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외전:옛 용사와 성녀의 마지막 이야기
* * *
병상에서 일어난 용사가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무왕의 사망 소식이었다.
"..그래, 그가..."
돌아온 대답은 담담했다.
하지만 표정과 행동은 아니었다.
흔들리는 동공, 너무 강하게 깨물어서 터져 버린 입술, 그러쥔 주먹에서 올라온 핏줄도 곧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지금 당장 떠나자, 이러고 편하게 누워 있을 시간은 없어."
성녀와 라파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용사를 강제로 눕혔다.
용사가 당장에 화를 낼 것처럼 바라보았지만, 더욱 화를 내는 라파엘에 의해서 묻혀버렸다.
"당장 떠나자고? 용사, 넌 방금 깨어났어. '기적'이 아니었다면 죽는 건 너였다고! 그런데 당장 떠난다고?! 네 몸뚱어리가 무적이라도 되는 줄 알아?!"
용사라는 존재도 사람이다.
절대로 무적이 될 수 없고, 이번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혹시 또 '기적'을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 그렇구나. 어차피 '기적'이 있으니까, 여분의 목숨이 네 개나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 나는 그런 생각으로..!"
라파엘이 용사의 멱살을 붙잡으면서 소리쳤다.
"아니면!!! 아니면 지금 당장 마왕을 이길 수 있어? 당장에 모든 마수를 네가 죽일 수 있냐고!"
용사는 '희망'이 될 수는 있어도 '무적'이 될 수 없다.
그가 마수와 마왕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희망이어도 이런 식으로 가다간 언젠가 무너질 수도 있다.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시킬 생각이야? 나? 아니면 성녀?"
"..."
무왕은 스스로를 희생해서 희망을 지켰다.
지키고 싶은 가정이 생겼고, 보고 싶은 자식이 생긴 사람이 목숨을 걸고 희망의 불씨를 살려냈다.
"용사, 네 기분을 알아. 네게 무왕은 정말로 소중한 친우였으니까."
부상에서 바로 눈을 뜬 용사가 전투에 나서려던 것은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일 거다.
지금까지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으며, 라파엘의 종족은 그녀를 제외한 모든 천사족이 전멸 했을 정도였다.
"나도 참고 있어, 난 이웃, 친우, 연인, 가족, 모두를 잃었어, 당장에 마왕이란 존재를 죽이고 싶은걸 참고 있어."
더 이상은 대륙에서 같은 종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외톨이가된 라파엘도.
새롭게 생기게 된 동료마저 잃어버린 라파엘도 참고 있었다.
"아직은 힘이 부족하니까, 당장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참아야 돼."
힘이 생길 때까지.
"우리의, 네 손이 닿을 때까지."
버텨야 한다.
"참아야 돼, 세상에서 마왕이란 존재를 지우려면."
마왕을 이기기 위해서.
"강해질게. '용사'로서, '희망'으로서, 그 누구도 닿을 수 없을 만큼 강해지겠어."
☆☆☆
시간이 흘렀다.
용사는 강해지는 동안 마수들의 생태를 조사하면서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만들었고, 마수들의 강함에 따라서 등급을 나누는 행위도 하였다.
그와 동시에 마수들과 싸우는 용병들의 강함에도 등급을 나누 었는데, 처음에는 용병들도 반발 하였지만, 용사가 제시한 마수의 공략법과 등급에 맞춰서 마수를 사냥한 덕에 올라간 생존율을 보면서 등급제에 수긍을 하게 되었다.
용사가 만든 등급제를 따르는 것은 비단, 용병들 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들도 등급제를 따르면서 생존율을 높이는 것에 주력했고, 그 결과는 하급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의 성장은 마수를 위협적인 존재에서 대항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환시켰고, 세상에 멸망이라는 절망에서 승리라는 희망이 피어나도록 만들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지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던 일을 해낸 것만으로도 용사는 역사에 길게 회부 될 만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하하하! 공략법이 있으니까, 그다지 무섭지도 않네!"
한 용병파티가 거대한 파충류 마수를 쓰러뜨렸다.
"뭐 였지? 이 마수의 이름."
구분하려면 명확한 이름이 필요한 법.
형태로만 구분되던 마수들을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 것도 용사가 한 일 중에 하나였다.
"고르.. 고르곤! 분명히 시야에 들어가면 분명히 돌이 된다고 했지? 돌덩이로 만드는 능력이 무력화 된다면 전투력은 반감 된다더니, 정말이었네..."
설사 반감 되었다고 해도 마수의 힘은 강했지만, 전체적으로 성장을 이루고, 그 강함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이 정도면 우리도 다음 단계를 노려볼 만하지 않나?"
"아서라, 우리가 다음 단계를 사냥해도 된다고 허가가 나오지 않으면 안 하는 것이 좋아."
동료의 말에 다른 용병이 투덜 거렸다.
"에휴.. 알았다, 알았어. 나도 그냥 해 본 말이다. 그래도 불과 전까지만 해도 위협적이던 마수가 이렇게 쉽게 사냥할 수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그 말에 동의하는 용병도 있었다.
다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마수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지를 매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수일 전에 목격한 한 마수와 용사의 전투를 목격하지 못했다면 잊어버렸을 마수의 강함.
"펜릴이었나? 난 둘이 싸우는 걸 보지도 못했다, 뭐가 그렇게 빠른지.."
"볼 수 있는 거긴 해? 누구 본 사람!"
...
조용했다.
누구도 둘의 싸움을 보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용사가 압도했었지, 펜릴이 부상을 입고 도망쳤잖아. 용사가 강한 거야, 아니면 펜릴이 생각보다 약한 거야?"
"네가 한번 싸워 보던지."
죽으라는 말에 새로운 전달 법인 것 같다.
"..그냥 용사가 강한 거지, 뭔 말을 못 하게 만드네."
"그건 그렇고, 마왕이나 펜릴을 제외해도 그런 마수가 둘이나 더 있다는 거잖아, 으... 무서워서 살겠나."
용병이 소름 돋는 듯한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부상자는 있나, 용사파티가 와서 성녀님도 왔으니까, 우리도 성녀표 치료 마법 좀 받아보자."
부상자는 없었다.
"나 지병인 무릎통증이 도졌어!"
"난 허리가!!"
"아이고 배야!"
단체로 없던 병까지 만들었다.
"두통이!!!"
그건 부상자를 물어보던 용병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들은 단순하게 용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성녀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다들 아픈 곳도 있으니, 어서 빨리 성녀님 좀 보러 가.. 응? 저 모래들은 뭐지?"
용병은 성녀에게 달려가려던 것을 멈추고 멀리서 올라오는 거대한 모래바람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쪽으로 다가오는 모래바람을.
"?! 당장 도망가!! 마수 무리..! 마수 무리의 습격이.."
용병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마수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발 빠른 마수들이 그들에게로 도착한 상황이었으니까.
"크아악!"
☆☆☆
깡깡깡깡!!!
"습격이다!!! 마수 무리가 왔다!! 무리의 수는.. 아니, 대군이다!!!"
감시병이 경고종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마수들이 습격을 감행했다.
"큰일이에요! 지금, 이 마을에는 마수 대군에 대항할 전력이 없어요!"
성녀가 소리쳤다.
용사은 도망친 펜릴을 쫓느라 잠시동안 자리를 비웠다.
라파엘도 마탑에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이 상황에서 일어난 습격이었다.
목적은 아마도 성녀.
어느 정도의 마수라면 성녀 혼자서도 대응이 가능한 수준이었고, 무리 수준이었다면 성녀와 이곳의 전력으로도 대응 할 수 있었지만, 대군 수준이라면 무리다.
무왕이 희생했을 때의 수준이라면 더더욱.
감시병이 저렇게 당황할 수준이라면 분명히 대응이 힘든 수준의 대군이 습격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용사는 드디어 마왕을 압도할 성장을 이루었다.
성녀도 라파엘도 압도하지는 못해도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을 이루었다.
전투가 전문인 라파엘과는 달라도 대적은 할 수 있다.
혼자였다면.
성녀가 혼자였다면 전투를 하다가 무리이다 싶으면 도망을 치면 될 일이다.
적당한 무리였으면 이곳의 전력이 후퇴할 시간을 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적은 무리였으면 사망자를 내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망루에 올라서 본 마수의 수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무리가 아닌 대군.
저편을 까맣게 물들이고, 이동만으로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마수의 대군이, 수조차 헤아릴 수 없는 대군이 성녀를 노리고, 이곳에 있는자들의 목숨을 인질로 습격하고 있었다.
"어째서, 평화가 손에 닿을 곳까지 왔는데..!"
마왕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된다.
그것 단 하나만 남았는데.
막아야 한다.
이곳을 제국의 최후처럼 슬픔에 잠기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성녀님... 여기는 저희가 막아 보겠습니다. 도망치세요. 성녀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해야 합니다."
망루의 감시병이 말했다.
보다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성녀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표정에서 전부 보입니다."
"저는.."
"아닙니다, 저 마수의 대군은 '우연히' 이곳을 습격한 것이며, 절대로 성녀님이 동료와 떨어졌을 때를 노리고 습격한 것이 아닙니다."
감시병이 성녀의 말을 끊고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희생한다고 저희 모두가 살 수 있습니까? 아니요, 아닐 겁니다. 단순한 개죽음이 될 뿐이겠죠."
그러니 어서 도망치라고 하고 있었다.
성녀가 도망친다고 해도, 이곳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무의미한 죽음을 피하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각오를 마친 표정으로 무기를 들었다.
어린아이나 힘이 없는 노인들을 대피시키고 무기를 들 수 있는 자들은 모두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구요? 아니요, 두고 갈 수 없어요."
성녀의 말에 감시병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반박하려 했지만, 성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바람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알아요, 감시병님이 말하신 것이 최선의 방법이에요. 제가 남는 건 어리석은 방법이죠, 용사파티는 서로의 위기 상황을 곧바로 전할 수 있도록 통신구도 가지고 있어요, 즉시 위기라는 통신을 했으니, 두 사람 다 이곳으로 달려 오겠죠."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그들이 찾아오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마수의 대군에게서는 피난자들 구할 시간을 맞추는 것이 고작으로 보인다.
그것도 도박에 가깝게.
성녀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자신의 목숨이냐, 아니면 이들의 목숨이냐.
두려워하며 피난길에 나선이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이냐, 죽음을 각오한 자들을 희생시키며 도박을 할 것이냐.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는 알아도, 저는 포기할 수가 없어요. 더 이상 누군가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요."
무왕이 자신을 희생시키며 모두를 구했을 때 각오를 했던 건 용사만이 아니었다.
라파엘도, 성녀도.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서의 희생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일부는 피난민들의 호위를 맡으세요. 그리고 용병들이나 싸울 수 있는 이들을 모두 모아주세요. 회복과 일부의 전투는 제가 맡을 게요."
성녀가 가련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저는 바보 같은 사람인가 봐요, 당연한 선택도 하지 못 하는 걸 보면요. 하하..."
당연해도, 도망치는 것이 아니어도, 모두를 위한 선택은 이곳에서 성녀만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어도.
그런 선택은 할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성녀님. 성녀님은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한 선택이란 것은 없어요."
감시병도 자신의 무기를 들고서 망루를 내려가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성녀님은 살리겠습니다. 성녀님을 살리고 피난민들도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감시병도 망루에서 사라졌다.
"저는 죽지 않아요, 죽어도 로자리아로, 에고웨폰으로서 살아가게 돼요."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못한 이기적인 고백.
설사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세계에서 존재가 지워 진다고 해도 여신에게 허락 받았던 두 번째 삶.
"그래도.. 죽는 건 조금 무섭네요, 용사님과의 추억이 사라질 거 같아서요."
성녀로서의 마지막.
이기적인 선택을 해버려서 슬퍼할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두 번째 삶을 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윤회에 들어갈 저들에게 사과하며.
성녀는 마지막 삶을 내던졌다.
☆☆☆
성녀가 보내온 신호.
짧은 신호였다.
마수의 대군이 습격했다.
그 짧은 신호만을 남기고 성녀와의 통신은 끊겼고, 다시 연결되지도 않았다.
"라파엘! 아녜스는..! 아직도 통신이 안 돼?!"
성녀가 있는 곳에 가장 빠르게 도착하려면 [전이]를 하는 것이 좋았지만, 마수가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력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용사는 즉시 [전이]를 하려고 했었다.
<두 분,="" 꽉="" 잡으세요.="" 좀="" 더="" 속력을="" 높힐게요.=""/>
용사와 대치 중이던 펜릴이 상호불가침을 조건으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속도로 데려다준다고 막아선 것이다.
"펜릴! 당신을 정말 믿을 수 있는 거야?! 당신도 결국은 마수 잖아!"
라파엘이 조금은 늦은 감이 있었어도 물어볼 것은 물어 볼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과 싸우는 마수의 도움을 받을 줄을 몰랐으니까.
<저 처럼="" 오래="" 산="" 자들은="" 전부,="" 제멋대로예요.="" 믿든="" 안="" 당신의="" 자유지만,="" 전="" 적어도="" 제가="" 한="" 말은="" 지켜요.=""/>
공중을 내 달리며 말했다.
<그리고 레비아탄="" 그와는="" 오래살다="" 보니="" 알고="" 있는="" 사이일="" 뿐이지,="" 친구="" 같은="" 웃기지도="" 않는="" 사이가="" 아니에요.="" 하!="" 니드호그라면="" 모를까,="" 전="" 뱀새끼와="" 개새끼는="" 싫어요.=""/>
은근슬쩍 엘프들과 세계수의 골치거리인 니드호그와는 친구라고 말하고 있었다.
<곧 도착...="" 마수들은="" 전멸한="" 것="" 같네요.=""/>
수많은 마수의 사체와 사람들의 시신.
그리고 많은 사람이 지키려고 한 듯한 인물.
타닥.
펜릴이 땅에 도착하자, 용사는 그 인물에게로 뛰어갔다.
"아녜스!!"
그녀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리면서 떠졌고, 초점을 잃은 두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용.. 사님? 거기, 계신가요? 쿨럭! 피난민들은 모두 무사히..."
"아녜스! 제발... 그만.. 아니, 금방 치료를..."
용사가 절규하면서 성녀를 끌어안았고, 그녀에게 치료마법을 쓰면서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아녜스, 제발.. 제발.. 죽으면 안 돼, 제발 죽지 마..!"
그것은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혼자말에 가까웠지만, 그걸 들은 성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으니, 상관은 없었을 거다.
"용사님.. 후후... 마..지막에는 볼 수 있어서.. 다행이.. 쿨럭! 에요.."
"치료하고 있으니까..! 아녜스! 알았으니까 제발, 말하면 안 돼!"
용사의 치료마법도 효과는 미미했고, 보다 못한 라파엘도 치료를 거들었지만, 역시 효과는 없었다.
"그만.. 용사님... 하아.. 그만요, 이미... 내장이 터져 나갔어요.. 그러니... 제 마지막 말을... 전하지 못하면.. 안.. 돼요.."
"미안 해.. 아녜스... 내가 미안..."
용사와 라파엘은 소용이 없다는 성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저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치료마법을 걸고 있었다.
"저.. 용사님과 여.. 쿨럭! 여행.. 하기를 잘했어요... 많은.. 사람을.. 살.. 쿨럭! ...리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우고, 사랑을 해 보고, 웃고, 떠들고, 슬퍼하며."
자신의 입에서 소리가 나오는지도 확실하게는 모른다.
"수많은 추억이 생겼으니까, 아무리 이야기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추억이 생겼으니까."
당신을 따라 나서길 잘한 것 같아요.
그때의 노신관이 자신을 등을 떠밀어 준 것에 감사해요.
당신과 여제가 자신을 찾아준 것에 감사해요.
여신님이 자신에게 세상을 구할 힘을 준 것에 감사해요.
세상을 위해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해요.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던 것에 감사해요.
"당..신을 따..라 나서길.. 정.. 말..로 잘.. 했어..요.."
몸에 느껴지던 고통이 사라져 간다.
"ㅅ..ㅏ 라..ㅇ 해요.. 요.. 사.ㄴ.."
저의 용사님, 저의 친구 라파엘.
우리의 작은 친구 카르마.
마왕이 당신들을 해할 수 없기를, 마왕의 존재가 당신들을 막아설 수 없기를...
로자리아의 '기적'에 빛이 일어나면서 그들에게 한 가지의 기적이 깃들었다.
당신들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어떤 기적에 그들에게 간 것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각자가 하나씩 받았을 수도 있고, 모두가 한 가지의 기적으로만 받았을 수도 있다.
다만, 죽어 가는 자신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이것이 전부였다.
'성녀'로서의 삶이 끝나고, '로자리아'로서의 삶이 시작한다고 해도, '성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지금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성녀'는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
신비로운 공간.
황혼에 물든 이 공간에 알록달록한 식물들이 자라난 온실속.
"아녜스, 제 사도여."
"여.. 신님?"
온실속의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는 결국..."
여신은 성녀를 끌어안으면서 사과했다.
"제가 모자란 탓이에요, 사도여, 제 성녀여. 당신에게 큰 짐을 안겨 주고 결국에는.."
"여신님, 제 선택이었어요. 그러니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고,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들을, 용사를 떠올리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버티기가 힘들었다.
"흐윽..! ㄱ.. 괜찮.. 흑! 저는 괜찮은데..!"
잊어 버리고 싶지 않다.
잊고 싶지 않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떠올리고 싶다.
"허어엉! 여신님..! 제발..! 제 기억을 가져가지 말아 주세요! 흐윽! 제발요..! 그 사람의 기억을 잊어 버리고 싶지 않아요..! 카르마를 떠올리고 싶어요..! 라파엘을..! 샤트룩스를..! 모두를 기억하고 싶어요..!"
이제는 기억 속에서 사라진 여제도 떠올리고 싶었다.
어째서 사라져 버린걸까, 어째서 그 작고 소중한 아이를 기억할 수 없는 것일까.
자신도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사랑하던 그에게 잊혀지는 것일까.
두려웠다.
잊혀질까 봐, 잊어버릴까 봐.
더 이상 자신이 아니게 될까 봐.
"당신과 그 아이를 고생만시킨 제 잘못이에요, 그 아이의 소원도 당신의 소원도 들어 주겠어요."
여신은 성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는 성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여제, 로물루스에게는 용사와의 여행을 당신에게는 용사와의 기억을 남겨드릴게요. 용사는 이미 마왕을 이길 수 있는 존재예요. 더 이상 당신의 동료가 죽는 일은 없을 거예요."
"흐윽! 저.. 정말인가요? 여신님.. 저는 용사님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아도 되나요? 흑!"
여신이 미소를 지으면서 끄덕였다.
"비록 용사와 만났던 날 이전의 기억은 남지 못하지만, 그 이후는 남겨 드릴 거예요. 당신과 로물루스 뿐만 아니라, 샤트룩스의 소원도, 라파엘도, 용사의 소원도 들어줄 거예요."
"어.. 그러면 여신님의 힘이.."
이미 다섯 번의 기적을 허락했기 때문에 여신은 많은 힘을 빠져나간 상태 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소원까지 들어준다면...
"까짓거, 몇백년 동안 잠수타면 되죠! 별일이 생기겠어요! 후후후."
그 여신에 그 성녀라고 해야 하나?
여신은 자신에 이상한 예술감각과 특이한 성격이랑 어울리는 사람을 사도로 정한다.
"그.. 렇겠죠? 설마 세계수님이 여신님 없다고 날뛰는 거 아닐까요?"
"에헤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무슨 수로.. 하이엘프의 교육이 잘못되면 모를까.. 우후후."
여신은 손을 흔들면서 부정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가세요, 비록 그가 떨어져 버렸지만, 언젠가 둘이 다시 만나기를 기원할게요. 제가 아끼는 제 첫 번째 사도여."
"여신님?"
시야가 멀어지고 세상이 어두워졌다.
☆☆☆
<그렇게 눈="" 떠보니까,="" 어둡고="" 먼지="" 냄새나는="" 드워프의="" 창고였다="" 이거죠.=""/>
어떻게 눈을 떠야, 전장에서 드워프의 창고로 옮겨질 수 있는 거지?
"검순아, 목걸이가 성녀로서 사망하고 그 뒤는 어떻게 됐어?"
<아이 깜짝이야!="" 소피아,="" 그대는="" 언제="" 깨었는냐?!="" 신호="" 좀="" 주고="" 들어오거라!=""/>
용사가 병상에서 일어났을 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잠만 잘 수는 없다.
그리고 저 둘 말고는 내가 일어난 것쯤은 알았을 거 같다.
"그래서 다음은 검순아, 궁금하단 말이야."
마침 네 본명도 들었다.
용사가 마왕을 이겼다는 건 알고 있지만, 다른 건 모른단 말이다.
'뭐야, 이 일 처리하다가 끊긴 기분은..'
"라파엘은? 용사는? 목걸이가 어째서 드워프의 창고로 들어갔는데?"
<에잇! 본녀도="" 모른다!="" 용사가="" 본녀와="" 로자리아를="" 라파엘에게="" 맡기고,="" 혼자서="" 일반="" 검을="" 들고="" 쓰러뜨리러="" 가는="" 바람에="" 뒤는=""/>
이런 쓸모없는 검을 봤나!
마치 어느 소설가 같이 쓸모없지 않은가!
'가름은 아려나? 라파엘은 이미 수백 년 전 사람이니까 죽었을 거고, 어라? 그러면 인간인 용사는 어째서 내게 죽을 때까지 살아있던 거지?'
가름을 불러와서 궁금한 뒷이야기를 물어봐야겠다.
모 소설가처럼 쓸모없는 카르마에게 물어보지 말고.
"어! 했어!"
<이익!/>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