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버스킹하는 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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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노래 부르신...? 네 맞습니다. 인별에 올리게 사진 한 번만... 죄송합니다.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저 지금 갑자기 몸 상태가 별로라, 우욱, 나가봐야 할 거 같아서. 아, 네. 길 막아서 죄송해요. 아뇨, 제가 죄송합니다. 속이 별로다. 걷는다. 일단 발이 가는 대로 주욱. 도로. 인도로? 차도로? 온유야 차도로 걸으면 안 되지! 놔요. 왜 그래. 몸이 별로야? 119 부를까? 됐어요. 인도로 걸을 거니까. 지끈지끈한 머리. 웅웅, 먹먹한 귀와 아득한 시야. 눈을 감았다 뜨고 인도에 다시 올라서. 두 손에 붙잡히는 왼팔. 누가 팔짱을 끼는 거지? 윤가영. 이 년 때문이다. 확실하다. 놓으라고 했죠. 팔을 흔든다. 끈질기게 잡아온다. 어머니는 뻔뻔하게 객석을 차지한 윤가영을 보고 파리해진 안색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어쩌면 윤가영이 나와 원만한 관계를 쌓았다는 생각을 하며 모종의 배신감까지 느끼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나도 그런 게 아닌데! 팔을 다시 흔든다. 밀친다. 윤가영이 나가떨어진다. 온유야... 윤가영은 이 모든 수를 계산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에게 이혼을 부추기고 관계를 무너뜨린 다음 어머니와 나의 접점마저 자신이 메꾸며 혹시 모를 재결합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역겹다. 사람이 미소라는 가면을 쓰고 이토록 비열해질 수 있다는 게. 쏟아진다. 멀지 않은 과거에 먹고 마셨던 것들이. 허리를 굽히고 쭈구려 앉는다. 등이 쓸린다. 온유야, 괜찮아? 가요 그냥 제발.
“어떻게 두고 가, 네가 그러고 있는데.”
한 차례 토가 쏟아지고 눈물이 몇 방울 뽑혀나가고 나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거 같았다. 내 옆에 쭈그려 앉은 윤가영이 여전히 내 등을 쓸고 있었다. 불 위에 놓인 주전자라도 된듯 펄펄 끓던 머리가 갑자기 불을 끄기라도 한 것처럼 부글부글 거리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왼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그대로 윤가영의 오른 팔뚝을 잡아서 악력을 썼다.
“아... 온유야... 아파아...”
몸을 틀어 마주 보는 자세로 바꾸고 오른손으로 반대쪽 팔뚝을 잡아 힘 주었다. 윤가영의 눈썹이 한껏 쳐졌다. 움츠려진 팔뚝 탓에 g컵 가슴이 가운데로 모여 부각됐다.
“온유야... 아프다구...”
“윤가영씨.”
“윤가영씨라니이... 나 네 엄마잖아...”
더 세게 잡았다.
“윤가영씨.”
“아윽... 아파아...”
“어떻게 알고 왔어요.”
“온유 도련님... 왜 그러세요...”
“묻는 거에 대답이나 해요, 아픈 거 싫으면.”
“인별 보고 왔어요오...”
“왜 왔어요.”
“온유 도련님 보호자니까아...”
놓아주었다가 허공에서 한번 손을 털어내고 다시 팔뚝을 잡았다. 전력을 다해 쥐어짜듯이 했다.
“아파요오...”
“윤가영씨는 내 엄마가 아니에요.”
윤가영이 밭은 한숨을 뱉었다. 마구 뒤틀리는 안면 근육과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자꾸 흔들어대는 몸짓을 보면 저 입에서 나올 정상적인 소리는 비명이겠지만, 어떻게든 억눌러서 한숨으로 바꿔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고통 어린 한숨과 몸짓이 아버지를 꾀어낸 미모와 육신과 합쳐져서 야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아니 그냥 존나 야했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를 유혹하고 회유하려는 획책으로 자기 몸을 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친엄마는 아니라고 해도요오... 그래도오...”
“윤가영씨. 내 엄마는, 이름이 정 소자 연자예요. 자꾸 내 엄마인 척 하지 마요.”
“하아악... 정 소자 연자... 알겠어요오...”
“내 엄마인 척하지 말라고요.”
“아파요오...”
“대답해봐요.”
“온유 도련님 지금 왜 이리 화나 있어요...?”
왜 이리 화났냐고.
“윤가영씨.”
“네...?”
“오늘 우리 엄마가 여기 오기로 했어요. 약속은 꼭 지켜오신 어머니께서, 어떤 연락도 안 하시고 모습도 안 드러내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뭐였을 거 같아요?”
윤가영이 골몰히 생각하려 눈을 찌푸린 채 허공에 시선을 던진 게 너무 보기 싫어서, 오른손을 떼고 엄지와 네 손가락으로 양볼을 붙잡아 힘을 주어 억지로 나를 보게 했다. 어느새 윤가영의 눈에도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얼굴을 잡은 오른손을 놓고 도로 팔뚝을 잡았다.
“하악... 내가 이곳에 와서...?”
“정답. 그런데, 그걸 알았으면 왜, 왜 굳이 여기까지 기어와서, 꾸득꾸득 자리 차지하고, 우리 엄마 내쫓았냐고요, 씨발.”
“죄송해요오... 의도한 건 아녔어요... 아파요오...”
뇌의 한쪽 구석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미치도록 화났다. 어쩌면 이미 미쳤을지도 몰랐다. 아뇨. 윤가영씨는 알고 있었어요. 윤가영씨는 정확히 이 상황을 원했어요. 윤가영씨는, 오늘 우리 엄마가 그쪽 모습을 보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아서, 네가 구상하는 화목한 가정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남지 않기를 바랐어. 아녜요... 나는 그냐앙... 네 무의식이 벌인 짓이야. 네가 의식적으로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 게 사실이래도 네 무의식이 알고 의도한 거라고. 정말 아녜요... 나 그렇게 계산적이지도 않고... 지능의 문제가 아냐 이건. 이거는, 악랄함이야. 악독함이야. 척수반사적인,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본능의 영역에 있는 거야. 네가 아무리 착한 척해도 못 숨기는 악함이라고. 진짜 미안해요오... 윤가영의 두 눈에서 뚝뚝 흐르는 눈물. 몰랐어요오... 사과드릴게요... 소연씨한테 사죄를 구할 테니까아... 사죄? 네 낯짝 보는 것도 어려워서 돌아간 사람을 찾아가겠다고? 하악... 잘못했어요오... 동물들이나 아파봐야 자기 잘못인 걸 느끼지. 사람 흉내내지 마. 너 같은 건 사람 꾀는 뱀 밖에 안 돼. 하으윽... 아파요오... 말귀도 못 알아 먹는 거야? 사람 말보다 통각에 더 집중해서? 아녜요... 저 사람이에요... 뱀 아니고... 가영아. 반, 반말은 안 돼요오... 이미 반말 다 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래. 그니까아... 그럼 안 돼요오... 이온유! 어딨어?
강성연 목소리였다. 꽤 멀리서 난 듯한 소리였지만 신경이 곤두선 지금은 잘만 들렸다. 손을 놓고 일어났다.
“휴지 있어요? 물이랑.”
“아...”
자기 팔뚝을 주무르던 윤가영이 에코백을 뒤적거려서 페트병과 티슈를 꺼냈다.
“네 장 정도 뽑아줘봐요.”
“으응...”
윤가영이 떨리는 손으로 티슈를 뽑아 내게 건네주었다. 티슈를 받아 얼굴을 톡톡 두드려 눈물자국을 없앴다. 그 다음 물을 건네받고 입을 헹군 뒤 뱉고 두 모금 마신 뒤 돌려주었다.
“야 이온유! 너 찾는 사람 있어! 들어와!”
슬슬 강성연이 시야에 잡힐 듯했다.
“뒤돌지말고 그대로 쭈그리고 있어요. 그리고, 저랑 잘 해보려 하지 마요.”
“... 안 돌아볼게.”
“이이이오오온유우우!”
강성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걸었다. 곧 시야에 잡혔다.
“왜 걸어와.”
투덜댄 강성연이 내 등 뒤쪽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팔꿈치로 팔뚝을 툭 쳤다. 그제야 강성연이 같이 걸었다.
“뭐냐 저기에 내쳐져 있는 여자는?”
“몰라.”
“하.”
“하는 무슨. 모른다니까.”
“너 어떤 여자랑 같이 나가서 멀어졌다고 내가 제보를 들었는데?”
“누가 그러는데.”
“너 본 카페 직원한테 물어봤지.”
“너 지금 구라치는 거 아니냐?”
“구라 아니라고. 그래서 진짜 누군데?”
“모른다고 병신아.”
“예쁘다던데, 양다리냐? 아님 방금 찬 거야?”
이 새끼한테 무슨 말을 할까. 입을 다물었다. 양다린가 보네, 같은 개소리가 계속 들려와도 무시했다. 입이 삐죽 튀어나간 강성연이 조명이 잘 안 드는 어느 어두운 테이블에 멈춰섰다. 낮은 스테이지에선 김세은이 마지막 솔로곡을 부르고 있었다.
“데려왔어요.”
퉁명스럽게 말을 뱉은 강성연이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다른 데로 갔다.
“이온유 학생?”
앉아 있는 남자는 꽤 젊어보였다. 흰색 맨투맨에 검은 슬랙스, 그 위에 검은 블레이져를 매칭한 것만 봐도 나이 든 느낌은 아니었다. 스물 일고여덟 즈음. 많아도 서른 언저리일 것 같았다.
“네.”
남자가 오른팔을 뻗어왔다. 마주 팔을 뻗어 악수했다.
“Aou 엔터 김민준 실장입니다. 배우들이 많이 소속된 회사인데, 이번에 영역 확장을 해서 유망한 가수들도 매니지하고 있습니다. 온유 학생은 혹시...”
“아이돌이요?”
팔을 회수한 김민준이 하하 웃으며 주머니를 주섬거렸다.
“온유 학생이 원한다면 아이돌도 될 수 있겠죠. 근데 그걸 원치는 않죠?”
명함 다섯 장을 건네받았다. 왜 다섯 장인지 물으려 했는데 김민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같이 듀엣한 두 여학생한테도 제 명함 전달해줄 수 있겠습니까?”
“왜 직접 안 전해주시고요?”
김민준이 일어섰다.
“제가 지금 급히 볼 일이 생겨서요. 여기 온 목적도 달성한 거 같으니까, 가야죠 이제.”
“나머지 두 장은 설명이 안 됐는데요.”
“혹시 주변에 비슷한 사람 있으면 제 명함 넘겨주시라고 더 드린 거예요. 혹시 베이스랑 일렉 기타 친 여학생들도 노래 잘 해요?”
“잘 못 해요.”
“아쉽네요.”
“... 근데 머리 보라색으로 염색한 애는 wx 연습생이에요.”
“적어도 한 분은 기획사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네.”
김민준이 카페를 달리듯 걸어나갔다. 연락처 교환도 안 한 걸 보면 어지간히 급한 일이긴 한 모양이었다. 나를 기다린 것도 많이 양보한 것 아닌가 싶은 정도로. 동시에 자신감의 표출인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내가 선연락을 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고 해야 하나. 폰을 꺼내서 구글에 Aou 엔터를 쳐보는데 머리가 다시 지끈거려왔다. 다시 폰을 집어넣고 김민준이 앉은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관자놀이를 눌렀다.
“선배. 저 앉아도 돼요?”
고개를 드니 서유은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앉아 있고 서유은이 서 있는데도 눈높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어. 앉아.”
서유은이 맞은편에 앉았다.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거예요?”
“조금.”
“근데도 노래는 진짜 컨디션 완벽한 사람처럼 잘 부르셨어요. 완전 프로.”
서유은이 선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 바닥을 치던 기분이 뭉그러졌다.
“어. 선배 조금 웃으셨다.”
“아닐걸.”
“아뇨오. 입꼬리 살짝 올라가는 거 저 봤는데?”
서유은이 미소지었다.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봐요. 웃으시는데.”
“네 덕분에 지금 웃을 수 있네. 고마워.”
“병원 안 가셔도 돼요?”
“안 가도 돼.”
“1분 있다가 밖으로 나와.”
작게 들렸지만, 분명 김세은 목소리였다. 뒤돌아보니 김세은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만 들리게 조용히 말하고 나간 모양이었다.
살짝 소름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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