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이수아랑 록키 보고 세은이랑 저녁 먹으러
* * *
홈트룸에서 운동은 별로 못했다. 십삼분 있었나, 갑자기 너무 피곤해져서 씻고 방에 들어가서 잠들었다. 체력을 당겨 썼다가 페이백을 받은 느낌이었다. 알람을 맞춰놓아서 두 시에 일어났다.
방을 나왔는데 집이 어두컴컴했다. 이수아가 지 영화 본다고 다 어둡게 만든 모양이었다. 냉장고로 가면서 보이는 전등들을 다 켰다.
“야! 불 꺼!”
테이블에 앉아 이온 음료를 마셨다. 핸드폰을 봤다. 밴드부 단톡방이 시끄러웠다. 단합일을 언제로 할지가 주 화제였다. 대충 날짜를 언급한 것들을 보고 투표를 띄웠다. 아마 버스킹하는 토요일 다음날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감기에 좋은 음식들을 찾아보고 스크랩해서 김세은한테 보낼 때, 불만스런 표정에 팔짱까지 낀 이수아가 친히 제 발로 행차하셨다.
“내가 불 끄랬지.”
“영화가 보고 싶으면 영화관을 가.”
“상영도 안 하는 옛날 영화를?”
“요즘 거를 보면 되지.”
“그럼 내가 어련히 영화관 알아서 갔겠지 병신아?”
“말버릇 안 고칠래?”
“고치려고 하는데 좆 같으면 지가 막 튀어나오네?”
“... 안 고치면 강제 교정해줄 줄로 알아라.”
“뭐 어쩌시게. 때리려고? 가정 폭력으로 좆 돼볼래?”
“내가 진심으로 패면 네가 더 빨리 좆 될 건데?”
이수아가 티나게 몸을 옹그렸다. 모션은 어색한데 질색하는 표정 연기는 경멸, 두려움 등의 감정을 잘 표현했다.
“진짜 팰 생각했냐? 여자를? 그것도 여동생을?”
“하지 마 역겨우니까.”
“와, 우연의 일치다. 난 네가 역겨운데.”
“너 진짜 쳐맞고 싶어서 그러냐?”
“네가 짜증나게만 안 하면 되잖아.”
“하...”
지적할 게 존나 많으면 말문이 막힌다. 어디부터 지적해야 될지 막막해져서.
“이 집에 니만 사는 게 아니에요.”
“근데.”
“근데? 근데라고? 네가 봐도 네가 이상하다고 안 느껴지냐?”
“너 깨어 있고 집 돌아다닐 때 내가 불 끄고 영화 봤냐? 너 방 들어갔을 때 그랬지? 그러면 이젠 내가 영화 보고 있는 거 안 네가 나 배려해줄 차례 아니냐?”
“너 영화 소리 존나 시끄럽게 하고 보는데 내가 편히 잤겠냐?”
“그럼 소리 줄여달라고 하든가 했어야지. 지가 안 해놓고 나한테 괜히 지랄.”
“네가 못 들은 거 아니고?”
“들을 수 있게 밖에 나와서 말하든가.”
“핸드폰으로 톡도 보냈는데?”
“영화볼 때 핸드폰 안 만지거든.”
존나 개 같네. 일어섰다. 이수아가 움츠러들었다. 연기는 아닌 것 같았다.
“왜. 때리기라도 하시게...?”
웃겼다. 평소 말투가 좆 같은 건 맞는데, 얼굴이랑 지금 반응만 떼어놓고 보면 귀여웠다.
“내가 너 때려서 뭐하냐.”
“... 존나 쫄게 만들고 있어.”
“네가 쳐맞을 짓한 줄은 아나 보다?”
“...”
“영화나 봐라.”
이수아가 대답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 요거트 통을 꺼내서 숟가락을 들고 도로 거실로 향했는데 주방 불을 끄고 갔다. 하는 짓거리마다 밉상이었다. 저런 게 친구가 있을까 싶은데, 통화하는 걸 들어보면 이수아도 정상적인 대화라는 걸 할 줄은 아는 애였다. 그러니까 나한테만 좆 같이 구는 거였다. 이유는 몰랐다. 알면 이해라도 해줄 텐데 그런 것도 없으니 더 좆 같은 것도 있었다.
다섯 시에 나가기로 했는데 남는 시간 동안 딱히 할 게 없었다. 자기 전에 이미 씻어서 다시 씻기도 귀찮았다. 대충 머리만 감고 주방에서 에어프라이어로 감자튀김을 데웠다. 아침에 먹다 만 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릇에 옮겨 담고 이수아 옆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막 시작한 영화는 록키였다. 진짜 뭐 이런 옛날 영화를 다 보나. 이수아가 나를 힐끔 보고 다시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왜 옴?”
“영화 보게.”
“옛날 영화 안 보는 신식 현대인인 척은 존나 하더니.”
“신식 현대인은 무슨 단어냐.”
“말 걸지 마.”
“미친 년.”
무시한 이수아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감자튀김을 집으려 했다가 손을 획 뗐다.
“아 씨 존나 뜨겁네!”
“병신.”
“아 좆 같애 진짜...”
이수아가 손을 허공에서 휘휘 털었다. 나는 삼십초 정도만 기다리고 부담 없이 집어 먹었다. 이수아가 다시 손을 뻗어 감자튀김을 쿡쿡 찔러댔다.
“먹을 거면 그냥 먹어.”
“안 뜨겁냐?”
“참을만 해.”
이수아가 감자 튀김을 집어 재빨리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입 안에서 굴리고 후후 불면서 먹었다.
“아힉 좀 뜨거운데효?”
“군말 좀 하지 말고 먹어 제발.”
“케챱은?”
“먹고 싶음 네가 가져와.”
이수아가 영화를 멈췄다.
“기다려라.”
이수아가 주방에 간 걸 보고 영화를 틀었다. 이수아가 다다다 달려왔다.
“거 몇 초를 못 기다리네 조루 새끼.”
이수아가 그릇 한 부분에 케챱을 쭈욱 짰다. 그 다음 한 번에 네 개를 집어서 케챱에 감자튀김이 묻은 수준으로 푸욱 찍고는 지 입에 넣었다. 입가에 케챱이 묻어서 뚱뚱한 욕심쟁이 꼬맹이 같이 보였다. 이수아가 혀를 내밀어 낼름 핥았다. 그래도 케챱이 조금 남아 있었다.
“돼지.”
“조루.”
“내가 조루 같아 보이냐?”
“넌 내가 돼지로 보이냐?”
대충 봐도 이수아는 허벅지가 굵었다. 평소에 품 넓은 옷을 입어서 몸에 살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세은이랑 비교하면 확실히 더 무게가 나간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어 돼지야.”
“내가 돼지면 우리나라 비만율 세계 1위 찍었다.”
“네가 기준이 되면 순위 변동은 없겠지 멍청아.”
“뭘 그딴 걸 따지냐. 너 친구 없지?”
“너 바보인 거 티 안 나게 미리 딴지 걸어서 교정해주려는 이 오빠의 갸륵한 정성에 탄복은 못할 지언정, 네 어찌 감히 친구 없냐고 말하느냐?”
“풋, 말 진짜 좆 같이 하네. 그런 어투는 어디서 배움?”
이수아가 주먹을 쥐고 내 팔뚝을 툭 쳤다. 이수아는 이런 스킨쉽이 잦았다. 나한테만 이러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찜찜했다.
“너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도 막 툭툭 치고 그러냐?”
“어? 아니? 근데 왜 남자라고 콕 찝냐?”
“아니 뭐. 다른 남자들한테도 막 그러는 거였으면 너 존나 여우짓한다고 욕 쳐 먹었을 거라고 알려주려 했는데, 아니라니까 다행이네.”
이수아가 또 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 별 병신 같은 걱정을 다 해주네.”
이수아가 소파에 앉고 다리를 올려 팔로 감싸 그대로 쭈그렸다. 무릎 위에 턱을 얹고 있는 게 더 얘기하기 싫다고 몸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이수아가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뭔데 궁금하게.”
“넘어가. 개소리였어.”
“쯧.”
원래 같았으면 혀 차는 소리를 들었을 때 뭐라 욕이라도 지껄였을 텐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없었다.
“어떻게 개 이름이 벗커스임?”
“안경 벗은 게 훨 낫네. 안경 왜 썼대?”
“으엑, 날계란 어케 먹음?”
“저거 과일 던져준 거 연출 아니래. 알고 있었어?”
그렇게 이수아는 영화 얘기만 줄창 했다. 너무 애써서 그냥 넘어가줬다.
영화는 명작다웠다. 굳이 평가할 마음이 안 들었다. 재밌었다. 그 정도만 말하면 됐다.
“영화 잘 봤다.”
“나가냐?”
“어.”
“언제 들어오냐?”
“나도 몰라.”
“돌아오긴 할 거냐?”
“돌아와야지.”
오늘이 일요일인데. 학교는 가야 될 거 아닌가.
“빨리 와.”
“왜?”
“엄마가 너 걱정하니까.”
“알아서 들어온다고 해.”
“맨날 알아서 이 지랄...”
“꼽냐?”
“어. 존나.”
코트를 걸쳤다.
“나 간다.”
“어.”
록키가 두 시간 짜리 영화였나. 강남에 가도 시간이 남을 것 같았다. 그냥 카페에 앉아 있다가 만나야 되나. 일단 김세은한테 전화 걸었다.
ㅡ응.
“나 나왔는데.”
ㅡ강남 왔다고?
“아니. 집에서 금방 나왔어.”
ㅡ언제쯤 도착할 거 같은데?
“글쎄. 안 꼬이면 네 시 반이면 도착할 거 같은데.”
ㅡ그럼 그때 볼까?
“너 지금 어딨길래?”
ㅡ강남이랑 가까워.
“그럼 강남역에서 만나자고?”
ㅡ응.
“몇 번 출구 쪽으로 가야 돼?”
ㅡ음. 11번 출구?
“알겠어. 전화 끊을게?”
ㅡ응. 그때 봐.
전화를 끊었다. 김세은이 오늘 바로 밥을 먹자고 한 건 어떻게 봐야 할까. 연예인이 되고 난 후 그녀를 주시하는 이목이 늘지 않았을 때 먹자고 한 거니까 일단 긍정적으로 봐야 하나. 그게 아니라면 오늘부터 나랑 사귄다고 공식화하고 싶은 걸까.
본인 손해가 될 일을 굳이 하려고 들까. 아니 손해를 감수할 정도로 나를 크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잠깐 아뜩해져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떴다. 주머니를 뒤져 블루투스 이어폰을 찾아 끼우고 노래를 틀었다. 지하철을 타고 좌석에 앉아 눈 감았다.
김세은은 뭐할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지금 김세은을 생각하는 것처럼 김세은도 나를 생각할까? 김세은이 그리는 미래는 어떨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피곤하고 어질어질했다. 지금 김세은을 보기 싫었다. 그냥 집에서 드러눕고 싶었다. 잠이 올 때까지 책이나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까무룩 잠들고 싶었다.
이어폰 너머로 강남역에 진입한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봉을 잡고 일어섰다. 마음은 그래도 만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세은에게 통화를 걸었다.
“나 강남역 도착했어.”
ㅡ11번 출구로 나와.
“응.”
ㅡ목소리가 별로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없어.”
ㅡ단답하는 것도 막 쌀쌀하구. 무슨 일 있지.
“없다니까.”
ㅡ흐응...
전화가 갑자기 끊겼다. 뭐지? 통화 접속 상태가 불량인가? 짜증났다. 엄청. 전화가 끊겼다고 날 화가 아닐 정도로.
누가 내 등을 콕콕 찔렀다.
“나 여깄어.”
뒤를 돌아봤다. 내 검은 코트와 깔맞춤을 해온 김세은이 히히 웃고 있었다. 기습적으로 내 품에 안겨왔다. 등줄기가 아찔해졌다. 눈을 감았다. 대충 두어번 등을 토닥이고 김세은의 팔뚝을 붙잡아 떨어뜨렸다. 눈을 떴다. 맑은 눈을 크게 뜬 김세은이 보였다.
“... 왜...?”
“너 이럼 안 되잖아.”
“왜?”
“모르는 척 하지 마.”
“...”
붙잡은 걸 놓으라는 듯 어깨를 턴다. 볼을 부풀리고 아무 말도 않는다. 생떼를 부리는 게 애 같다. 이수아보다 더. 안 이러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럴까. 일단 맞춰줘야 될 거 같았다.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 응.”
“사람들이 본다. 걷자.”
“...”
김세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일단 내가 먼저 걸었다. 빨리 출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출구에서 벗어나자 김세은이 팔짱을 껴왔다. 고개를 꺾어 나를 보고 있었다. 허락을 받으려는 것처럼. 잠시 눈을 마주쳤다가 앞을 보았다. 주변시야로 김세은이 웃는 게 보였다. 너무 환한 미소였다. 남자들이 김세은의 얼굴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미친 것 같았다. 김세은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
“너 이래도 괜찮아?”
“이럼 안 돼...?”
“...”
연애든 섹파든 상관 없이, 김세은이 가고픈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나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김세은이 잘 됐으면 좋겠다. 김세은이 자기 삶을 망치지 않았으면 한다. 김세은은 나랑 연애해서 좋을 게 없다.
이번에 마련된 시간은 좋은 기회였다. 김세은과 나의 관계를 정리할 기회.
김세은에게 연애는 일렀다. 아이돌로서 정착을 잘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시기 상으로 절대 좋지 못했다.
김세은에게 이끌려 스테이크 전문점으로 들어섰다. 2인석에 앉아 마주 봤다.
“밥 먹고 옷 쇼핑할래?”
김세은은 밝은 미래를 봤다. 그 앞에 놓인 독은 몰랐다.
“글쎄.”
나는 현실을 봤다. 가슴은 뜨거워지는데 머리는 차가워졌다.
우리는 진지한 얘기를 나눠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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