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얘기 좀 하자 세은아
* * *
김세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라니?”
대답이 궁했다.
“몰라. 배고파. 일단 음식부터 시키자.”
“응. 마실 거는 뭐로 할래?”
“콜라.”
김세은이 바로 벨을 눌렀다. 다 정해놓고 왔는지 메뉴를 곧장 말했다. 김세은이 나를 직시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있어.”
“뭔데?”
김세은이 턱을 괬다. 얼굴을 마주 하고 막상 입을 열자니 말이 안 나왔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 조금만 참을 순 없어?”
“참는다니?”
상체를 쭈욱 앞으로 내밀고 조용히 말했다.
“너 아이돌로 성공하고 입지 다질 때까지 참을 수 없겠냐고.”
“...”
“논란으로 뜨면 안 되잖아.”
“... 내가 못 뜰 수도 있잖아.”
“네가 안 뜨면 누가 떠.”
“포텐 있어도 못 뜨는 아이돌도 많아. 그래도 참으라고? 막말로 내가 10년 뒤에 뜬다고 하면, 넌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어?”
“왜 자꾸 최악을 가정해.”
“진짜 모르는 거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알아. 내 뜻은, 내 최악까지 견뎌줄 수 있냐고 묻는 거잖아. 안 변할 수 있냐고, 그걸 묻는 거잖아...”
김세은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난감했다. 일어서서 김세은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시선 좀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세은이 더 중요했다. 내 허리 뒤로 김세은의 팔이 감겼다.
“울지 마. 화장 번져.”
“흣... 너 진짜, 뭐야?”
“뭐냐니.”
“너, 나 말고 다른, 여자 있는 거 아냐?”
“뭐 어떤 회로를 거쳐야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거야?”
“몰라, 그냥 막, 불안해. 막, 막, 나 갈아타려고, 그러는 거 같애.”
“저, 음료수 나왔습니다...”
“아 네.”
김세은은 나를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짜 애도 아니고. 김세은의 팔에 묶인 채로 옆으로 비켜섰다. 직원이 최대한 빠르게 얼음컵을 놓고 돌아갔다. 빨대는 두 개가 있었다. 직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김세은이 팔을 풀어줬다. 아니 풀어줄 거면 진작에 하지 왜 하필이면 직원이 가자마자 풀어주는 거지. 방금 상황의 완벽한 증인을 만들어두고 싶었나. 중간에 끼어서 이전 상황은 모를 사람인데. 아, 하여튼 김세은의 속내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도로 자리에 앉았다. 김세은은 허벅지 위에 두 손을 주먹 쥐어 얹고 울음기를 없애려 노력했다. 꽤 잘했다. 감정 조절도 트레이닝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콜라를 따르고 김세은 앞에 놓았다. 김세은이 한 모금 빨아 마셔 목을 축이고 내 쪽으로 아예 넘겨주었다.
“더 마셔.”
“살쪄.”
“스테이크 먹으러 온 사람이.”
“고기는 살 안 쪄.”
“탄수화물만 안 먹으면 돼?”
“응.”
이대로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김세은이 가끔 학교로 오는 날에 팔짱을 끼고 티를 낸다면 소문이 여기저기 날아다닐 게 뻔했다. 방금 출구에서 나왔을 때도 솔직히 위험했다. 발이 그리 넓은 편이 아닌 나는 몰라도 김세은은 일요일 이 시간대의 강남에서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
“학교에서도 그렇게 티낼 거야?”
“...”
김세은이 고개 저었다.
“세은아.”
“말하지 마...”
“나한테서 바라는 게 뭐야?”
“... 그냥...”
김세은이 다시 울먹였다.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눈을 내리깔아 테이블 위의 포크를 잠깐 바라보다가 물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가끔 데이트하고, 많이 얘기하고, 종종 포옹하고. 그게 다야.”
“...”
“그러면 안 돼...?”
감기 걸린 목은 쉽게 메었다. 어딘가 막힌 소리가 귀에 들어오자 가슴이 턱 내려앉는 듯했다. 물기 어린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입 안이 텁텁했다. 콜라를 마셨다.
“평소처럼만 하자.”
“평소처럼이라니...?”
“남들한테 안 들키게. 아는 사람 마주칠 만한 곳에서 팔짱 같은 거 안 끼고. 포옹 같은 것도, 안 보이는 데에서만 하고.”
“...”
“여태 잘했잖아.”
“...”
김세은이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테이블 아래로 허벅지를 쥐어뜯는 듯했다.
“넌, 넌 그래도 괜찮아...?”
“네가 안 괜찮다고.”
“난 감수할 수 있어.”
진짜 답답하게 군다.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그 정도인가? 김세은이 내 머리를 뜯어보았다면 이렇게까지 굴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줄 수는 없었다. 김세은이 나를 놓아주기 싫어하는 것과 사뭇 다른 방향이겠지만, 나도 김세은을 놓아줄 수 없었다.
침묵이 오갔다. 김세은은 한동안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문득 김세은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부딪혔다.
“... 그럼 약속해.”
“... 뭘?”
“하나씩 약속하기로 해.”
아. 말려들었다. 심란해져서 머리가 안 돌아갔다. 김세은이 연애하지 않는 척하는 건 본인 입장에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김세은이 진짜 충격받은 건지, 아니면 그런 척한 건지는 몰라도 이렇게 순식간에 유리한 조건을 가져가 버린 걸 보면 김세은은 교활했다. 그래도 이미 낚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 나 먼저 할게. 밖에서 너무 달라붙지 않기.”
“... 응. 나 뜰 때까지 기다려주기.”
“응. 다가오는 남자 바로 쳐내기.”
“다른 여자랑 가까워지지 않기.”
“얼마나 가까워지지 말라는 거야?”
“호감 갖고 접근하는 거 보이면 철벽 치라구.”
“알겠어.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김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시 달라붙지 않기는 내가 걸 조건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손해였다. 김세은은 교활하게 얻어낸 약속 하나로 ‘다른 여자랑 가까워지지 않기’라는 조건을 세웠는데, 이건 본인 좋을 대로 나를 규제하기 너무 좋았다. 너무 불공정했다.
“뭐가 억울한 건데?”
김세은이 울컥했다. 왜 자기가 울컥하지? 억울해도 김세은을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이마를 매만졌다.
“미안해.”
“음식 놓아드릴게여.”
“...”
어느새 직원이 요리를 가져와서 김세은의 입이 다물렸다.
“사진 안 찍어?”
“...”
내가 찍어서 보냈다. 김세은이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확인했다. 별말 없길래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이빨이 닿자 육즙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베어 물었다.
“맛있어?”
“어.”
김세은이 살포시 웃었다가 표정을 감췄다. 지금 기 싸움해서 뭐 하자는 건지.
“왜 웃다 말아.”
“...”
김세은이 눈싸움을 걸었다. 옅은 미소를 띄우고 응수했다. 김세은이 입꼬리를 씰룩이다가 결국 파흐,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다가 아예 테이블에 팔을 대고 엎드렸다.
“아 진짜 사기야...”
“뭐가.”
“너 웃는 거.”
“자기가 웃은 걸 왜 나한테 뒤집어 씌워.”
“너 웃으면 나도 웃게 된단 말야... 아... 나 지금 진짜 바보처럼 보이지...?”
“응.”
“나빴어.”
“고개 들어.”
“싫어.”
“고기 내가 다 먹어?”
“안 돼.”
김세은이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팔자국이 남아 분홍빛이 감돌았다.
“사진 찍어줄까? 너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 응.”
카메라 어플을 키고 김세은을 화면에 담았다. 김세은은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 찍힌 척을 했다.
“봐봐.”
“여기.”
김세은이 핸드폰을 받고 확인했다.
“눌린 거 귀엽게 찍혔다.”
“그걸 네 입으로 말해도 되는 거야?”
“안 귀여워?”
“귀여워.”
“나 이거 보내줘. 아니 내가 보낼게.”
김세은이 내 핸드폰을 만져서 자기 카톡으로 보냈다. 핸드폰을 돌려받았다.
“인별에는 올리지 마.”
“왜?”
“누구랑 갔냐고 사람들이 댓글 쓸 건데 뭐라 대답하게?”
“으응, 그렇네... 그런데 그 정도로 조심할 거면 갤러리에 갖고 있는 것도 안 되고 너랑 톡한 기록도 남기면 안 되는 거 아냐?”
“그게 베스트긴 하지.”
“그런데 이런 기억 안 남기면 무슨 맛으로 살아?”
이런 기억이라니. 방금까지만 해도 울먹이다가 지금 이런 기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가당키나 한가.
김세은은 가끔 내가 미워진다고 했다. 그게 다 나를 그만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덧붙였고.
좋아해서 나쁘게 구는 때 밉다가도, 그 순간마저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기쁠 수가 있는 건가? 생각만 해도 복잡한 심경이다. 마주 하는 모든 순간 괴롭혀지는 느낌 아닐까. 자신을 너무도 쉽게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심리적 부담이 엄청 크지 않을까.
그런데 또 김세은은 그걸 즐기는 걸 수도 있고. 김세은은 마조히스트니까.
김세은이 내 눈을 응시했다. 정말 한없이 무례한 생각이었다. 콜라를 마시고 입을 열었다.
“다른 기억 방법을 찾으면 되지.”
“예를 들어서?”
“일기를 쓴다거나.”
“싫어.”
“왜?”
“글은 한계가 너무 명확하단 말야.”
“사진도 한계가 있잖아.”
“그러니까 둘 다 할 거야.”
“사진은 어떻게 남기겠다는 거야?”
“투 폰 쓰면 되지.”
“공기계라도 있어?”
“사면 되는 거 아냐?”
“지금은 어떡하게.”
오늘 이후로는 별로 못 만날 건데.
“이것만 예외적으로 가지면 안 돼?”
“안 돼.”
“아니 이거 하나 가지고 있는 거로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 나중에 발굴된다 해도 유추도 못할 걸?”
“아냐. 사람들은 해. 어떻게든.”
사람은 지독하다. 이빨에 독이 없는 대신 신체의 연장에 끈적하고 더러운 걸 묻힌다. 오로지 다른 무언가를 배제하기 위해서. 문명의 시대가 오고 사상적으로 몇 번의 도덕적 진화를 거쳐도 차마 사라지지 않은 원시적인 본능은 오늘날엔 혀 끝과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다.
“지워.”
“... 너 너무 단호한 거 아냐?”
“그게 맞는 거라니까.”
“알아. 맞아도, 좀 안타까워 해주면 안 돼?”
“걱정하는 맘이 더 커서 그래.”
“그래도 안타까워 해줄 순 있는 거잖아.”
“그러고 있어. 티만 안 나는 거지.”
“...”
김세은은 침묵을 자주 쓴다. 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그런다고 내 마음이 읽히는 일도 없다. 고기를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너도 먹어.”
김세은이 대답하지 않고 포크를 들었다. 고기 두 점을 축 찍어 한 입에 넣었다. 으적으적 입을 꾹 다물고 씹어댔다. 눈살을 날카롭게 치켜 뜬 게 삐진 고양이 같이 앙칼졌다. 예쁘고 귀여웠다. 김세은이 목 너머로 넘길 때까지 보고 있었다.
“왜 너는 보고만 있는데.”
“보기 좋아서.”
“... 너 그런 말 나한테만 그러는 거지?”
“응.”
“진짜?”
“너 말고 누구 있다고.”
“너 주변에 여자애들 많잖아.”
“내가?”
“응.”
“나 진짜 모르겠는데.”
“네 카톡 봐도 돼?”
“왜?”
“보여주면 믿을게.”
“너도 안 보여주잖아.”
“난 너밖에 없으니까.”
“나도 너밖에 없다고 말했잖아. 몇 번이나.”
“그럼 보여줘.”
진지한 기색이다. 어이 없다. 이건 믿음의 문제다. 내가 얼마나 안 믿음직했으면 이렇게 뻔뻔하게 요구해올까. 따지자면 자기가 생각하기에 믿음직하지 않은 나를 콕 집어 좋아해버린 김세은의 잘못도 있는 거다.
우선 자신을 책망하고 볼 일이다. 그런데 아무 잘못 없는 나를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하게 죄어오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좋아하는 사람을 의심하는 자기에 대한 죄책감, 의심스러운 나를 고른 자신에 대한 자책 하나 없이?
“내가 죄인이야?”
“죄인은 무슨 죄인. 나 그냥 카톡 보여달라고밖에 안 했잖아?”
“네가 나를 못 믿는다는 거잖아.”
“내가 너를 믿을 수 있게 만들어달라는 거야.”
“그니까 애초에 불신했다는 거 아냐.”
“...”
김세은의 표정이 굳었다. 틱, 탁, 고풍스런 시계가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렸다. 주변이 조용했다.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기분 탓인가. 제발 그랬으면 하는데.
“... 믿어. 믿을 수밖에 없어. 너 안 믿고는 못 살아... 그니까, 그니까 안심만 하게 해주면 안 돼...?”
감기가 걸려 텁텁한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 낭패다. 김세은이 여기서 울어버리면 인터넷에 뭐라도 올라오기는 올라올 거다. 어쩌면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과 함께. 그러면 시간대와 인상착의로 우리를 쉽게 추정할 수 있을 거다. 누군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 알겠어.”
핸드폰의 잠금을 풀고 건네주었다. 김세은이 받고는 테이블에 폰을 끄고 엎어두었다.
“그럴 거면 왜 달라고 한 거야?”
“이거면 됐어.”
하. 결국엔 또 김세은에게 지고 말았다. 누가 봐도 내가 나쁜놈이었다. 신뢰를 보내는 애인에게 추하게 나오다가 밀어붙여지니까 시선을 의식하고 끝내 넘겨준 악질 남자친구. 혹자는 내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은 김세은을 두고 답답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남자 한 명, 여자 두 명과 눈을 마주쳤다. 홀로 외딴 섬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세은이 입을 열었다.
“고기 다 식겠다.”
“...”
다 계산된 일이었을까. 아, 김세은은 이토록 교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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