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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37화 (37/438)

〈 37화 〉 버스킹하는 날 (1)

* * *

토요일 새벽 5시 37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상체를 일으킨 뒤 마른 세수를 했다. 화요일부터 오늘까지 새벽에 나와서 계속 썼으니까, 닷새인가. 그 짧은 동안 찜질방이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욕탕에서 느껴지는 사람들 시선 때문에 원래 이런 데를 잘 다니지 않았는데, 그런 만큼 생소하게 느껴져서 여행이라도 온 느낌도 들었고. 며칠 더 쓰면 또 금방 싫증이 날지도 모르지만 일단 여지껏 잘 썼다는 데에서 크게 만족스러웠다.

오늘 있는 버스킹을 위해 잠을 보충할 때 땀을 조금 흘려서 바로 욕탕으로 들어갔다. 내 하반신으로 흘깃흘깃 시선이 따라 붙었다 떨어졌다. 이젠 나도 반쯤 포기해버려서 차라리 즐겨야 하지 않나 싶었다.

여유 있게 씻고 말린 뒤 밖으로 나왔다. 6시 29분이었다. 공기가 쓸쓸했다. 배가 출출했다. 토스트 두 개로 대충 떼우면서 폰을 봤다. 컨디션 조절하라고 너나할 것 없이 서로 신신당부한 것이 무색하게 밴드부 단톡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메시지도 조금 쌓여 있었다. 가장 문제인 것은,

[문자 보자마자 전화 걸어.]

라는 문자를 6시 25분에 보내 온 김세은이었다. 뭐하느라고 지금 깨어 있었을까. 그리고 보자마자 전화하라고 한 이유는 뭐였을까. 먹으면서 전화하면 목이 막힐까봐 일단 다 먹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자다 깬 사람인 척 목소리를 살짝 긁었다.

“여보세요.”

ㅡ응.

김세은의 목소리가 낮았다. 아침이라 잠긴 건가.

“왜 깨어있어? 지금이 몇 신데.”

ㅡ스케줄이랑 이것저것 때문에.

“밤샌 건 아니지?”

ㅡ안 샜어. 여섯 시간 잤어.

“더 자. 피곤할 건데.”

ㅡ안 돼.

“뭐가 안 되긴 안 돼.”

ㅡ엉성하게 자다 깨면 컨디션 더 떨어진단 말야. 잘못하면 생활 패턴도 망치고.

“여덟 시까지 자. 내가 모닝콜해줄게.”

ㅡ그럼 나 진짜 자?

“자. 그냥 아홉 시까지 자.”

ㅡ... 너 왜 나 재우려고 해?

김세은의 목소리가 갑자기 표독스러워졌다.

“너 걱정 돼서 그러지. 너 지금 목소리 잠긴 것도 그렇고.”

ㅡ으음...

“자.”

ㅡ알겠어. 아홉 시에 전화해.

“응. 사랑해 세은아.”

ㅡ나도 사랑해 이온유. 끊을게.

“응. 사랑해.”

ㅡ히힣. 나두. 진짜 끊을게.

전화가 끊겼다. 김세은은 요즘따라 날카로워졌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무슨 숨은 의도가 있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티를 팍팍 냈다. 내가 대놓고 ‘나 의심하는 거냐’라고 물으면, 그런 적 없다고, 그런 거 아니라고 발뺌하긴 하는데, 솔직히 모르는 게 병신인 수준이었다.

무슨 결혼한 사이인 것도 아니고. 김세은은 나를 너무 조이려 들었다. 내가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죄를 짓기라도 할 것처럼.

밖에 나와 조금 걸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벨이 울리는 걸 보면 전화가 온 거였다. 핸드폰을 들었는데, 또 김세은이었다. 조금 질렸다.

“어.”

ㅡ내가 왜 전화했는지 얘기 안 해줬잖아.

“응.”

ㅡ근데 왜 안 궁금해했어?

“... 너 지금 나한테 그거 따지는 거야?”

ㅡ따지는 건 아냐.

“너 피곤한 거 같아서 더 자라고 한 거야. 네가 급한 이유로 전화한 거였으면 바로 말했을 거라 생각했고, 너 자겠다는데 굳이 붙잡는 건 아니다 싶어서 안 물어본 거고. 내 나름대로 너 배려해준다고 생각 열심히 하고 말한 건데, 그러면 나 서운해.”

ㅡ... 너 지금 밖이지.

“어.”

ㅡ방금 깬 거 같았는데, 준비 되게 빨리 했나 봐?

“... 그게 중요해?”

ㅡ나 속인 거잖아.

“... 미안해.”

ㅡ왜 속이는데. 나한테 아무 것도 얘기해주기 싫어? 내가 귀찮아? 얘기해. 안 귀찮게 해줄 테니까.

“세은아...”

ㅡ일요일에, 내가 너 때매 어지럽다고 했잖아. 내가 왜 그런지 인터넷으로라도 찾아봤어?

“...”

ㅡ사후 피임약 부작용이야. 내가 먹는 피임약으로는 피임 완전히 안 돼. 첫 달은 이중 피임해야 된대. 연애하는 건 못 알리겠으면서 임신시키고는 싶어? 사후 피임약은 콘돔이나 배란조절형 피임약처럼 못 구해. 다른 건 아는 거 많으면서 넌 왜 성지식만 부족해?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지 알아? 너 이미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나 생각 안 하고 그 순간을 즐기려고, 그 이후의 일은 다 내가 감당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까지 생각 들었어. 근데 네가 그렇지는 않잖아...? 넌 그냥 그쪽에서만 바보인 거잖아...? 응...?

김세은이 울먹였다. 조리 있지 않은 언어 구조가 김세은의 혼란을 그대로 드러냈다. 답답했다. 신호등이 두 번 바뀌었다.

피임약을 먹어서 배란이 멈추면, 아예 임신이 불가능해지는 거 아닌가. 임신 확률이 어떻게 존재한다는 거일까.

ㅡ왜 말 안 해...?

김세은이 한 말의 가부를 따지기 이전에,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사실은 김세은이 사후 피임약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김세은을 불안하게 만들고, 김세은이 그런 행동을 취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나는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미안해. 내가 바보였어.”

ㅡ그치...? 네가 거기에서만 바보였던 거지...? 너 나 사랑하지...?

“사랑해. 사랑해 세은아.”

ㅡ난, 난 진짜 너 사랑해... 너무 사랑해서, 지금 너 힘들게 하는 내가 미울 정도로... 그만큼 사랑해... 사실 그것보다 더 사랑해... 말로는 못 전해...

“...”

ㅡ넌, 나 사랑하지...? 나만큼은 아니어도, 사랑은 하지...?

“사랑해.”

ㅡ나 귀찮아하지 마... 귀찮은 사람, 되기 싫어... 같이 있고 싶은, 윽, 사람 되고 싶어... 기다리고 싶은 사람, 되고 싶어... 네가 나한테는, 흡, 그런 사람이란 말야...

“울지 마. 미안해. 사랑해 세은아.”

ㅡ흑, 읏, 히끅, 흡.

“울음 멈춰.”

ㅡ풋. 지금, 히끅, 농담하는, 거야?

“너 울면 나도 힘들단 말야.”

ㅡ그럼, 윽, 울리지 마.

“잘 할게.”

ㅡ흣, 꼭, 이야.

“약속할게.”

김세은의 울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ㅡ나 딸꾹질, 히끅, 멈출 때까지, 사랑한다고, 윽, 말해줘.

3초 정도씩 틈을 두고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김세은이 걷는 소리가 들렸다. 컵에 물이 차는 소리에 이어 김세은이 물을 꾸울꺽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멈췄어?”

ㅡ아니. 히끅.

“억지로 낸 소리지.”

ㅡ히끅. 아닌데.

“너 연기 못한다.”

ㅡ다 잘할 순 없잖아.

“신이 조금은 공평하네.”

ㅡ웃지 마.

“왜. 너 귀여워서 그러는 건데.”

ㅡ나 바보 같아서 웃은 거 아냐?

“누가 너한테 바보 같다 그래? 누구야?”

ㅡ아냐. 그런 사람 없어.

“그럼?”

ㅡ울다 웃었으니까, 나 엄청 바보 같지 않아?

“아냐.”

굳이 따지자면 사랑스러웠다.

ㅡ어떻게 증명할 건데.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김세은은 기분 전환이 너무 빨랐다. 조울증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평소에는 무미하다 싶을 정도로 건조한 김세은이 나를 대할 때만 이렇다는 것을 상기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발기해버렸다. 주머니에 왼손을 넣어 자지를 억눌렀다. 미칠 것 같았다. 요즘따라 자지가 말썽이었다. 김세은이랑 섹스라도 하지 않는 이상 자지는 이런 식으로 수시로 날뛸 듯했다.

“마음은 말로 못 전달하는데.”

ㅡ응. 합격.

“제가 어떻게 합격한 거죠?”

ㅡ내 말 귀담아 들었다는 거고, 센스 있게 인용했으니까.

“감사합니다.”

ㅡ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세요?

“네.”

ㅡ히힣.

“너 진짜 귀엽다.”

ㅡ귀여워?

“응. 근데 전화 건 이유는 뭐야?”

ㅡ으응. 지금 내 목소리 들리지.

“어.”

ㅡ나 감기 아직 안 떨어져서, 유은이랑 노래 나눠서 부르기로 했어.

“아. 그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너 없는 동안 연습할 때 서유은이 너 대신 보컬한 게 네 조 연습시킨 게 아니라 서유은 연습시킨 거였어?”

ㅡ혹시 모르니까 대비용으로? 그리고, 우리 조 연습시킨 것도 맞지.

“똑똑하네. 근데 얼마나 분배하기로 했는데?”

ㅡ솔로는 ‘Sunday’랑 듀엣은 ‘내 손을 잡아’.

“다른 건 다 할 수 있어?”

ㅡ응.

“진짜 괜찮은 거지?”

ㅡ괜찮아. 노래할 때 목소리는 비슷하게 낼 수 있어.

“응? 난 너 걱정한 건데.”

ㅡ난 또. 그건 당연한 거니까 버스킹 얘기하는 줄 알았어.

“지금 너 진짜 보고 싶다.”

ㅡ왜?

“안아주게. 너무 귀여워서 못 참겠어.”

ㅡ히힣. 그럼 버스킹하러 가기 전에 우리 먼저 만나자.

“몇 시에?”

ㅡ몰라. 점심 먹고 나서 3시 쯤에 전화할게. 뭐 약속 만들면 안 돼.

“응.”

ㅡ사랑해.

“사랑해.”

ㅡ끊을게? 나 아홉시 반에 깨워줘야 돼?

“응. 사랑해 세은아.”

ㅡ나도 사랑해.

전화가 끊겼다.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고 나서부터 김세은과 통화하는 건 꽤 심력을 소모했다. 롤러코스터 같았다. 서서히 감정이 올라갔다가 어느 순간에 가파르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은 지나고 나면 또 금방이고,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웃을 수 있었다.

사랑은 격정이었다. 사람을 쉽게도 휘둘렀다. 어머니도 사랑에 휘둘리다 기운이 빨려나갔고, 김세은도 나와 관련되기만 하면 도통 자신을 주체하지 못 했다. 사랑이라는 게 정말 이런 면모만 있는 거라면, 나는 차라리 사랑하지 않고 사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사랑하지 않고도 김세은을 아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아껴준다는 게 진짜 사랑 아닐까.

어려웠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랑은 쉬운 게 결코 아닌 듯했다. 사랑은 정의내리기조차 힘들었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만져서 부분부분을 알아갈 수밖에 없는 거대한 흉상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은 추한 면밖에 느끼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이것이 결국엔 그 추하다고 여겨진 요소마저 궁극적으로는 미적이게 되는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것이며, 또 그 모습을 내게 보여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 날이 한 시 바삐 와서 김세은과 나의 사이를 견고히 해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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