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말은 조심히
* * *
어두운 방 안.
고요한 밤.
아려오는 뒤통수.
드워프의 대장간 같이 청량하게 울리는 골.
"흐어억, 두야.."
이 통증은 마치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는 것만 같은 통증이다.
쉽게 말하면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다는 소리다.
"표현 그대로잖아, 젠장.. 아.. 말할 때마다 울리는 것 같아.."
거기에 갈증이 너무 심하다.
당장에 해장국 한 사발을 들이키고 싶은 갈증.
'술 마셨나?'
스스로 손댄적은 없다.
의심 가는 거라고는 레이나가 준 딸기스무디 뿐.
'어쩐지 이상하게 걸쭉하다 싶었어.'
설마 레이나가 나를 속였을 줄이야.
앞으로는 방심하면 안 되겠다.
"헤헤.. 소피아는 다리가 더 좋데..."
미네르바가 내 다리를 어루만지면서 잠꼬대를 한다.
...쓸데없는 일을 잘 기억하네...
"하아.. 다리는 내가 좋은데, 왜 네가 문지르고 있니.. 허윽! 골아파.."
도대체 얼마나 독한 술을 먹였길래 이러는 건가.
'그전에 술이 걸쭉한 것부터가 말이 안 돼.'
나는 도대체 무엇을 먹은 것인가.
"어라? 언니, 일어나셨나요?"
"응, 리리스는 왜 안자고 있어?"
그러고 보면 시연도 자리에 없다.
미네르바와 닉스는 침대에서 자고 있건만, 리리스와 시연만은 자리에 없었다.
아니, 리리스는 푸른 달빛과 은은한 촛불을 받으면서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그냥 앉아 있는 건 아닌가?'
방금 전까지 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것 같다.
"흐응.."
리리스가 기지개를 피면서 기분 좋은 듯한 신음을 흘린다.
한때는 군단을 이끌면서 나에게 대항했던 마왕군의 간부.
지금은 마왕군의 참모.
'확실히 예전부터 전투원보다는 지휘관에 가까웠지.'
그녀는 전장보다는 저런 식으로 펜을 들고서 전략을 짜는 것이 더 어울린다.
미네르바도 예상과는 많이 다르게 전략이나, 저런 서류업무에도 능하다고 들었다.
단지, 그녀가 한 자리에 머무르며, 업무를 보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서 안 할 뿐이었다.
리리스가 억지로 앉혀놓고, 서류업무를 시킬 때 곧잘 한 것을 보면 확실하다.
'그런데 얼마나 급한일이기에 이 시간에 서류업무를 보는 거지?'
그 정도로 급한일이면 나에게 먼저 알렸을 것이다.
아무리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는 해도... 아니, 그 이전에 술부터 먹이지 않았겠지.
'한 번 볼까?'
우선 내 다리에 들러붙은 고양이부터 떼어내고.
"우웅..."
"앗! 언니, 혹시 모르니까 미네르바는 조심히 다뤄 주세요."
"응? 응."
아직 완전하게 취기가 가시지 않았던 건지, 또다시 거칠게 다룰 뻔했나보다.
"여기요, 언니. 서류들의 최종결제는 언니가 하셔야 되고, 우선은 이것부터 부탁드려요."
리리스가 나에게 다가와서 서류를 내밀었다.
적힌 내용은 임시인사이동 서류와 지원요청서류였다.
전선에서 있는 인원의 임신등으로의 내근으로의 직무이동과 예정일 전후로의 출산휴가.
전에도 만들려고 했던 복지정책이었는데, 이걸 지금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음... 혹시 전선에 있는 사람 중에 임신한 사람이 있니?"
어떤의미로 대단하다.
목숨이 오가는 전선에서 행위를 할 줄이야.
억지로 막을 생각은 없다.
그래도 조금은 생각을 하면서 행동했으면 좋겠다.
"긴장감이 없어, 긴장감이.."
나때는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다.
...단순히 상대가 없었던 거지만.
아무튼 이동시켜야 할 건 맞으니 최종결제를 하자.
"어디 보자, 이동인원... 미네르바 크라이스.."
지원요청대상 메티스 샤트룩스.
머리에 퍽치기를 당해서 시야가 이상해진 것 같다.
굉장히 익숙한.
지금 내 다리에 침을 흘리면서 자는 아내의 이름이랑 동일하다.
"어.. 음... 사유가.."
현재 이 인원은 임신여부가 확정 되기까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판단, 한 달간 마왕성 후방 내근직으로 임시인사이동을 '지시'한다.
추가로 임신이 맞을 시, 그 후 이동부서에 정식인사이동을 확정 짖는다.
이동 부서, 참모부.
참모장 리리스 크라이스.
남아 있던 취기가 싹 사라졌다.
부드럽게 보이던 리리스의 미소가 분노가 한 바퀴 돌아서 생긴 미소처럼 보였다.
"언니, 후후후... 미네르바의 위험한 날이었어요. 그러니, 한 번 확실하게 여쭈어 볼게요."
뭔가요.
"피임마법. 사용하셨죠?"
"...아니..."
"예?"
"요."
허허허... 절로 공손해지네요.
취했을 때도 별일 있겠냐는 생각은 했지만, 있었을 줄이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네르바의 주기일이 이쯤이었던 것 같다.
그 어두운 숲에 머무르는 동안 날짜감각이 사라져 버려서 문제인 거지.
계획에는 없었다.
적어도 전쟁이 끝나고서 아이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설마, 망할 파랑이가 말한일이 이루어질 줄이야.'
후대만들기.
왕의 업무중 하나.
아직 확정된 일은 아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하자.
"언니, 분명히 아이에게는 전쟁을 물려주기 싫다고..."
"리리스는 미네르바랑 같이 참모부 일을 도와줘, 미네르바에게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무리한 움직임은 자제하라고 알려주고."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면 조금은 아쉬울 것 같지만...'
막상 내 아이가 생긴다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어딘가 구름위를 걸어 다니는 듯한 묘한 감정이 생기면서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해프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후후, 뭘 웃고 계신 건가요?"
"응?"
왜 그러시나요, 왜 웃지도 못하게...
"그건 당연한 일이구요, 언니는 이 서류나 작성해주세요."
쿵...
묵직한 울림과 함께 내 앞에 놓여진 서류 다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서류.
뭘 작성하란 말인가.
"저기, 리리스?"
"서류라기보단, 편지예요. 메티스님에게 전달할 편지요."
'아...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편지구나...'
그래, 말하는 건 맞다.
그런데 장 수가 많이 있다.
"시연은 산부인과 간호사 동료에게 들었던 내용을 정리한다고 자리를 비웠어요. 언니는 그 사이에 무계획에 대한 반성문.. 이 아니라, 메티스님에게 지원요청을 할 때 같이 전할 편지를 작성해주세요."
지금 반성문이라고 했다.
억울하다.
분명히 술에 취해서 무계획으로 덮쳐 버린 내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초적인 원흉은 저쪽에게 있다.
나에게 술만 안 먹였으면 안 생겼을 일이다.
그리고 반성이라니, 이게 반성이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싫어, 편지는 확실해지면 내가 직접 전할게. 반성할 일은 아닌 것 같아."
미네르바에게 감사를 전하면 모를까, 반성은 아니다.
"후우.. 언니? 분명히 아이를 갖는 건, 상의를 하고 만들기로 하셨죠?"
"엇... 그러니까, 너희가 나한테 술을..."
먹이지만 않았어도..
"물론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제가 억울하잖아요."
'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저도 언니의 아이를 갖고 싶었는데! 언니가 전쟁이 끝나면 갖자고 해서 참았는데!"
그러셨구나...
제가 몰랐네요.
리리스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겠지.
"그..래? 그럼 자."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표현한 베개, Yes or Yes의 Yes뿐인 베개를 안겨 주었다.
"어라? 언니?"
많이 당황했구나.
"나 아직 술이 덜 깬거 같은데.. 내 옆으로 누우렴."
아까도 중간에 끝나서 은근히 아쉬웠으니까.
"하윽.. 네. 히히히.."
밤은 아직 길다.
리리스는 예정일은 아니다.
그래도 뭐 어떤가.
모두가 좋으면 됐지.
☆☆☆
"전하."
"음... 자네의 보고는 잘 알았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마르스가 어떤 보고를 올렸다.
그레고리의 실종.
정확하게는 왕국의 그린우드 습격으로 인한 마왕국의 포로화.
'로 추정되는 것이지.'
멍청한 로젤리아가 기어이 그린우드를 습격한 것이다.
병사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한 노예를 잡으러 간다는 취지였다고 보고 받았다.
라인하르트까지 그곳으로 향한 것으로 보면 아주 단단히 준비한 것이겠지.
다만 그 시기의 선택을 잘못했다.
조금 늦게.. 아니, 조금 일찍 일을 행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세계수가 무능한 것이 맞다는 가정에서 엘프들을 대량으로 사냥하는 것을 성공했을 거다.
인정하기는 싫다만, 그 로젤리아의 개는 마왕을 제외하고서 견줄자가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니까.
'단순한 사냥꾼들은 엘프들만으로도 대적이 가능하지.'
상황이 어쩌건 결과는 실패.
엘프들은 모조리 마왕의 밑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인족이 그들을 전부 노예로 잡으러 했으니, 자신 같아도 인족이 아닌 마왕의 편에 설 것 같다.
'일을 망치는 건, 여전하군.'
자신에게도 피해가 없는 건 아니다.
약의 재료를 구하러 간 그레고리의 소식이 끊겼다.
추정이자, 확신에 가까운 경우는 '마왕에게 포로로 잡혔다.'고 두 번째 경우는 '습격 도중에 사망했다.'이다.
두 번째 경우라면 안타깝지만, 그걸로 끝이다.
손해는 있어도 언젠가는 채울 수 있는 손해이다.
첫 번째라면 달라진다.
"전하, 부디 그레고리를 구출할 수 있게.."
"무엇을 걸 건가?"
과연 그레고리를 구출 또는 포로인계를 받으면서 생기는 손해를 메꿀 수 있는가.
그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구출할 만한 인제인가.
그런 고민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들이 있어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패전이 계속될지라도 암울한 상황까지는 치닫지 않고 있다.
'여기서 그레고리를 잃어 버리면, 마르스도 같이 잃겠지.'
그러면 라파엘은?
확신은 없어도 그녀는 마왕에게 대적할 것이다.
그레고리와 마르스, 이 두 인재를 잃는 손해와 잃지 않을 때 생기는 손해.
그 두 경우를 저울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르스의 가치를 더 높여야지, 덤으로 그레고리도.'
"강해지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네."
마르스가 고개를 들면서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 대답했다.
"어떤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강해지겠습니다. 그레고리가 제 전용으로 만든 영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각오는 다졌군.'
"기사 라인하르트가 아쉽지 않을 만큼, 비록 마력도 변변치 않은 고유능력은 없어도 누구도 아쉽지 않은 기사가 되겠습니다."
그런 각오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증명을 해야지.'
"증명하거라, 짐이 자네가 패배를 하여도 손해를 최소화했기에 남겨둔 것일세."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자네 혼자서 구출해 보게, 영약이 자네 전용이면 부작용 걱정도 없겠지."
이번에 마르스의 억지를 들어 주는 것은 큰 손해가 생길 수 있는 도박.
본래라면 허가하면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손해가 큰 만큼, 성공했을 때의 이득도 매우 크다.
"마르스여, 라파엘의 도움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녀는 마왕군의 침공을 막는 것만으로도 할 일이 많은 여자니까."
일을 성공 시켜서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할 것이냐.
"짐은 무능한 자가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무모한 행동을 일삼는 것이 제일 싫은 사람이야."
실패해서 무능하게 죽을 것이냐.
"실패하고서 뻔뻔하게 돌아올 생각은 말게나, 돌아오면 자네의 목숨을 그대로 끝이니까."
요새는 빼았기더라도 그 외 모든 것을 지켰던 능력이 단순한 요행이 아니길 바란다.
"가거라, 마르스여. 가서 그레고리를 구출해 오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
"마르스."
알현실을 나오자, 라파엘이 기다려주었다.
"도움이 필요하니?"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전하께서는 혼자서 행하라고 했다, 맞는 말이지."
그레고리의 인도를 마왕에게 요청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마왕이 무엇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이반왕이 인도와 대가의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다.
만약에 대가의 무게가 더욱 크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
'요즘 들어서 자비롭게 보인다고 해도 왕은 본래, 잔학한 왕이다.'
가치가 없는 것은 쉽게 잘라 낸다.
그렇다면 내 가치를 걸고 그레고리의 무게를 더욱 늘리는 수 말고는 없다.
'내 전용 영약이라...'
그레고리가 주었던 자그마한 영약.
'만약을 위해서 가지고 있으라더니... 역시 말을 하면 그럴 일이 생긴다니까.'
말은 정말 조심하게 해야 한다.
"라파엘, 고맙지만 거절하지. 그레고리는 나 혼자서 구하겠다."
그 유쾌범, 돌아오면 아주 각오를 해라.
다시는 남성이라고 못 속이도록 만들어 주마.
"공주님을 구하러 가는 왕자님이네, 열심히 하렴."
"그래, 고맙.."
응?
공주님?
"귀족영애의 집안사정? 뭐 그런 거라고 신혁이 말했던데, 이번 기회에 그 사정 같은 것을 무시할 정도의 업적을 남겨보렴."
뭘까, 저 손자의 사랑을 응원하는 할머니 같은 분위기는.
"그.. 그래.."
일단 빨리 출발하자.
'마왕성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지 모르니까.'
☆☆☆
"와... 여기 음식 맛있네!"
눈앞에 있는 귀족영애.
"아가씨."
거의 술집에서 술안주를 먹는 아저씨 같은 분위기로 누워서 배식을 먹고 있는 '귀족영애'.
"오.. 프레디 아니야? 과거의 내 집안 기사님. 크크크.."
"살판 나셨군요."
고기를 참 맛있게 뜯는다.
'마수고기인 걸 알고서 더 맛나게 뜯고 있지.'
육질이 더 맛있기는 했다.
그녀의 일은 깨끗했다.
소피아가 말한 '사람'의 기준에 있는 그레고리였다.
연구도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곧 소피아를 만나면서 그녀의 처분이 결정될 것이다.
이 철창 안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래도 이건 너무 팔자가 좋다.
"꺼억. 엇..! 크크크.."
'혹시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분명히다.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는 거다.
아니면 저런 중년 아저씨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저게 어딜 봐서 귀족영애인가.
그냥 방탕한 백수건달이다.
그녀가 그녀였다는 걸 아무도 모를 만하다.
"아가씨, 곧 소피아가 올 겁니다. 당신은 그들과는 달랐기에 찾아와 봤지만... 이 정도면 굳지 올필요는 없었군요."
"크크크, 그렇지. 난 내 놓은 자식으로 살아갔으니까, 이런 철창쯤은 별상관없지."
그래 보인다.
"마왕은 뭐라고 하지? 역시 내 왕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름 가치 있는 포로라고, 마왕은 생각할 것 같은데?"
안타깝다.
나도 소피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음.. 이반왕에게 아가씨보다 더욱 가치 있는 포로가 마왕성에 있습니다. 헨리왕자라고..."
"엇.. 나 망했네.."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에게 그런 조치가 떨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조치?"
마왕이 답 없는 인간에게 내리는 조치.
"포로 중에 버티기 힘든 노역을 받은자들이 많습니다."
"오... 진짜 망했네."
그녀가 답 없는 인간만 아니라면 상관은 없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마왕군 병사와 대략적으로 비슷한 대우를 받으면서 단순한 노동만을 할 것이다.
포로의 몇 명은 마왕국의 대우에 망명을 원하는 사람이 생기기까지 했다.
주로 왕국 군 쪽에서.
"다음에 다시 만나겠습니다. 저는 할일이 많아서 이만.."
그녀가 잡혀 있던 철창에서 멀어졌다.
"도망칠 수 있으려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