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48화 (48/438)

〈 48화 〉 버스킹하는 날 (12)

* * *

“뒤풀이 같은 거 없어요?”

1학년 남자 보컬 손정우가 말했다. 한 시간 반 넘게 앉아만 있는 게 움직임이 조금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피곤한 일이라 지칠 법도 한데 손정우의 눈은 초롱초롱하기만 했다. 1학년들이 다 이런가 스윽 훑어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세션인 1학년 애들은 피로에 젖은 게 눈에 보였다. 손정우는 마지막에 합창을 해서 얘만 기운이 살아난 거였다. 그래도 그냥 돌려보내면 1학년 애들이 서운해 할 것 같기도 했다.

“내일 네 시 반에 성수역에서 만나기로 했나 우리?”

내가 물었다.

“네.”

손정우가 답했다.

“그냥 지금 다 같이 밥 먹으러 가서 짧게 뒤풀이 하는 거로 하고. 그럼 또 집 가면 피곤할 테니까 내일 쉬는 시간 조금이라도 안배 더 할 수 있게 다섯 시에 각자 음식점에서 모이기로 할까?”

“좋아요!”

서유은이 답했다. 네, 응, 하고 다들 우르르 따라 답했다. 단체 손님을 받는 무한리필 고깃집으로 데려가서 추가 비용 드는 것도 마음껏 시키라고 했다. 사다리를 태우고 테이블에 다섯 명씩 붙었다. 내가 앉은 테이블 인원은 백지수, 김민우, 박철현, 송선우였다. 송선우가 집게를 들었다.

“대박집 알바가 고기를 구워준다? 달달하네.”

김민우가 반찬으로 나온 고구마 맛탕을 젓가락으로 건드리며 말하고 곧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진짜 넘 달달하네.”

그러고는 혼자 실실 웃었다. 아니 박철현도 같이 킥킥 웃었다. 김민우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의 개그를 날리고 자기만 웃곤 했다. 옆에 박철현이 있으면 박철현도 웃었고. 둘은 이상하게 개그 코드가 맞았다.

“노잼이야 오빠.”

백지수가 말했다.

“난 알콜 들어가야 재밌어.”

김민우가 답했다. 그런 실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20분이 흘렀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자리를 옮겨야 했다. 1학년 애들이 선배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구상한 거였다. 1학년 애들은 처음엔 편히 먹을 수 있게 1학년들끼리 붙이고, 20분이 지났을 때 가위바위보를 해서 6명이 엉덩이를 들고 각자 선배 세 명이 기다리는 테이블을 찾아가게 하는 식이었다. 테이블 당 두 명이 빠져야 하기에 선배들도 가위바위보를 하는데, 가위바위보를 져서 일어난 선배들은 다시 세 명씩 뭉쳐 가위바위보에서 패배한 채 멀뚱멀뚱 기다리는 1학년 두 명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야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여섯 명의 1학년은 선착순으로 원하는 테이블에 가서 앉으면 됐다. 우리 테이블로 서유은이 달리듯 빠른 종종 걸음으로 왔다.

“유은이 누구 보러 이렇게 달려왔어요?”

송선우가 일어나서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서유은이 달려오다가 속도를 줄여오며 잽싸게 테이블의 빈 공간에 자기 접시를 내려놓고 그대로 송선우의 품에 안겼다.

“존나 귀엽네...”

백지수가 폰을 들어 녹화했다. 얘가 말은 험하게 해도 귀여운 거에는 사족을 못 썼다. 당장 보이는 휴대폰 그립톡만 해도 고양이 그림이 박혀있었다.

“누구 보러 왔어요? 우리 유은이?”

송선우가 말했다. 서유은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랑 언니랑 선배요.”

서유은이 송선우를 보고 백지수를 보고 나를 보면서 한 번씩 말했다. 백지수가 자기가 지목되는 순간에 푸흐, 하고 웃어서 소리가 영상에 담겼다. 백지수가 녹화를 멈추고 폰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다음 서유은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안았다. 서유은의 눈높이에는 송선우의 가슴이, 등에는 백지수의 가슴이 밀착된 상태였다.

“우아아... 지수 언니...”

눈을 크게 뜬 서유은이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언니, 아니 일단 온유 선배 귀 막아요.”

“응.”

양손으로 귀를 덮어 막았다.

“언니 가슴 너무 커서 감촉 진짜 그냥 막 완전 짱이에요.”

“그치?”

송선우가 말하면서 도로 자리에 앉아서 고기를 관리했다.

“지수 이거 가슴에 마약 발라놓은 거 아닌가 검출해봐야 돼. 중독성 미쳤어.”

“야 이온유 귀 그만 막아도 돼.”

다시 자리에 앉은 백지수가 말했다. 안 열었다.

“이 새끼 들리면서 모르는 척 한다.”

“선배 진짜 들려요?”

백지수 옆에 앉은 서유은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저 순진한 눈을 계속 마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거 같아서 일단 귀에서 손을 뗐다.

“뭐라고?”

“선배 방금 다 들렸어요?”

“아니.”

“눈 가리고 아웅 에반데.”

백지수가 말했다.

“에이 걍 믿어줘. 부장님이 그렇다는데.”

송선우가 말했다.

“아니 호칭 뭔데. 부장님 이러네.”

내가 말했다. 송선우가 고기 세 점을 올린 쌈을 싸서 내 앞에 들이 밀었다.

“조용히 하고 드세요 부장님. 자, 아.”

고분고분 입을 벌렸다. 쌈이 입에 들어왔다.

“걍 알아서 먹게 해. 이온유 넌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걸 그대로 받아 쳐먹냐.”

백지수가 투덜댔다. 백지수의 옆에 앉은 서유은의 동공이 마구 지진했다.

“온유 선배랑 선우 언니 사겨요...?”

“아니.”

송선우가 피식 웃고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 쳤다.

“왜.”

“넌 업보가 많은 거 같다.”

“업보는 무슨 업보. 나 죄지은 거 없어.”

송선우가 대답도 않고 새로운 쌈을 만들었다.

“유은아 너도 먹을래?”

“네? 좋아요!”

서유은이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다. 송선우가 왼손을 테이블에 대고 오른팔을 뻗어 입에 넣어줬다. 서유은이 열심히 입을 오물거렸다. 백지수가 다시 녹화했다. 서유은이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 백지수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서유은이 꿀꺽 삼키고 녹화가 끊겼다.

“왜여?”

핸드폰을 내려놓은 백지수가 미소지었다.

“너 너무 귀여워서. 일루와 안아주게.”

“넹.”

서유은이 백지수에게 안겼다. 백지수가 양팔로 서유은의 머리를 감싸 안아서 서유은의 얼굴이 백지수의 가슴에 파묻히기라도 할 듯한 광경이었다. 헝클어지지 않게 서유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던 백지수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왜. 너도 안아줘?”

백지수가 미소지었다. 그러면서 얼굴이 발그레 해지는 게 꽤 볼만했다.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부끄러워하는 건 또 뭔지.

“아, 안 돼요오!”

서유은이 버둥거렸다. 백지수가 놀란 표정을 하고 서유은을 풀어주었다. 서유은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다.

“왜 그래 유은아?”

“아, 안 돼요. 그런 거.”

송선우가 푸흡, 하고 터졌다. 그러곤 양손을 내 어깨에 대고 내게 몸을 기울이며 끅끅 웃어댔다. 당혹스러웠다.

“넌 또 왜 그러세요?”

“아, 진짜 개 웃기잖아. 적당히 해 이온유.”

“나 한 거 아무 것도 없잖아.”

“평소에 처신 좀 잘하라고.”

억울했다. 이런 대화 화제면 항상 나는 반격 한 번 못하고 몰리기만 했다. 빨리 바꿔야 했다.

“근데 1학년 다른 한 명은 왜 안 오지?”

“어, 그러게여.”

“저기서 뭔 일 생긴 거 같은데.”

백지수가 오른손 검지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손정우가 한 테이블 앞에 서있었다. 조금 소란스러웠다. 직원이 제재하지 않을 정도로만.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세은과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게 왠지 낌새가 좋지 않았다.

“내가 가볼게.”

“왤케 진지해?”

백지수가 물었다. 송선우가 몸을 일으켜 내가 나갈 길을 터주었다. 걸어가서 뭔 일인가 봤다. 테이블에는 1학년 키보디스트와 베이시스트 남자애, 김세은, 김수원, 3학년 여자 보컬이 앉아 있었다. 손정우는 그 앞에 서있었고.

“무슨 일이야?”

손정우가 나를 돌아봤다. 억울한 기색이 가득했다가 나를 보자마자 구원자를 발견하기라도 한 양 화색이 돌았다.

“온유 형! 저 접시 채워오는데 그 사이에 지훈이가 제 자리 뺏었어요!”

손정우가 1학년 베이시스트 이지훈을 가리켰다. 이지훈을 쳐다보는데 뭔가 곤란스러워하는 듯했다.

“선배... 그게...”

“내가 와서 앉으라고 했어.”

김세은이 말했다. 왠지 화가 났다. 아마 김세은이 남자애를 지목해서 같은 테이블에 앉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여기에 집중하면 안 될 상황일 건데.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런데 너무 싸늘한 목소리가 나왔다. 이지훈의 얼굴이 빠르게 창백해졌다.

“정우가 너무 부담돼서.”

손정우를 바라봤다. 손정우의 시선은 김세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손정우가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로 닫았다.

“정우가 뭐했는데?”

김세은을 보며 말했다.

“그냥. 느낌으로 알잖아.”

김세은이 손정우를 쳐다보았다.

“나 누구 못 사겨 정우야.”

김세은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손정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감히,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게 보고 있던 후배가 감히 김세은을 넘보고 있었다는 게 너무 괘씸했다. 동시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정우는 외모나 성격이나 객관적으로 좋은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관심을 표해도 김세은은 그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벽을 세워 놓으니 정말 나만을 바라보고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김세은의 이런 태도는 바뀌지 않을 거였다. 그게 너무 좋았다. 무심코 있으면 이 썰렁한 분위기에도 함박웃음을 지어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김세은과 눈이 마주쳤다. 김세은이 가볍게 눈웃음 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불판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 본 눈웃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