게?
“응. 잠만.”
볼륨을 완전 없애고 빠르게 자판을 두드려 톡을 보냈다.
[너랑 전화하는데 좋아하는 티내면 안 되잖아. 백지수 눈치 엄청 좋은데. 말실수 안 하려고 단어 골라서 말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어.]
다시 볼륨을 살짝 키웠다.
“봤어?”
ㅡ히힣. 응. 알겠어. 끊어줄게.
“응.”
ㅡ사랑해.
“어.”
끊겼다. 힘들었다. 김세은이 데뷔하고 나서도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데. 미래가 걱정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