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버스킹하는 날 (11)
* * *
숨 막히는 기싸움에서 구해준 송선우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송선우가 피식 웃었다.
“너무 받기만 하는 거 아니야? 나중에 이자까지 갚아, 정 고마우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너무 터무니 없는 거만 아니면 진짜 해줄게.”
송선우가 눈을 마주쳐왔다. 송선우가 장난기 있는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 그 말한 거 후회하게 해준다.”
“후회할 것 같음 내가 안 들어주지.”
“네 하는 꼬라지 보니까 앞으로 나한테 계속 신세질 것 같구만. 네가 생각해도 납득될 수준으로 굴리든 어떻게든 할 거니까 걱정이나 하고 있어.”
“뭔데 둘만 얘기하면서 웃어. 공유해, 같은 조원끼리.”
박철현이 말했다.
“선배들 공연하는 거나 보자.”
송선우가 말했다. 박철현이 주둥이를 다물고 삐죽 내밀었다.
“남자쉑이 귀척하는 것봐.”
옆에 앉은 김수원이 박철현의 주둥이를 때렸다. 박철현이 도로 입을 집어넣었다.
“근데 우리 내일 단합 때 진짜 뭐해?”
김수원이 물었다.
“나도 몰라.”
접때 부원들이 투표에서 성수를 골랐다. 그냥 대충 던진 곳들에서 음식점을 하나씩 골라 사진들을 보여줬는데, 수제햄버거가 맛있어 보인다며 충동적으로 골라댔다. 밥 먹고 난 다음은 하나도 생각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부장인 내가 계획이 다 있어서 후보지를 던져준 건 줄로 믿고 뇌를 뺀 건지. 뭐가 됐든 그리 달갑지 못했다.
“그럼 어케. 다 너만 믿고 골랐을 건데.”
김수원이 말했다. 진짜 그런 거였나.
“진짜야 철현아?”
“어. 나도 그랬는데?”
미치겠네.
“아니 왜 날 믿었대?”
“네가 다 아는 사람처럼 생겼으니까.”
송선우가 말했다.
“뭔 소리야?”
“여기저기 마구 돌아다녀본 사람처럼 보인다고.”
“한마디 요약. 인싸 중의 인싸, 인싸라는 말의 현현, 인싸 그 자체로 보였다.”
박철현이 한 마디가 아닌 말을 덧붙였다.
“아니 뭔, 하... 어디에 뭐가 있는지, 뭐가 유명한지 정도는 알지 않아? 근데 성수를 고른다고? 성수에 뭐 있는데? 카페랑 맛집 밖에 없지 않아?”
“그것은 부장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박철현이 깐족댔다. 이상하게 밉지는 않았다. 그냥 유쾌해서 좋았다.
“없음 걍 한강이나 가든가 하면 되지. 밥 먹고 건대나 단 데로 가거나.”
송선우가 말했다.
“아 몰라.”
테이블에 양팔을 대고 얼굴을 묻었다. 생각하기 싫었다.
“이온유 애교 부린다.”
송선우가 말했다. 녹화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꺼어.”
“부장이 애교 부리는 희귀 장면? 이건 녹화 못 참지.”
“꺼 그냥 조옴.”
“좀만 더 애교 부려봐. 이런 건 흑역사가 아니라 덕질 떡밥 내지 영상 자료라니까. 나중에 이런 거 남겨줘서 고맙다는 얘기할 준비나 하고 있어.”
“아니이... 하지 마.”
“좋아 좀 더.”
“그만해애 노잼이야 이거 진짜.”
“오키 여까지.”
송선우가 녹화를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다시 틀길래 같이 보는데 오디오가 노래 소리와 겹쳤다.
“소리 겹쳐서 못 써. 걍 지워.”
“이거 소리 깔끔하게 분리하는 기술 있어서 상관 없어.”
“온유야 너 부르는 거 같은데?”
김수원이 어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한 테이블에서 김민우가 나를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일어서서 걸어갔다.
“단체곡으로 앵콜하고 끝낼 거야. 노래는 아리아나 그란데 ‘imagine’. 세은이한테 얘기하고. 아, 유은이랑 정우한테도 노래 알면 같이 하자고 말해주고.”
김민우가 약하게 내 팔뚝을 밀치듯 쳤다.
“몸은 괜찮아? 개 튼튼하게 생겨놓고 왜 그리 빌빌대.”
“괜찮아요.”
“내가 다시 부장하는 거 같잖아. 몸 관리 좀 잘 해. 아님 다른 애한테 부장 자리 넘겨주든가.”
“고민 중이에요.”
“응? 진짜? 누구 주려고?”
“몰라요. 일단 백지수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 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말하러 가. 2조도 다 끝나가니까.”
“네 형.”
옮겨 다니며 엔딩곡이 ‘imagine’ 합창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럼 꼭 한 가지 의문이 돌아왔다.
‘단톡으로 말하지 왜 굳이?’
‘단톡으로 얘기하셔도 되는데.’
“아날로그 감성으로. 그런 논리 막 적용하면 사람들 다 굳이 라이브 음악 들으러 갈 필요 없고 가수가 최고 컨디션으로 부른 앨범만 돌려 들으면 되는 거잖아.”
여기까지만 해도 다들 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핑계고. 나 너희랑 얘기하고 싶어서 온 건데, 안 돼?”
그럼,
‘돼죠!’
‘누가 안 된댔어. 누구야.’
내지는
‘야 씨바, 내가 게이였음 방금 반했다.’
‘온유야 밤길에 뒤 조심해라. 이 새끼 찐 게이일 수 있어.’
‘개지랄 노.’
같은 반응을 했다. 돌아다니면서 몇 마디씩 나누다보니 어느새 ‘imagine’을 부를 시간이 되었다. 밴드부 보컬이 모두 스테이지 위에 올라갈 수는 없어서 그냥 다 같이 밑에 내려와 스테이지에 걸터앉아서 부르기로 했다. 여자 남자 여자 남자 형태로 앉아서 내 오른편에는 김세은이, 왼편에는 서유은이 앉아 있었다. 틱, 틱, 김세은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틱, 아이컨택을 하면서, 틱, 입을 열었다.
ㅡStep up the two of us, nobody knows us
Get in the car like, "Skrrt"
벌스를 마쳤을 때 김세은이 흡족하게 미소지으며 너머를 보았다. 시선을 좇아 옆을 보았다.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서유은이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서유은의 동공이 커지며 화색이 돌았다.
ㅡClick, click, click and post
Dripdripdripped in gold
코러스를 하는데 김세은이 끈질기게 내 옷소매를 잡아 당겼다. 다시 김세은과 시선을 맞췄다. 김세은의 입가와 눈가에 웃음기가 생겨났다.
ㅡWe go like up 'til I'm 'sleep on your chest
Love how my face fits so good in your neck
김세은이 머리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인별에 올리려고 녹화도 하고 있을 건데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었다. 왼손을 어깨에 대서 김세은의 머리가 붙지 않게 막았다. 그 뒤로도 노래가 끝날 때까지 연신 고개를 돌리며 성대를 울렸다. 내 시선을 더 오랜 시간 가져간 건 김세은이었다. 계속 고개를 돌려대다 보니 노래를 부르면서 목 스트레칭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관객들이 다시 앵콜을 외쳤다.
“어떡해요오...?”
서유은이 나를 봤다. 마이크에 소리가 들어가서 관객들이 웃었다. 서유은이 한 말을 기점으로 다 나를 봤다. 나는 드럼 의자에 앉은 김민우를 봤다. 김민우는 그냥 내 쪽으로 턱을 내밀었다 뺄 뿐이었다. 내가 알아서 하라는 뜻인가. 관객들을 봤다.
“혹시 신청곡 있을까요?”
어느덧 무대에 가까이 온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일어서서 주욱 둘러보다가 왼손으로는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고 오른손을 든 채 통통 튀고 있는 꼬마 여자애를 지목했다.
“무슨 노래 듣고 싶어요?”
“방탄 ‘소우주’요!”
“알겠어요. 불러줄게요.”
고개를 돌려가며 보컬들을 보면서 물었다.
“다 이 노래 알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송선우가 기타를 가져와줬다. 스트랩을 맸다. 내가 일어나서인지 모두 일어났다. 송선우가 마이크 스탠드를 내 앞에 가져다 줬다.
“고마워.”
“적립 중이다.”
송선우가 장난스럽게 웃고 돌아갔다. 김세은이 송선우와 나를 쳐다봤다. 눈을 마주쳐서 미소지었다. 김세은이 웃음을 되찾았다.
“시작한다?”
어느새 악보를 찾았는지 김민우가 말했다.
“하죠.”
내가 말했다. 하이햇이 빠른 템포로 맞부딪는 소리가 났다. 악기 소리들이 버무려지고 보컬들이 입을 열었다.
ㅡ반짝이는 별빛들
깜빡이는 불 켜진 건물
소우주를 신청한 여자애가 해맑게 웃었다. 즐거운 마음이 샘솟았다. 이 감각이 내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였다. 이 다음에도, 먼 미래에도 노래를 부르고픈 이유였다. 김세은이 나를 봤다. 눈을 마주쳤다.
ㅡYou got me
난 너를 보며 숨을 쉬어
고개를 돌려 서유은을 봤다. 싱그러운 눈웃음에 미소로 답했다.
ㅡI got you
칠흑 같던 밤들 속에
김세은이 다시 내 옷소매를 당겼다. 또 고개를 돌렸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김세은과 눈을 맞추며 노래 불렀다. 관객들에게 감사인사를 한 뒤 사진을 찍자는 소수의 사람과 사진도 찍고 뒷정리했다.
인별에 우리 밴드부 해시태그를 건 게시글들이 올라온 걸 확인했다. 다들 영상이나 사진을 확인하면서, 아 나 개 못생기게 나왔네, 같은 소리를 해댔다. 답변으로는, 온유는 굴욕샷 없는 거 보면 네 얼굴 잘못이죠, 가 나왔고, 그럼 또, 너 지금 우리 엄마 아빠 욕하는 거임, 같은 식으로 받아쳤다. 다들 웃었다.성공적으로 버스킹을 마쳤다는 후련함이 있어서 밴드부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삐걱대던 하루가 그럭저럭 정상적인 궤도를 되찾아 끝나가고 있었다. 다시 가슴 한 켠이 답답해왔다. 나는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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