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버스킹하는 날 (2)
* * *
머리를 식히려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시키고 창밖을 마냥 바라봤다. 대놓고 꾸며 입은 여자 둘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내가 멍 때리고 있어서 아이 컨택을 조금 오래해버렸다. 눈을 마주친 사람이 천천히 눈을 크게 뜨더니 옆 사람의 어깨를 팍팍 쳤다. 옆 사람도 나를 봤다. 저들끼리 수근댔다. 뭔가 상황이 익숙했다. 핸드폰을 꺼내 스케줄 앱을 키고 거기에 집중하는 척했다. 카페 문이 열렸다. 주변시야로 아까 눈이 마주친 여자 일행이 들어온 걸 파악했다.
“주문 도와드릴게요.”
“아, 저 뉴욕 치즈케익이랑...”
느낌상 음료 주문을 하면서도 계속 내 쪽을 흘깃거리는 거 같았다. 보통 저러면 직접 수고롭게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어서 불안했다. 아무한테나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아침이니까 전화 걸 명분이 있어야 되는데. 통화 기록을 살피다 서유은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서유은한테 전화 걸었다. 웬일로 바로 받았다.
ㅡ네 선배.
“어 유은아. 일어났어?”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뒤돌아봤다. 여자 일행이 나랑은 거리가 좀 있는 테이블에 가 앉았다. 다행이었다. 이제 목소리를 좀 작게 내면 될 거 같았다. 연인과 조용조용 둘만의 얘기를 나누는 사람처럼.
ㅡ네.
“오늘 버스킹하는 날이잖아.”
ㅡ네.
“대답 꼬박꼬박 안 해도 돼. 아무튼. ‘Sunday’랑 ‘내 손을 잡아’ 네가 해야 하는 거 알고 있었어?”
ㅡ정말요?
“아예 모르고 있었어?”
ㅡ아뇨아뇨. 아까 세은 언니한테도 문자 받았고, 월요일부터 말로 들어서 가능성은 있다고 알고도 있었는데, 실감은 전혀 안 났어서, 지금 그게 진짜라고 선배한테 육성으로 들으니까 또...
“얼떨떨해?”
ㅡ네! 그 말이었어요!
피식 웃었다. 서유은은 사람이 뿜는 바이브가 긍정적이라 그냥 얘기만 나눠도 기분이 좋아졌다.
“컨디션은 어떻게 좋은 거 같아?”
ㅡ네 저 괜찮아요. 완전 좋아요.
“잠은 얼마나 잤어? 지금은 괜찮아도 시간 지나면 졸려서 하루 망치기도 하잖아.”
ㅡ어, 사실 잠은 조금 못 잤어요.
“그래? 얼마나 잤는데?”
ㅡ저 네 시간 잤어요. 자려고 했는데, 어렸을 때 소풍 가기 전날처럼 가슴 쿵쿵 뛰어서, 아 이거 가라 앉을 때까지 핸드폰 잠깐 만질까, 하다가 새벽 동안 계속 해가지구, 결국엔 네 시간 밖에 못 잤어요.
“그 정도면 지금 컨디션 좋기도 힘들 텐데.”
ㅡ으음. 사실 완전 최고는 아닌데 그래도 괜찮아요.
“그냥 더 자. 어차피 밤에 하는 거니까 지금 자야 맘 편해. 이따가 내가 전화 걸어서 깨워줄게.”
ㅡ진짜요?
“응. 몇 시에 깨워줄까?”
ㅡ저 그럼 11시에 깨워주세요. 근데 저 이런 거 처음 받아봐요!
“나도 사실상 처음 해주는 거 같은데.”
ㅡ오 그럼 서로 처음이네요?
아닌데. 난 아홉 시 반에 김세은한테 모닝콜 할 건데.
“그런가?”
ㅡ헤헤. 근데 이런 거 처음은 여자친구한테 해줘야 되는 거 아니예요?
“모닝콜 알바도 있다던 거 같은데. 꼭 그런 사람한테 해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ㅡ그래도 선배 미래 여자친구분한테 제가 좀 죄송해져서요.
“음. 내가 모닝콜해주는 게 부담스러운 거야?”
ㅡ아뇨오? 좋은데, 그냥 진짜 약간 죄악감 든다고 해야 되나...
“뭐가?”
ㅡ처음을 뺏는 거나 다름 없잖아요. 미래의 여친분한테는 그런 거 되게 소중할 건데.
“아냐. 괜찮아. 자기나 해. 너 계속 전화 붙잡고 있으면 올 잠도 안 와.”
ㅡ그럼 저 진짜 자요? 선배 첫 모닝콜 제가 뺏어가요?
“어 가져가.”
ㅡ네. 잘 자요. 아니다. 잘 잘게요.
“응.”
ㅡ아 선배애... 웃지 마요오...
“안 웃을 수가 없잖아.”
ㅡ아흐으... 저 잠 다 다라나써요...
소리가 묻혀서 들렸다. 아마 베개에 얼굴을 푸욱 담그고 우물대는 모양이었다.
“잘 자.”
ㅡ못 잔다구요오...
“열한 시에 전화 걸게?”
ㅡ... 네에...
“끊어.”
ㅡ네 선배...
전화가 끊겼다. 참으려고는 해봤는데 끝까지 웃음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놀리는 맛이 있었다. 아니 있는 수준을 넘어서 놀리기 엄청 좋았다. 하루종일 놀려도 안 질릴 듯했다. 서유은한테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그 사람은 아마 만날 때마다 어떻게 놀려 먹을지를 구상하고 데이트하러 가지 않을까. 머리를 짜내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치고 그게 사실 지어낸 얘기였다고 나중에 밝힌다거나 해서, 그걸 진짜인 줄로 철썩 같이 믿고 진지하게 들어주다가 거짓임을 밝히는 순간 ‘네?’하고 얼빠진 소리를 낸 뒤 곧 허망한 표정을 짓는 서유은을 보면서 웃고, 그 웃음에서 자기가 놀림감이 됐다는 걸 실감하고 부들부들대는 걸 구경하는 식으로.
그냥 상상만 해도 웃겼다. 사실 지금 남자친구가 아닌 나만 해도 서유은을 어떻게 놀려 먹으면 좋을지 그 최적 절차를 구상하고 있으니 서유은이 얼마나 놀리기 좋은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어느새 심란함이 가셨다. 문득 미래의 서유은의 남자친구가 부러워졌다. 왠지 모르게 서유은을 봐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왜일까 잠깐 생각해봤는데, 버스킹을 위해 서유은과 마지막으로 합을 맞춰봐야 하기 때문이라는 합리적인 이유가 떠올랐다. 김세은과는 여러 번 호흡을 맞춰봤지만, 서유은과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리허설을 해봐야 하기에 그런 느낌이 든 것이었다.
집에서 기타를 챙길까 아니면 밴드부실에 둔 기타를 쓸까. 굳이 집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리가 더 좋은 건 집에 있는 기타였다. 이수아한테 카톡을 보냈다.
[집이냐?]
곧장 답장이 왔다.
[ㅇ]
[둘 나갔냐?]
[ㅇ]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따구로 단답하냐?]
[ㄴ]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단답충 죽여버리고 싶다]
[문 잠금 ㅅㄱㅂ]
[열쇠 있음 ㅅㄱ]
[내 방문 잠그면 그만임 ㅅㄱㅂ]
[마스터키 쓰면 됨 ㅅㄱ]
[그런 게 있다고?]
전화가 걸려왔다. 이수아였다.
“왜.”
ㅡ마스터키가 왜 있어? 아니 있을 수는 있는데, 왜 엄마랑 나는 몰랐어?
“거짓말이었는데.”
ㅡ아 개새끼.
전화가 끊겼다. 사실 마스터키는 있었다. 이수아는 이상하게 내 말을 곧이곧대로 잘 믿었다. 다른 사람 말도 이런 식으로 잘 믿으면 대학생 즈음 됐을 때 사이비 종교에 몸을 담그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내가 걱정해줄 바는 아니지만, 가족이 된 이상 이수아가 나쁜 길로 빠지면 나까지 엮일 수도 있어서 그런 상황이 안 벌어지도록 어느 정도 내가 통제해줄 필요가 있었다.
카페에서 시간을 떼우고 집쪽으로 느리게 걷다 보니 어느새 김세은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전화 걸었다. 신호음이 별로 안 들렸는데 전화가 연결됐다.
“세은아. 일어났어?”
ㅡ으응. 흐아...
김세은이 기지개를 키려 핸드폰을 내려놓았는지 소리가 조금 멀게 들렸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는지 소리가 크게 들렸다.
ㅡ계속 얘기해줘. 잠 깨게.
“모닝콜 처음해보는 거라 무슨 말 해야 될지 모르겠어.”
ㅡ그냥 아무 말 해. 기왕이면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거로. 밖에 있으면 날씨 얘기도 해주고. 그러면 돼.
“응. 오늘 날씨 되게 좋아.”
ㅡ풋. 뭐야 그게. 뭐가 어떻게 좋은지, 옷은 얼마나 따뜻하게 입어야 될지 알려줘야지.
“음. 오늘 구름도 별로 없어서 되게 화창해. 춥지도 않고. 긴팔에 안 두꺼운 외투 하나 걸치면 될 정도. 그런데 지금은 이래도 밤 되면 또 추워질 수 있을 거 같애.”
ㅡ좋아. 그런 식으로.
“아, 생각이 안 나. 여기서 어떻게 이어 가?”
ㅡ풋. 그냥 평소대로 얘기해. 그럼 돼. 모닝콜이라고 뭐 다른 줄 알아?
“몰라. 좀 어색해서 머리에 할 말이 안 떠올라.”
ㅡ됐어. 이 정도면 잠 깼으니까.
“그래? 그럼 다행이네.”
ㅡ너 점심 뭐 먹을 거야?
“글쎄. 고민 중.”
ㅡ밖에는 왜 나와 있었어?
“커피 마시려고.”
ㅡ그냥 딱 그거 하나 때문에?
“응.”
김세은이 웃었다.
ㅡ아침은 어떡했고?
“토스트 먹었어.”
ㅡ으응. 너 나가는 거 엄청 좋아하는구나.
“뭐... 그렇지?”
ㅡ히힣. 잘 됐다.
“왜 이리 좋아해.”
ㅡ나도 나가는 거 좋아하니까. 나중에 맨날 같이 여행 다니고 할 생각하니까, 그냥 막 좋아서.
“여행하면 해외 여행?”
ㅡ응. 사람들이 모르는 데로. 그때 쯤이면 국내엔 우리 알 사람 많아질 거잖아.
“... 그렇겠지.”
ㅡ히힣. 사랑해 이온유.
“사랑해 세은아.”
ㅡ오늘 약속 만들어 놓은 거 없지?
“응.”
아직은.
ㅡ세 시 쯤에 다시 전화할게?
“어. 사랑해.”
ㅡ응. 사랑해. 끊을게.
“응.”
전화가 끊겼다. 피곤했다. 김세은이 미래의 우리를 얘기할 때마다 중압감이 심하게 느껴졌다.
김세은은 사랑을 양자 간의 희생과 옥죔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교우 관계를 희생한 만큼 나도 희생하기를 바라면서 현재부터 미래의 시간까지 모두 소유하려 드는 것을 보면 그랬다.
아마 김세은은 결혼 반지의 의미를 선이 이어지지 않은 수갑처럼 생각하는 것 아닐까. 그걸 끼는 순간부터 반지를 공유한 둘은 항상 이어져서 시공간적으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져서는 죽어도 안 된다는 망상을 하는 것 아닐까.
만일 사랑이 실제로 그런 것이라면 나는 김세은을 사랑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나는 김세은이 내게 하는 것처럼 김세은을 옥죄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김세은을 남에게 빼앗기거나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게 구속하고 싶다는 것과 동등한 의미를 갖지는 않았다.
그러니 김세은이 틀린 거였다. 김세은이 틀린 거여야 했다. 나는 김세은을 사랑해야 했으니까. 김세은이 생각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나는 김세은을 사랑하지 않는 게 되니까 그런 상황을 피하려면 김세은이 틀려야 했다.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었다. 내가 지금 확실하게 안 것은 하나 뿐이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