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46화 (46/438)

〈 46화 〉 버스킹하는 날 (10)

* * *

“왜 그러세요?”

서유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김세은 지나가서.”

“진짜요?”

서유은이 김세은이 걸어간 쪽을 보았다.

“벌써 가셨나... 근데 옷도 안 스치지 않았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 걔 지나가면서 뒤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갑자기 막힌 게 느껴져가지고.”

“아아. 그럴 수 있죠.”

“나 지금 또 머리 아파져서, 잠깐만 다시 밖으로 나갔다 돌아올게. 선배랑 애들한테 나 또 나갔다고 대신 좀 얘기해줘. 아, 그리고 이거 받아. Aou 엔터 실장 명함. 생각 있으면 연락해달래. 바빠서 자기가 직접은 못 주고 나더러 전해달래더라.”

서유은이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아 넵. 얘기 잘 해놓을게요! 머리 아프신데 말 걸어서 죄송해요! 관자놀이 마사지하고 있으시던 거 봤는데에...”

웃음이 나왔다. 그 정도로 착한 애였다. 마주하고 있자면 도저히 나쁜 감정을 내비치기 어려울 정도로.

“아냐. 괜찮아. 믿을게. 말 잘해줘.”

“넵. 저만 믿으세요!”

서유은이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따라서 주먹을 불끈 쥐는 걸 보여주고 다시 밖에 나갔다. 카페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김세은이 서있었다. 예상 질문과 답변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천천히 걸어가서 옆에 섰다.

“왜 나갔어?”

김세은이 나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김세은의 시선은 검게 보이는 한강에 고정되어 있었다.

“토하고 싶어져서.”

“같이 나간 여자는 누구고?”

“같이 나가긴 누가 같이 나가.”

“네 등 뒤에 꼭 따라붙은 여자 있었다던데.”

“누가 그러는데.”

“...”

김세은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김세은이 분한 듯 부르르 떨었다.

“제보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왠지 알 것 같았다. 김세은을 품에 안았다. 김세은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닿는 몸 면적이 더 늘어나게 자꾸만 꿈틀대며 더 깊숙이 안겨오는 게 귀여웠다. 피식 웃었다.

“강성연이야? 걔 왠지 모르게 나한테 열등감 같은 거 있잖아. 또 이상하게 음해하는 거야. 내 등 뒤 따라 붙었다는 여자는, 연예인도 아닌 내가 말하긴 좀 그런데, 팬이라서 나 필사적으로 따라 온 사람이었고. 나 토하고 그냥 돌려보냈어. 저어기에 흔적 있는데.”

“됐어. 의심해서 미안해.”

오른손으로 등을 쓸어 올린 뒤 김세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흔들리지 마.”

김세은이 품 속에서 파르르 떨었다.

“응.”

김세은이 나를 꽈악 껴안았다. 나도 조금 힘을 주어 김세은을 안았다. 7초 정도 그러고 있다가 안은 상태로 허리를 약간 뒤로 꺾듯이 해 김세은을 들었다. 김세은이 꺄악, 하고 웃었다. 그 상태로 볼에 두어 번 입 맞추고 다시 내려주었다.

“나 먼저 돌아갈 테니까 좀 더 있다가 들어와.”

내가 말했다.

“응.”

김세은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십수 번 버드 키스를 하고 떨어졌다. 몇 번이고 뒤돌아보아서 김세은과 눈을 마주치며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면서도 폰으로는 어머니에게 장문 문자를 적어 보냈다.

[엄마 괜찮아요? 새엄마 그 여자 제가 부른 거 아니에요. 자기가 저 밴드부 인별 보고 알아서 찾아온 거예요. 저 그 여자랑 말도 잘 안 섞어요. 그 여자가 얼굴에 철판 깔고 온 거예요. 저랑 친해보이려고. 그런데 자기가 찾아오면 제가 싫어할 거 아니까 제가 못 보는 곳에 숨어있던 거예요. 사람이 워낙 교활해서 다 계산하고 그런 거예요.]

쓰면서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혹여나 윤가영을 마주하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목을 조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홀로 꾹꾹 눌러 담아온 게 쌓이고 쌓여서 살짝만 건드리면 팡 터지기라도 할 듯했다. 사실 방금도 조금 그런 거였고.

오늘 하루 잠들 장소와 술이 필요했다. 잡혀 온 보컬 선배가 다음 곡소개를 하는 타이밍에 무대에 있던 김민우에게 외투를 돌려주고 백지수를 찾아서 옆에 앉았다. 백지수는 자기 조에서 떨어져 혼자 앉아 있었다. 백지수의 귀에다 조용히 소리를 냈다.

“나 네 별장에서 취할 때까지 술 좀 마시고 자고 가도 돼?”

“뭐, 뭐?”

백지수가 상체를 나로부터 멀리하고 두 팔을 뻗어 나와 거리를 두려 했다. 얼굴이 빠르게 바알갛게 달아오르는 게 붉은 과일이 익는 과정을 빨리 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백지수가 내 속삭임이 들어간 귀를 엄지와 검지로 매만졌다.

“미, 미쳤냐?”

“아니.”

손부채질을 하고 한 번 한숨을 쉰 백지수가 얼굴을 가까이 하고 까딱까딱 손짓했다. 귀를 가까이 댔다.

“나 거기서 자취해!”

“그래? 그래서?”

“아니 듣고도 안 이상해? 나 혼자 사는 곳에 네가 들어와서 취할 때까지 술 마시고 같이 잘 작정이라고? 네가 막, 그런 나쁜 놈은 아닌 건 아는데, 그래도 남자잖아!”

경악한 백지수가 팔짝 뛰기라도 하고 싶은데 억누르는 것처럼 좌석 밑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 상체를 들썩였다. 그러면서도 입으로 내는 소리는 자기와 나만 들을 수 있게 작아서 재밌는 대조를 이루었다.

“왜 그리 과민반응하는데. 나 술 마시면 네가 같이 마셔주는 게 네가 생각하는 디폴트야?”

백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원상복구했다.

“아니... 맞잖아? 누가 술을 혼자 마시는데. 하...”

백지수가 체념한 듯 몸을 고정시키고 다시 내게 상체를 기울여왔다. 외투로도 가려지지 않는 존재감이 커다란 가슴이 얼굴보다 먼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왜? 무슨 일인데?”

진짜로 같이 마셔주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딱히 바란 건 아니지만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나 혼자만 감수하고 끙끙대는 건 이미 한계에 봉착해버려서 더는 소용이 없어졌을 수도 있었다. 나는 아마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참이었을 것이었다. 신세한탄을 들어줄 과묵한 대나무숲이 되어주고 위로의 손길을 건네줄 만한 사람이. 백지수는 생각이 깊어서 그런 일을 잘해줄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술도 같이 마셔줄 거였고.

“말할 게 많아. 여기선 못해. 마시면서 얘기할게.”

“뭐 너 나가면서 따라갔다는 여자랑 관련된 일이야?”

아니 강성연 얘는 누구한테까지 말하고 다닌 거야.

“너한테만 말하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백지수가 괜스레 침을 삼켰다.

“응.”

“맞아. 자세한 건 가서 알려줄게.”

“진짜 다른 애는 모르고 나한테만 알려주는 거야?”

“응.”

백지수가 말 없이 나를 쏘아봤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약간 치들어 내 등 너머의 누구를 봤다.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알겠어.”

백지수가 조용히 말했다.

“뭔 얘기했어 둘이?”

김세은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게 내 입으로 듣겠다는 거 같았다.

“나 없을 때 버스킹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어.”

“으음... 나한테 물어보지. 너 방금 몸 안 좋다고 다시 나왔을때 나 봤잖아.”

김세은이 백지수를 흘깃 쳐다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과시라도 하려는 것처럼. 백지수가 눈을 찡그렸다가 다시 폈다.

“너한테 물어보기 좀 그랬나보지.”

백지수가 턱을 괴고 툭 던지듯 말했다. 네가 부담스러웠을 거다, 라는 의미로 들렸다. 김세은이 웃어보였다.

“무슨 뜻이야?”

“너도 몸 별로라면서 나갔잖아. 네 상태 보면서 너 붙잡고 뭐 물어보는 건 아니다 싶었겠지, 이온유도.”

“그런 거였어?”

김세은이 나를 봤다. 입술이 순간 비쭉 튀어나왔다가 도로 들어갔다. 뭐가 됐든 백지수의 말을 부정해주기를 바라기라도 한 거였나. 근데 난 이 대화에 숨겨진 진의들을 따라가는 것도 벅찼다. 행동 요인을 순식간에 분석해서 원하는 반응을 해주기는 어려웠다.

“근데 안 추워 지수야? 난 지금도 좀 추운데.”

김세은이 내가 건네준 외투 옷깃을 여몄다. 백지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뭔 얘기해?”

송선우가 다가와서 백지수 옆에 앉았다. 백지수가 송선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김세은이 춥대, 지금.”

“춥긴 하지. 근데 지금 제일 추울 건 이온유 같은데? 세은이가 외투 뺏어 입었잖아. 이온유 너 안 추워?”

“그니까.”

“안 추워. 괜찮으니까 준 거지.”

“추운 거 알아. 미안해 온유야. 대신 내가 안아줄까?”

김세은이 양팔을 벌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백지수가 김세은이랑 나를 번갈아가며 쏘아봤다. 이번엔 송선우도 팔짱을 낀 채로 관망했다. 미칠 것 같았다. 오늘은 더는 정신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스테이지 쪽을 보며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우리 선배들 공연하는 거에 집중해야 되지 않아?”

“그건 맞지.”

팔짱을 푼 송선우가 말했다.

“자리부터 옮기자. 이온유, 일어나. 백지수랑 김세은은 너희 조 있는 데로 가고.”

송선우가 일어났다. 나도 따라서 일어섰다.

“오키.”

백지수가 답하며 선선히 일어났다. 김세은도 어쩔 수 없었는지 일어났다.

“... 응.”

송선우랑 같이 걸어서 자리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보컬 선생님? 연예인은 몸이 재산인데 몸 관리 잘 하셔야죠.”

박철현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폰을 보던 김수원이 고개를 들었다.

“왤케 늦게 오냐?”

“바람 좀 쐤어.”

그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방금과 비교하면 이 자리가 너무 편했다. 강성연도 없었고.

“강성연 어디 갔어?”

“김세은 조 있는 데 간다던데 안 오네.”

김수원이 답했다.

“왜 갔대?”

“몰라.”

“냅둬 지가 안 온다는데.”

송선우가 말했다. 사실 나로서는 성연이가 여기 없는 게 편해서 불러올 맘도 없었다. 강성연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어쩌면 강성연은 백지수한테 내 얘기를 한다고 간 거일 수도 있었다. 백지수는 그걸 듣고 생각을 한다거나 뭐 어떤 이유로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었던 거고. 강성연이 지금도 안 돌아오는 이유는 아마도 날 볼 면목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가셨다. 결국엔 그 짓마저 백지수에게 부탁하는 데 일종의 도움이 되기야 했지만 괘씸한 건 행위 자체였기에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똑같이 기분 상했다.

테이블에 오른팔을 대고 오른손 위에 턱을 얹은 채 무대를 바라봤다. 그냥 이대로 편히 있고 싶었다. 기 싸움도, 그 외 어떤 거슬림도 없는 이런 순간이 영원히 지속됐으면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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