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김세은이랑 쇼핑하고 영화보러
* * *
스테이크 한 점을 포크로 찍고 있는데 테이블이 작게 진동했다. 김세은이 내 폰을 들었다. 김세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수아가 누구야?”
아. 금요일에도 이러더니 또 그러네. 얘는 눈치가 없나? 아님 나 좆 같으라고 이러는 건가?
“아는 사람.”
“저녁 시간대에 전화를 하는 여자라고?”
“눈치가 없어서 그래. 차단 박아야겠다.”
“차단 박을 정도야?”
“응.”
“...”
전화가 끊겨 진동이 멈췄다. 뭔가 더 의심된다는 눈초리였다.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냥 이상한 애야.”
“나 걔 프사 보고 싶어.”
“왜.”
“보여줘.”
김세은이 폰을 내게 넘겼다. 받고 잠금을 풀고 이수아를 차단 박은 뒤 다시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봐서 뭐해.”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의심하는 거잖아.”
김세은이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너 그러면 진짜 의심하게 돼.”
“아까는 가짜 의심이었다?”
“...”
뭔가 흐름이 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여기서 누구는 져 줘야 되는데, 그게 내가 되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때면 계속 내가 물러난 것 같았다. 아까만 해도 그랬고.
김세은이 자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수아를 찾아보는 모양이었다. 이수아가 sns를 했나?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있으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괜히 쫄려왔다. 이수아 얼굴을 보면 관계에 대해 물어올 게 분명했으니까.
“뭐해.”
“찾고 있어.”
“왜 찾는데.”
“네가 안 알려주니까.”
그냥 내가 보여줘야 의심을 덜 살까? 그러면 나는 뭐라고 변명해야 되지? 아까처럼 이상한 애라고 하면 되려나? 그래도 될 것 같다. 바로 입을 열었다.
“보여줄게.”
“... 보여줘. 빨리.”
카톡을 키고 이수아의 프사를 눌렀다. 장수는 27장이나 됐는데, 내 기억 상으로 자기 얼굴만 나온 사진이 반, 자기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반이었다. 김세은에게 넘겼다. 김세은이 첫 번째 사진을 확대해가며 뜯어보더니 다른 사진들도 훅훅 넘겨봤다. 27장을 다 볼 기세였다.
“다 보게?”
“응.”
김세은은 진짜로 다 봤다. 나랑 찍은 사진이 있나 확인한 것 같았다. 결백한데 이 정도로 큰 의심을 받은 나로서는 한 소리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거나 다름 없었다.
“배경 사진도 봐도 돼?”
어이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꾹 참아냈다.
“봐.”
김세은이 배경 사진도 확인했다. 곧 폰을 돌려받았다.
“뭐하는 애야?”
“미안하다고 먼저 해야 되지 않아?”
“어떻게 알게 됐는데?”
“미안하다고 먼저 말해.”
“미안해.”
“너무 건성으로 말하는 거 같은데.”
“...”
김세은이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 귀를 드러냈다. 붉어진 귀가 앙증맞았다. 하이얀 목과 쇄골이 눈에 담겼다. 맑은 눈이 미동했다.
“미안해.”
“... 응.”
내가 이상한 건지는 몰라도 발기해버렸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정했다. 벨트를 차고 왔어야 했다.
“그래서, 이수아는 어떻게 알게 된 애야?”
고민하고 답하면 지어내서 답했다는 게 티가 날 건데. 별로 생각이 안 떠올랐다. 접점이 뭐가 있었지? 위험한 타이밍으로 넘어가기 전에 되는 대로 입에 담았다.
“영화.”
“영화?”
거짓말을 부풀릴 시간이었다.
“영화 커뮤에서 알게 된 애인데, 약간 제멋대로 구는 스타일? 거리낌 없이, 서슴 없이 군다고 해야 되나? 아무튼 그런 애야.”
“되게 귀엽다는 거네?”
“그게 왜 그렇게 돼?”
“일단 얼굴부터 귀엽던데.”
“그래?”
“그래애?”
“넌 왜 또 그러는데.”
“네가 말한 것만 들어보면 차단까지 할 이유가 없다 싶어서.”
“그냥 사람이 이상해서 그래.”
“어떻게 이상하길래?”
“나한테 욕 엄청해. 듣기 거북한데 고치기 어렵다고 나보고 이해하라고 하고. 그래서 그냥 말 섞기도 싫은데, 가끔 전화해서 자기 할 말만 하고 그래.”
“... 힘들겠네.”
“진짜 힘들어.”
“근데 그 이수아 옆에 여자는 또 누구야?”
단속 너무 빡세게 하는 거 아닌가.
“그 분 이수아 어머니래.”
“진짜아?”
김세은이 오늘 가장 크게 눈을 떴다. 목소리도 감기 걸린 것 치고는 꽤 높게 올라갔다.
“응.”
“신기하네...”
“이제 의심 풀렸어?”
“거의 다?”
“거의 다라니?”
“영화 커뮤 이름이 뭐야?”
날카롭다.
“몰라. 이름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넷챠 커뮤였어.”
“흐응...”
“이제 된 거야?”
“응. 그런 거 같아.”
“그런 거 같다는 거는 또 뭐야.”
“몰라. 그냥 그렇게 말해야 될 거 같았어.”
어떻게 그럭저럭 잘 넘긴 것 같았다. 긴장이 풀렸다. 남은 음식을 먹어치우고 현금으로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다.
“옷 사러 가자.”
김세은이 말했다. 말해둔 게 있어서 팔짱을 껴오려고 하지는 않았다. 거리가 가깝긴 했는데 친한 친구 사이도 이 정도 거리감은 낼 수 있으니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옷은 왜.”
“그냥 같이 보러 가주면 안 돼?”
“소원권이야?”
“너 자꾸 그러면 나 진짜 정 떨어져.”
그러면서 팔짱을 껴왔다.
“약속한지 얼마나 됐다고 어겨.”
“네 잘못이야.”
“또 뭐가.”
“네가 정 떨어지는 말 했잖아.”
“그거랑 약속은 별개지.”
“약속도 네가 먼저 어겼어.”
“언제?”
“약속하자마자 이수아라는 애한테 전화 왔잖아.”
“하. 그게 내 잘못이야?”
“응. 네가 너무 잘 생긴 탓.”
“걔 나 좋아하지도 않아.”
“그건 어떻게 알아?”
“걔 따로 좋아하는 애도 있다고 했어.”
“그걸 믿어?”
“믿어야지 그럼. 의심해서 뭐해.”
“걔 그러면서 너한테 접근하려는 거면 어떡하게.”
“풋. 철벽치는 거지.”
순간 웃어버렸다. 이수아가 지금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으면 노발대발할 게 너무 뻔했고, 뭐라고 할지도 대충 예상이 갔는데, 그게 너무 웃겼다: ‘헛소리들을 존나 진지하게 나누시네요? 내가 이 새끼를 왜 좋아함? 에? 개소리하지 마시구요...’
“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와?”
김세은이 볼을 부풀렸다. 검지로 콕 눌러서 알아서 터뜨려주기를 기다렸다. 도통 빠지지를 않아서 미소짓고 마주보았다. 곧 김세은이 배시시 웃으면서 볼에서 바람이 빠졌다.
“너 질투 너무 심한 거 아냐?”
“이 정도 질투도 안 해주면 너도 삐질 걸?”
“글쎄.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걸?”
김세은이 까치발을 들어 내 코를 살짝 눌렀다.
“따라하는 거 뭐야.”
“놀린다고 생각하는 거 뭐야.”
“지금 완전 놀리는 거잖아.”
“네가 놀린다고 하니까 그러고 싶어지네.”
“짓궂어.”
우리는 10번 출구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 매장 입구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팔짱을 풀었다. 내가 딱히 뭐라 한 건 아니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거기에서까지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김세은이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아는 사람 없어?”
“응.”
김세은이 옆으로 왔다.
“너무 가깝지 않나?”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팔짱낀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 없다니까 뭐. 그냥 별말 않기로 했다. 김세은이 별 특색 없는 옷들을 위주로 살펴봤다. 검은색 아니면 흰색을 집어서 자기 몸 앞에 대충 두고는,
“이거 어때? 나랑 어울려?”
라고 하고, 그러면 나는
“응. 예뻐.”
아니면
“그 색보다는 이게 더 어울리는데.”
따위의 말만 했다. 그게 단어만 조금씩 바뀌어서 몇 번 반복됐다. 어느새 나는 상의 네 개와 바지 셋을 들고 있었다. 이곳만 따라와줄 거라고 생각해서 여기서 막 사는 건가. 역시 김세은은 나를 잘 알았다.
“왜 이리 베이직한 것들만 골라?”
“나 기본템이 없어.”
“입어보지도 않고 골랐다가 맘에 안 들면 또 어떡하고?”
“그건 그것대로 좋은데.”
“왜?”
김세은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털뭉치를 눈 앞에 둔 고양이 같았다.
“그거 입을 때마다 너한테 투정부릴 수 있잖아.”
“하.”
“히힣.”
“너 그렇게 웃을 때마다 진짜 바보 같애.”
“순진해보인다는 거지?”
“너랑 순진함이랑은 조금 멀지.”
“그럼 백치미?”
“그렇다고 쳐.”
“괜히 인정하기 싫어한다.”
“한번 옷이나 갈아 입어봐. 사줬는데 나중에 안 입으면 서운할 거 같으니까.”
김세은이 환하게 웃었다.
“알겠어.”
김세은이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가 나왔다.
“예뻐?”
“어.”
“이건 어때?”
“좋아.”
“좋아?”
“응.”
“예쁘다고?”
“잘 아네.”
“예뻐.”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그렇다?”
“옷걸이가 사기잖아.”
“그건 그래도...”
“방금 조금 재수 없었다.”
“내빼는 게 더 재수 없을 걸?”
“와. 여기서 절정 찍었다.”
“아 그럼 뭐라 말해야 되는데에.”
김세은이 내 팔을 살짝 밀었다. 밀려나는 척도 안 했다.
“갈아입어. 이제 가자.”
“벌써?”
“이 정도 샀음 나가야지.”
김세은이 옷을 갈아입었다. 계산대에서 김세은이 말했다.
“그럼 지금 나가고 연극이나 볼래?”
“연극?”
아쉬워하는 맘은 알겠다. 오늘 이후로는 여태보다 더 조심하게 될 테니까. 데뷔하고 나면 스케줄에 치여서라도 못 만나게 될 거고. 사실상 이번이 최초의 데이트이자 기약이 없다는 점에서 최후의 데이트가 될 수 있는 거였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연극을 즉흥적으로 보러 갈 수 있는 거였어?”
“안 될 것도 없지.”
“실망스러우면 어떡해?”
“왜 최악을 가정해? 실제로 그런 적도 없는데.”
안 그래도 감기 때문에 평소보다 저음인 김세은이 목소리를 더 낮게 했다. 귀여웠다. 피식 웃었다.
“너 연습실 돌아가서 뭐 할 일은 없어?”
“나 내일 학교 갈 거 같은데.”
“... 그래?”
“버스킹할 때까지 주에 두번은 학교 가도 된다고 허락 받았어.”
“잘 됐네.”
“나 잘 했지?”
“잘 했어.”
“그럼 어떡해야 돼?”
“연극은 조금 그렇고, 영화보러 가자.”
“으음...”
뭔가 맘에 안 드는 눈치였다.
“뭐 어떡해줄까?”
“네가 생각해봐.”
“...”
김세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로 내려서 김세은의 손을 잡았다. 김세은이 웃었다. 발기했다. 나 진짜 병원가야 되나. 반대편 손을 주머니에 넣어 자지를 억류했다.
“가자.”
“응.”
무비박스 쪽으로 향했다. 김세은은 나를 봤다 앞을 봤다 바삐 눈을 굴렸다. 길을 걷는 남자들은 김세은을 안 보는 척 보려고 애를 써댔다.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김세은을 벗기고 싶었다. 번화가 속에서. 하지만 아무도 못 볼 은밀한 곳에서. 그런 모순적인 공간이 존재할까 싶었지만 내가 바라는 게 정확히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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