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34화 (34/438)

〈 34화 〉 귀가

* * *

“학생.”

등받이에 편히 기댄 채 메신저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택시기사 아저씨가 불렀다.

“네?”

“그...”

아저씨가 핸들을 안 잡은 오른손으로 괜스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여자애들은 선물로 무얼 받고 싶어하는지 알아요? 제 막내 딸내미가 이제 고등학교 막 올라갔는데, 뭘 선물로 줘야 될지 도통 모르겠어서.”

“따님 취향이야 기사 아저씨께서 더 잘 아시는 거 아녜요?”

“아니 그 애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서요. 무슨 아이돌이나 연예인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슨 책 읽기 같은 눈에 보이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거 같고.”

“평소에 그냥 핸드폰만 하는가봐요?”

“그쵸. 그런 거 같애. 그래서 문제예요 지금.”

“그럼 그냥 돈으로 주셔요.”

“하아...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감. 근데 그럼 또 얼마 안 쥐어주면 마음 팍 상할 것도 같고.”

“돈 조금 줬다고 마음이 상해요? 진짜 그럼 저한테 얘기해요. 대신 혼내드릴 테니까.”

“아학학. 진짜 혼내줄 수 있어요 학생?”

교통신호에 걸렸다. 정차한 아저씨가 갑자기 정면 주시는 안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뭔데 이 아저씨는 또.

“네?”

“고등학생이죠 학생?”

“네.”

“인터넷에 영상도 몇 개 올리셨고.”

“... 네.”

“거 연락처 좀 줄 수 있어요?”

시발 택시기사 아재한테 번호를 다 따여보네.

“왜요?”

신호가 바꼈다. 택시가 다시 움직였다.

“아니, 우리 차녀가, 얘 나랑 동갑인데 엄청 멋있지 않느냐면서, 막 학생이 노래 부르는 영상을 보여줬단 말예요. 학생이 차에 타고 나서 왠지 모르게 익숙해가지고 말 걸어봤는데,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아 뭔가 알 것 같은데’ 하더라니, 그 영상 속 주인공을 내가 태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제가 연예인도 태워보고 했는데, 학생은 얼굴이 막 ‘내가 난 놈이다’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거 같다는 느낌이 팍 들어서, 아 언제 티비에서 한 번 봤는갑다 했는데 그 영상 속에 학생이었던 거지. 어우, 흥분해서 말이 막 이상하게 나오네.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죠? 암튼. 솔직히 말해서, 학생 번호 저장해뒀다가, 나중에 차녀랑 협상하거나 할 때 조커로다가 쓰려고요. 물론 학생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 웬만하면 안 쓸 거예요. 진짜 최후의 방법으로 가지고만 있을라고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줄 수 있으면 줘요. 대신, 학생은 택시 탈 일 있으면 저 막 불러요. 지금 찍은 데 집주소 맞죠? 택시 주로 모는 데도 마침 근처인데 전속기사처럼 바로바로 가서 태워드릴 테니까.”

“...”

헛웃음이 나왔다. 완전 막무가내이면서 이상하게 밉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소수 존재하는데, 그게 딱 이 아저씨였다. 이 쾌활함과 붙임성이 유전으로 넘어갔다면 딸들도 만나기에 썩 유쾌한 사람들일 것이 분명했다.

“역시 부담되죠? 안 줘도 돼요.”

“아뇨 드릴게요.”

“오 진짜요? 그럼 여기 포스트잇이랑 볼펜 있으니까 거기다 적어줘요. 이름이랑.”

진짜로 적었다. 이런 인연들을 다 쳐내면 삶이라는 게 무미건조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너무 충동적인 거 아닌가도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미 준 이상에 후회하는 게 더 미련한 것 같아서 그냥 이야깃거리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기 차녀가 막내딸이랑은 다르게 연예인에 관심이 많아서 방송일에 뛰어들려고 한다는 등, 아저씨의 tmi 공세를 듣고 있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다다랐다.

“진짜 고마워요 온유 학생. 이런 행운이 다 있네. 가수 될 거죠? 학생 노래 엄청 잘 부르니까 금방 유명해질 거예요.”

“아 네 감사합니다.”

“택시 탈 일 있으면 준 번호로 전화해요. 공짜로도 태워다 드릴라니까는.”

“네. 안녕히 가세요.”

“언제 다시 또 봐요.”

택시가 떠나갔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다가 집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전등이 많은 집은 창도 널찍한 게 많이 있어서 어두운 밤에도 마냥 밝았다. 나는 이 인공조명의 억지스레 찬란한 백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그리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윤가영이 온 이후로는 이게 그토록 불쾌했다.

그래도 돌아가야 했다. 대문을 열고 집 문 앞까지 옮기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신발을 반쯤 벗은 상태로 하고 집 문을 열었다. 신발을 털어내듯이 벗고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가려했는데, 현관에 금방 씻은 듯 수건을 목에 걸치고 머리를 부비며 말리던 파란 파자마 차림의 윤가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손을 양옆으로 뻗고 싱글싱글 미소 지으며 나를 보는 게 내가 오는 걸 벼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온유야.”

“...”

여기서 밀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려다가 등에 밀착해서 가슴으로 공격하는 윤가영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게 뻔했다. 대충이라도 대꾸해줄 수밖에 없었다.

“뭐요.”

“뭐하다 왔어?”

“친구 만나서 저녁 먹고 놀다 왔는데요.”

“뭐하면서 놀았어?”

“... 노래방 갔어요.”

“으음. 오늘 나가기 전에 수아랑 영화 봤다면서?”

“네.”

윤가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 제스처는 자기가 말 끝내고 싶어지기 전까지 절대 안 비켜주겠다는 뜻이었다.

“무슨 영화?”

“이수아가 얘기 안 해줬어요?”

“해줬지.”

“근데 뭐요.”

“온유 입으로 듣고 싶어서.”

연한 분홍빛의 입술을 보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코앞까지 다가서서 내려보았다.

“비켜요.”

“말해줘.”

“록키. 비켜요.”

“록키. 엄청 옛날 영화잖아. 나도 안 본 건데. 뭐야 이거?”

윤가영이 오른손을 내게 뻗었다. 외투에서 뭘 집은 윤가영이 검지와 엄지를 올려 보여주었다.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 김세은의 것. 윤가영이 그 머리카락을 자기 눈 앞에 두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등골이 쭈뼛해졌다.

“엄청 길다. 염색도 흔치 않은 색으로 했구... 지하철 타고 왔어?”

“... 네.”

“대답이 늦네? 음. 연예인도 이런 염색은 잘 안 할 건데. 그런 사람도 지하철을 타나?”

“...”

윤가영이 머리카락을 손에서 굴려 동글동글하게 만들고 주먹을 쥐어 그 안에 담았다.

“그 머리카락은 뭐하게요.”

“응? 버려야지.”

“...”

“온유도 영화 좋아하나봐?”

“네.”

“그럼 언제 우리 수아랑 나랑, 너랑 너희 아버지랑 다 같이...”

“선 넘지 마세요.”

윤가영의 오른팔을 잡아 끌어 내리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균형을 잠시 잃은 윤가영이 곧장 다다다 뛰어와 뒤에서 나를 껴안아왔다. 미친 년. 윤가영의 파자마와 내 외투를 넘어서 느껴지는 무지막지한 가슴이 자지에 신호가 가게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최대한 억눌렀다.

“놔요.”

“나 온유랑 친해지고 싶은데.”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그냥 놓으라고요.”

윤가영이 나를 안은 팔을 더 세게 조여왔다. 가슴이 등에서 더 짓눌려오는 게 느껴졌다. 미친 년. 힘으로 팔을 뜯어내고 뒤돌아서 두 손목을 낚아채 악력을 썼다. 항상 미소만 씌워져 있던 윤가영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 미묘한 변화에 나는 크게 기뻐했다. 윤가영이 손목을 털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만 흔들릴 뿐이었다. 작게 찌푸려진 얼굴과 결합되니 마치 앙탈을 부리는 거 같았다. 나보다 열네 살 많은 년이. 존나 조그만해 가지고.

“온유야... 아파...”

상체를 기울여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세가 이러니 내가 윤가영을 훈육하는 어른이라도 된 거 같았다.

“내가 선 넘지 말랬죠.”

“왜 그래... 나 그래도 네 엄마잖아...”

“그쪽이 내 아빠랑 떡쳐서 내 엄마인 거면, 내가 그쪽 따먹으면 내가 이수아 아빠되게요?”

윤가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얼굴이 전에 본 적 없이 마구 일그러지는 게 썩 보기 좋았다. 윤가영의 앙탈이 거세졌다. 발기했다. 소리 없이 웃었다.

“온유야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진짜 왜 그래...”

“원래 이런 애 맞아요. 그런 식으로 계속 밀어붙이면 이래요.”

손을 놓아주었다. 윤가영의 손목에 빨간 자국이 선명했다.

“또 선 넘으면 나도 내가 뭐할지 몰라요.”

“...”

윤가영을 뒤로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바로 샤워실로 직행했다. 발기가 도통 풀릴 생각을 안 했다. 김세은을 따먹은 기억을 살려서 자지를 달래려 했다. 잘 안 됐다. 보지랑 손은 느낌이 너무 달랐다. 눈을 감고 압력을 최대한 줘서 자지에 자극을 주었다. 김세은의 신음을 되새겼다. 김세은의 흐트러진 얼굴과 빨갛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떠올렸다. 김세은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김세은이 한 말을 곱씹었다. 김세은은, ‘하루종일 쑤셔대도 처음 따먹힐 때처럼 꼭꼭 조이는 세은이 보지, 월요일 직전까지 자지 박아서 자궁에 빈 자리 없게 정액 가득 채워 넣어주세요’, 라고 했다. 아직 뭔가 모자랐다. 사정할 줄도 모르면서 가라앉지도 않는 자지가 괜히 미워졌다. 김세은의 얼굴에 정액을 뿌리는 상상을 했다. 이건 꽤 효과가 있는 듯했다. 사정감이 몰려왔다. 갑자기 김세은의 얼굴이 윤가영의 얼굴로 뒤바뀌었다. 사정했다. 씨발. 미친 년. 미친 새끼. 자지를 닦아내고 몸을 씻어냈다. 나는 더러웠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주방으로 갔다. 테이블 앞에 앉아 베라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숟가락으로 퍼먹던 이수아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냉장고를 열어 바나나 우유를 찾으며 말했다.

“뭘 꼬라보냐?”

“너 울 엄마랑 뭐 얘기 안 했냐?”

“록키 봤다 했는데. 뭐.”

“더 말한 거 없어?”

“어.”

“알겠다.”

“개 싱겁네.”

“...”

이수아가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계속 주방에 있다가는 아버지나 윤가영과 마주치게 될 거 같아 빨리 방으로 피신했다. 우유를 따서 들이켰다. 왜 하필 사정 타이밍에 윤가영이 떠올려졌을까. 아무래도 현관에서 등짝에 맞닿아 온 그 흉악한 가슴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죄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무죄였다.

불 끄고 침대에 누워 밀린 메시지들에 대충 답장하고 폰을 충전기에 두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김세은이었다.

ㅡ온유야 나 어지러워...

목소리가 안 좋았다. 상태가 영 별로인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왜 그래? 많이 아파? 감기 때문에 그래?”

ㅡ아니이... 너 때문에 조금 어지러워...

장난치는 건가. 감이 안 왔다. 어쩌면 진짜 아프면서 장난기 있게 넘기려는 걸 수도 있었다. 그냥 진지하게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냐? 왜 나한테 전화했어?”

ㅡ으응... 아냐. 괜찮아. 병원 가야 되는 건 아냐.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었어.

“내 목소리 들으면 나아져?”

ㅡ조금 그런 거 같애.

김세은이 메마르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우욱, 하고 헛구역질하는 소리도 작게 들렸다.

“너 진짜 괜찮아?”

ㅡ하아... 응. 나 괜찮아.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서 가슴만 답답해졌다.

ㅡ됐구, 얘기해줘.

“뭘?”

ㅡ네가 오늘 많이 한 말 있잖아.

“... 사랑해 세은아.”

ㅡ나도 사랑해.

“... 또 해줘?”

ㅡ응.

“사랑해 세은아.”

ㅡ히힣. 나도 사랑해 이온유. 이제 좀 나아진 거 같애. 고마워. 전화 끊을게. 잘 자. 내일 학교에서 봐.

“응. 내일 봐. 잘 자.”

전화가 끊겼다. 만났을 때는 감기가 심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왜 갑자기 어지러움증을 호소하고 의사도 아닌 나한테 전화를 걸었을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내려놓았다.

도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항상 자기 전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피곤해질 때까지 몸을 굴려야 생각 없이 바로 잠들 수 있었는데, 낮잠까지 자버린 오늘은 그렇지도 못했다.

부모님과 함께한 옛추억부터 오늘 기억까지 구분 없이 난잡하게 머리를 채웠다. 그러다가 수마가 몰려와 전신에 감각이 하나씩 박탈당하는 느낌이 드는 순간, 문득 김세은의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는데, 그때 정말 왠지 모르게, 김세은한테 미안해졌다. 많이, 많이 미안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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