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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7화 (7/438)

〈 7화 〉 서유은이랑 개인 연습실에서 단둘이

* * *

가는 길에 서점이 보이길래 들어가서 신간 국내 소설과 에세이 두 권 씩과 해외 소설 두 권과 데일 카네기 인간 관계론, 그리고 백지수에게 선물할 책을 스물 네 권 샀다. 선물할 건 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문학 작품이거나 심리학 같은 내 흥미 분야를 다룬 책들이었다.

들고 가기 조금 버거운 무게였지만 근 사흘 운동을 안 해서 운동하는 셈치고 끝까지 걸었다.

별장 대문 앞에서 백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ㅡ열려 있으니까 알아서 들어와.

백지수의 별장을 열자마자 따스한 공기가 나를 덮쳤다. 보일러를 안 끄고 나갔거나 생각보다 빨리 별장에 돌아와 온도를 높인 모양이었다. 뭐가 됐든 가스비 같은 건 고려 없이 집 전체를 찜질방으로 만들었다는 건 다름 없었다.

“나 왔어.”

“어 드루와.”

외투와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1층 거실 소파 위에 쭈구려 앉아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백지수는 머리가 더벅머리로 원상복구되어 있었다. 분홍 돌핀팬츠를 입어서 살집 있는 허벅지가 훤했고 오버핏의 흰 반팔 티셔츠에 검은 브래지어가 비쳐 보였다.

“너 땀 뭐냐?”

“이거 들고 걸어와서.”

책이 담긴 봉투들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가까워졌을 때 손을 놓았는데도 쿵 소리가 났다.

“... 뭔데?”

“선물. 저 봉투에 담긴 일곱 권 빼고.”

백지수가 내가 볼 책들이 담긴 봉투를 발로 밀어내고 선물이 담긴 봉투들을 들여다 봤다.

"미친..."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야. 서재 썰렁하길래 사왔어. 교습비도 겸하고. 그리고 네가 말한 책도 읽으려고 샀다?”

쭈그려 앉아 책을 하나씩 꺼내 휘리릭 넘겨보는 백지수 옆에 나란히 앉아서 인간 관계론을 꺼내 보여주었다. 표지를 흘깃 본 백지수가 한 발자국 옆으로 걷고 툭 말을 건넸다.

“잘했어. 빨리 읽어.”

“너무 건성 아냐?”

“그럼 뭐 어떡할까?”

“조금이라도 감동해주면 안 돼?”

“왜?”

“네 말 귀담아 들었다는 거잖아.”

“너 진짜 나 좋아하냐?”

“뭐래.”

어느새 봉투들에서 책을 다 꺼낸 백지수가 다리를 끌어 안은채 입을 열었다.

“내가 이것들 안 읽으면 어떡할 거야?”

“안 읽을 수도 있지. 서재는 일단 채워두고 생각날 때마다 끄집어서 읽는 게 국룰이잖아.”

“읽을게.”

“그럼 고맙고.”

“나 말 안 끝냈는데.”

“뭐라 말하려 했는데?”

“‘적어도 한 두 권은’이라고 할려 했는데.”

“그래도 돼.”

“... 알겠다.”

“서재에 옮길까?”

“같이 올라가자.”

봉투를 나눠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백지수의 머리를 보면서 말했다.

“너 그거 풀리기 힘들었을 건데.”

“풀리더라.”

“머리 감았지.”

“... 미안해.”

“조금 서운하다.”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거 같아서. 네가 이해해.”

내가 어울린다는데 왜, 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 느낀다니까, 같은 식으로 나올 게 뻔하다.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백지수가 책을 꽂는 것을 거들으면서 말했다.

“나 씻어도 돼? 한 4분 만에 할게.”

“되는데, 4분 만에 할 거면 아예 하지 마. 씻을 거면 제대로 씻고 나가.”

“고마워.”

빠르게 샤워하고 개운해져서 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대고 있는 백지수의 옷차림은 아까 그대로였다. 백지수는 밖에 나온 나를 흘깃 보더니 검지로 헤어 드라이기를 가리켰다. 머리를 말리고 냉장고에서 물을 찾아 들이킨 뒤 물었다.

“안 나가? 옷은 왜 안 입었어.”

“너 먼저 가.”

“왜? 왔는데 걍 같이 가.”

“아 나 뭐 할 거 있으니까 먼저 가라고.”

“하긴 뭘해 너 백수인 거 다 아는데.”

백지수가 다리를 내리고 팔짱을 껴 가슴 위에 얹었다. 45도로 꺾은 고개가 왠지 반항스러웠다.

“백수 백수 그러는데, 하는 게 없는 건 아냐.”

“... 미안해. 기분 나빠할 줄 모르고 막말했다.”

“... 농담인 거 나도 알아.”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면 농담 아닌 거지. 가볼게.”

“... 야."

"응?"

"책 고마워. 잘 가.”

"응."

내 책이 담긴 봉투를 들고 기타방에 들어가 케이스를 챙겼다. 뒤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가서 뭔 걱정 있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오지랖 같아서 그냥 나갔다. 나한테 말하고 싶었으면 진작 털어놨을 테니까.

*

스테이지가 있는 연습실 문을 열었다. 음악 소리는 안 들렸다. 네 시부터 자정까지 연습할 테니 지금은 잡담이나 하는 분위기였다. 인사해오는 이들에게 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3학년 선배들은 네 시에 딱 맞춰서 올 건지 다섯 명이 안 보였고, 2학년은 백지수랑 김세은 빼고 전부 보였다.

“서유은 찾냐?”

강성연이 다 안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봤다. 저 미친 놈이. 서유은 온다 한 건 어케 안 거야. 아니 서유은이 나보다 빨리 온 건가.

“김세은 아직 안 왔어? 인별에도 올렸다며.”

“아 그쪽이었어? 난 또.”

이 새끼 이대로면 언제 한번 나랑 주먹 다짐하게 될 거 같은데.

“전화 걸어봐.”

송선우가 내 왼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무시하라는 거겠지.

“어.”

일단 기타부터 내려 놓고 전화 걸었다. 웬일로 바로 받았다. 장소를 가늠할 수 없는 소음이 마구잡이로 들렸다.

“어디야?”

ㅡ가는 중.

“시간 맞춰 도착할 수 있어?”

ㅡ더 빨리 도착해. 걱정 마. 끊어.

자기가 끊었다. 어이 없네. 문자가 왔다.

[목 많이 쓰면 목 나간대서. 미안.]

유난이다. 자기는 살면서 음이탈을 내본 적이 없다고, 강철 성대를 타고났다고 자랑해대던 게 언젠데. 그냥 형편 좋은 변명이다.

“서유은 왔다.”

멍 때리면서 입구만 쳐다보던 박철현이 말했다. 뒤돌아봤다.

연습실 안을 두리번 거리던 서유은이 우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얀 폴라티에 아이보리 핀턱슬랙스 차림으로 다리가 길어보이는 룩을 입고 왔다. 아우터웨어가 없는 걸 보면 미리 와서 어디다 둔 모양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이 보일 정도 거리가 되니 고개를 꾸벅 숙인다.

“언제 왔어?”

“이십 분쯤 전에요.”

멈추지 않고 계속 걷더니, 내 코앞까지 온다. 갈색 머리칼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샴푸향이 풍겨온다. 얘가 왜 이러지. 향이 진해서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저, 온유 선배, 비켜주세요.”

“어? 어.”

두 발짝쯤 옆으로 서니 서유은이 내 뒤에 있던 기타를 집어들었다. 애들이 쿡쿡 웃어댔다. 얼굴이 뜨겁다. 용암을 들이부은 것 같다.

“나 화장실 좀.”

“큭큭. 그래. 잘 가라. 시원하게 싸고.”

강성연 저 개새끼가 진짜.

*

근처 편의점에서 햄버거랑 콜라를 사서 먹고 나니 조금 진정 됐다. 서유은이랑 얼굴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보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유리문을 열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라운지에 서유은이 의자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로 앉아서 기타를 안고 있었다. 시선이 목적성 없이 대충 던져진 게 전형적인 멍 때리는 사람이었다.

“서유은. 너 왜 여깄어?”

정신 차린 서유은이 의자를 조금 뒤로 빼고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저 혼자 1학년이잖아요.”

밴드부원들이 텃세 부릴 성격은 아니었다. 차라리 붙잡으면 붙잡았지. 반대편 의자에 앉아 서유은을 마주보았다.

“부담 될 거 같았으면 다른 애들도 데려오지 그랬어.”

서유은의 눈썹이 공을 뺏긴 강아지처럼 추욱 쳐진다.

“문자 보구 신나서 바로 오느라 생각을 못했어요.”

하고 싶은 걸 할 기회가 생기면 앞뒤 안 재고 달려 들고 보는 스타일인가.

“그래도 일단 들어가서 선배들이랑 인사는 나눴지?”

“네.”

진짜 인사만 나눴나보다.

“음... 연습실은 처음 와보는 거야?”

서유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이 건물인 만큼 이 안에는 개인 연습실도 있었다. 선배들이랑 있는 게 힘들다면 연습실 쓰는 경험이라도 하게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여기 개인 연습실도 있는데 같이 둘러볼래?”

서유은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부담스러운 건지 아니면 내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된다고 배려해주는 건지 모르겠다.

“합주하기 전까지만. 가만히 앉아서 할 것도 없잖아. 어때?”

“... 좋아요.”

사람이 없는 개인 연습실만 열면서 보여주었다. 개인 연습실도 다양했다. 보컬 연습실, 색소폰 연습실, 업라이트 피아노 연습실 등등. 서유은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보고 집에 똑같은 게 있다며 앉더니 체르니 30번의 1번을 쳤다. 잘 치다가 중간에 뚝 끊고 나를 올려다 봤다. 말할 것 같지 않아서 내가 입을 열었다.

“피아노도 잘 치네?”

“이 다음은 몰라요. 히히.”

서유은이 미소 지었다. 보는 내가 괜히 기분 좋아졌다. 연예인이 되면 팬들을 끌어 모을 상이었다. 일단 팬 1호는 내가 해야겠다.

다음 방은 기타 연습실이었다. 기타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나랑 지금 즉석 합주 하나 해볼래? 기타 치면서.”

“무슨 곡이요?”

반응이 빠르다. 내심 합주하고 싶었나보다.

“너 리드 기타하면서 노래 부를 수 있어?”

“몇 개 안 되긴 하는데...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당연하지. 뭐뭐 가능한데?”

서유은은 여덟 개를 읊었다.

“아는 거 더 있긴 한데...”

“일단 이거면 됐어.”

많이 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서유은이 읊은 게 하나 같이 유명한 곡이라는 거다. 면접 때처럼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dynamite’ 하자.”

“저 그거는 연습한지 얼마 안 돼서 잘 못하는데...”

“조금만 어긋나면 어때. 상관 없지.”

“나중에 뒷담도 하기 없기예요?”

“절대 안 해.”

기타를 한 줄 씩 퉁겨봤다. 정말 운 좋게도 튜닝이 돼 있었다.

“넌 튜닝 했어?”

“이미 다 하고 왔죠!”

통화할 때 들었던 하이 텐션이다. 노래 부르는 게 좋은가보다. 버스킹, 크게 보면 공연이라는 거에도 기대감이 큰 듯하고. 오늘 실망시키면 안 되겠는데.

서유은의 큰 눈망울이 나를 담았다. 갈색 눈동자가 여름 끝자락의 석양처럼 아주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 눈을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를 읽은 서유은과 내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셋, 넷.””

ㅡCause I­I­I'm in the stars tonight

So watch me bring the fire and set the night alight

서유은은 기타와 자기 성대로 음을 정확히 찍어냈다. 등이 찌릿찌릿했다. f와 t 발음이 시원시원하게 귀에 꽂혔다. 문득 어릴 적 폭죽 소리에 놀라 어머니의 손을 꽉 잡은 채로 화려하게 밝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본 기억이 떠올랐다. 우뇌의 한 부분이 저릿해져왔다. 가사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언젠가. 나는 아니더라도, 서유은 만큼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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