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공성전:하루 신기루
* * *
요새 바깥에서 수성을 하던 인족군의 정리가 끝났다.
인족의 육편으로 이루어진 광경은 참혹하다고 볼 수 있었다.
시신의 형체를 알아볼 수나 있으면 다행일 것이다.
잘게 갈려 있는 시신, 찢겨나간 시신, 압사해서 터져 버린 시신등.
형체조차 알 수 없는 시신이 허다 했으니까.
"많이들 도망쳤네."
숨을 고르면서 머리에난 혹을 문지르는 범인 1.
"전멸보단 꼴사납게 후퇴한 것이 더 사기가 떨어져."
도망치는 적군을 놓아준 범인 2.
이 시산혈해를 만든 공범들의 대화였다.
"전력, 감소, 최우선?"
리노 번역기, 라나가 '전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최우선 아닌가?'라고 번역해 주었다.
리노의 말도 맞는 말이었지만, 고개를 흔들면서 이런 상황은 다르다고 답해주었다.
"이런 학살같은 전투에서는 몰살보다 놓아주는 게 이득이야."
단순한 전투에서는 전략상 후퇴, 그리고 동료의 죽음에 복수심을 불태우게 만들어서 사기를 올려 준다.
전멸은 사기는 떨어뜨리지만, 이 전투를 직접 목격한자가 없어서 큰 효과는 없다, 오히려 병사들에게 끝까지 맞서 싸웠다면서 용맹한 전사라는 이미지를 씌워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학살에서 살아남게 만들면 이 전장이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해주지.'
공포는 전염된다.
꼴사납게 도망친 병사들로 하여금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질 것이다.
제 아무리 복수를 다짐한다고 해도,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동료를 보면 심리적으로 압박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전사로서의 기조가 강한 수인족이나, 거인족이 아닌 이상에야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포는 요새 내부를 잠식하고, 인족에게 퍼져나갈 것이다.
'좀 더 손쉽게 함락시킬 방법이지.'
☆☆☆
인족군이 후퇴한지 수시간이 지났다.
그들이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휴식과 재정비를 마치기로 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자는 없었지만, 자잘한 상처를 입은 자들은 어느 정도 있었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유독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지룡들이었고, 그들의 단단한 비늘도 수많은 공격에는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감사하오, 마왕.=""/>
치료가 끝난 지룡이 감사를 전해왔고,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치료는 끝났고... 이제는 후퇴한 인족이 요새에 도착할 즘까지 휴식인가?'
시연도 첫 전투로 인해서 나온 부상자에게 의약품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이곳에 도착했고, 치료가 모두 끝났기에 할 일이 없어진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오빠, 리리스가 돌아올 때는 각오하래."
'음... 공성전은 길게 진행해야 겠네, 요새에 놔서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말려 버려야지...'
"아! 참고로, 늦게오면 늦게올 수록 '벌'은 가중처벌 되니까, 알고는 있어."
사흘, 사흘 안으로 함락시킨다.
☆☆☆
휴식을 마친 군을 다시 진격시켰고, 인족이 모여 있는 요새에 도착했다.
시간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초저녁 즘이었다.
군의 일부는 야영준비, 일부는 경계를 세우면서 요새를 감시했다.
요새 뒤편으로 빠져나오는 인족무리.
파발이었다.
부상이 없고, 비교적 젊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물에다, 이 요새에 발령이 된 지 오래지나지 않은 신병들로 보였다.
'남은 인족은 목숨을 걸은 건가?'
아직 공포가 퍼지기에는 시간이 짧았던 것 같다.
그것도 사흘이면 해결될 것이다.
"리노, 파발은 놓아 줬으니 포위하기 시작해. 이제부터 저 요새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시체뿐이다."
"확인."
자신들을 희생해서 소식을 전달하라, 여긴 우리가 맡을 터이니 너희는 지원군을 끌고 와라.
프레디를 처음 본날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이기적인 인족이 이럴 때만 목숨을 걸고 영웅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구역질이 밀려왔다.
무지 덕에 각오를 했겠지만, 그 각오는 사흘 뒤면 처절한 비명과 비참한 목숨 구걸로 바뀔 것이다.
'자신이 도망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정도로 비참한 구걸로...'
"로자리아, 역시 보기는 힘들지?"
<...일단은요, 하지만="" 참아="" 볼게요.="" 그="" 피의="" 바다가="" 전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니="" 보기가="" 힘든="" 거니까요.=""/>
"카르마, 업보수치는 어때?"
<아직은 악하게="" 변할=""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그대가="" 인족에게="" 내리는="" 벌로="" 판단했기에="" 적은="" 것으로="" 보이느니라.=""/>
본래 성녀였던 로자리아만은 조금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인족만의 성녀가 아니었기에 편애에 의한 불편함이 아닌 다툼에 의한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르마의 입버릇처럼 그들의 업보였기에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선은 나부터 한 방.'
한 발의 마법을 쏜다.
쾅!
소리는 요란했지만, 요새는 흠집조차 없었다.
"오빠, 너무 약하게 공격한 거 아니야? 아니면, 저게 튼튼하다든가."
"응? 아... 저 요새는 나중에 마왕군의 요새로 바뀔 거니까, '겉'은 부수면 안 되지."
파괴를 목적으로 마법을 사용했으면 10위계마법을 사용했을 거다.
"이거는 희망주기용."
"희망주기? 희망을 왜줘?"
그거야.
"희망이 인 줄 알고 잡았지만, 희망이 아닌 미끼였을 때는 어떨거 같아?"
"어... 좆같겠지?"
"시연아 이쁜 말."
"허탈하겠지?"
그래, 사막에서 마주친 신기루 처럼 닿을 듯하면서도 영원히 닿지 않는 그런 희망을 향해서 달려갈 것이다.
결국에는 신기루란 것을 깨달아서 돌아서려 하지만...
"이미 자신들이 독 안에 든 쥐였다는 걸 알게 되겠지."
알아버린 뒤에는 이미 늦은 쥐덧.
자신들을 지켜 주는 '요새'는 자신들을 가두는 '우리'가 되어서 숨통을 조이겠지.
'다시 한 방.'
쾅!
여전히 소리만 요란한 마법.
"오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오빠지만 이럴 때보면 참 사악한 것 같아..."
<음! 리리스가="" 소피아를="" 상대할="" 때,="" 얼마나="" 머리가="" 아팠겠지="" 알겠느냐!=""/>
카르마가 턱을 치켜들었지만, 그거 리리스 앞에서 하면 너도 혼나고 나도 혼난다.
앞으로는 하지 마라.
쾅!!!
☆☆☆
해가 거의 다 기울어졌다.
곧 있으면 어두운 밤이 될 것이다.
쾅!
또 포격음이 울렸다.
마왕군이 쏘는 마법에도 요새는 건재했다.
"저거 계속 공격하네, 히히히!"
"멍청하네, 이 정도면 효과가 전혀 없다는 것도 모르나 봐?"
수시간 전에 전선에 나가 있던 부대가 겨우 후퇴를 했을 때만 해도 비상이었다.
자신들은 최전선에 배치 되어 있는 만큼 오래도록 전투를 해온 자들이었다.
그런데 후퇴한 자들은 도저히 베테랑 병사라고 볼 수가 없었다.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는 사람은 양손에 꼽았고, 심한자는 살이 뒤틀리고 팔다리는 어딘가에 잃어 버리고 도착했다.
숨이 붙어 있기에 같이 후퇴했다고 했지만, 돌아왔을 때의 그는 이미 명을 달리했고, 그를 제외한 몇 명도 이미 숨이 끊어졌다.
요새에 있던 지휘관은 위기를 직감하고 신병들을 불러모아, 기마술에 가장 능한 몇 명만 뽑고 파발을 명목으로 탈출시켰다.
지휘관은 그들이 도착할 즘에 이 요새는 함락 돼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시간을 벌 동안 다음 요새에서 마왕군을 방비하라고 서류를 작성하고 맡겼지만.
"꼴을 보니까, 우리 지휘관님이 잘못 판단 했네. 크크크.."
오히려 저런 멍청이들이 있는 군에게 당해서 돌아오다니, 명색의 최전선 군대라는 이름이 울고 갈 것이다.
"그러게, 그냥 오합지졸인데? 저것도 전략이라고 움직이는 건가? 지휘관이 누군지 궁금할 정도네! 거인족과 용족을 데리고 저런 병신같은 전략밖에 못짜고 말이야."
초보자의 눈에는 촘촘한 포위진으로 보이겠지만, 전장을 오래도록 경험한 자신들에게는 간간이 비어 있는 부분이 보였다.
"야아아! 병신들아! 대열을 그렇게 짜는 게 아니다! 내가 뱉는 침으로 만드는 대열이 그것보단 더 훌륭하겠다!"
하하하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동료의 조롱을 듣고서 같이 비웃었다.
쾅!
구구구...
이상하게 잠깐 흔들렸던 것 같지만, 단순하게 포격의 위치가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얼핏 보면 회색머리를 한 여자가 다리를 동동구르면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야, 마법사 좀 불러서 확대해서 감시하라고 해 봐. 뭐 하고 있나 좀 듣게."
잠시 후에 한 명의 마법사가 오더니, 망원 마법을 사용해서 여자가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어디 보자... 머리 검은 년이 허리를 잡고 말리고 있는데? 회색년은 어... 이쪽으로 손을 뻗고 가운데 손가락만 올리고 있네."
"하하하! 들었냐? 요새에는 손도 못 쓰고 있는 년을 '말리고' 있단다! 아하하하하!"
하하하하!
"음... 어? 잘못 봤나?"
"뭐야, 또 뭔데?"
마법사는 머리를 긁으면서 연신 '잘못 봤겠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금 본 마법진이... 그러니까, 예전에 운이 좋아서 본 대마법사님의 9위계 마법이 있거든? 그 마법진이랑 비슷해서..."
잠깐 소름이 돋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기 있는 회색머리의 여자가 9위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까아암짝이야... 네 말이 사실이면 저게 대마법사님이랑 동급이란 거잖아, 마왕이 10위계 마법사라는데. 회색년이 마왕이란 소리냐?"
병사는 어쩌다가 정답을 맞췄지만, 요새가 무너지지 않게 조절해서 사용한 마법 덕분에 마법사가 잘못 본 것이라며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은 이런 위험한 최전선에 나올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여왕도 그렇고, 마법국 디퍼루드의 왕도 어지간하면 최전선은 피한다고 했으니까.
"음... 아니겠지, 나도 명색의 마법사인데 마법진을 몰라 볼까, 비슷한데 다른 마법이야."
그럼 그렇지.
아마도 한참은 떨어지는 하위 마법일 것이다.
쾅!
여전히 소리만 크고, 요새는 끄떡도 없는 폭격이었으니까.
☆☆☆
"놔! 시연아, 놔! 저... 저 새끼, 뚜껑 따버리게! 뭐?! 병신?! 벼어엉시이인?!"
"오빠! 진정해! 저거 나중에 다시 쓴다며!"
다른 건 다 참아도 병신취급에 전략도 못짜는 허접취급은 참기 힘들다.
나는 다시 한번 손으로 산을 뜻하는 수화를 날려 주면서 외쳤다.
"이 새끼, 니 뚝배기는 내가 반드시 따버린다! 허접새끼가 감히 나를 허접취급을 해! 이게 큰 그림인 줄도 모르는 허접새끼가!!!"
"오빠! 이쁜 말! 이쁜 말!"
"평생 딸딸이만 쳤을 거 같은 새끼야♡ 뚝배기 관리 잘해라♥"
"말끝에 하트 붙여도 이쁜 말이 아니라고 노답아!"
☆☆☆
완전히 져 버린 해가 오늘 하루가 끝나갔다는 것을 알렸다.
"하아..."
<소피아님 진정하셨어요?=""/>
"응."
<소피아는 예전부터="" 이런="" 취급에는="" 잘도="" 발끈했지.="" 시연,="" 소피아는="" 고향에서도="" 그랬던="" 것이냐?=""/>
자주 그랬다.
특히 게임할 때.
게임이 잘 풀릴 때도 적팀이 'ㅋ'만 채팅방에 쳐서 도발해도 1대1 구도가 생기는데, 안 풀렸을 때는 오죽 하겠는가.
지금이야 전부 작전이었고, 적들은 훌륭하게도 이 신기루를 붙잡은 것 같았다.
"오빠가 게임할 때는 도발에 잘 넘어갔어, 아니 그냥 도발에 잘 넘어갔어."
아... 아닌데?!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시연은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예시를 들면서 물어보았다.
"오빠, '히. 좆밥아 그거 밖에 못해?'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거야, 걸려 오는 승부는 남자라면 받아들여야지.
"그래, 그거야."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선을 돌리는 시연.
"...저 그런데, 시연아?"
"응?"
"나 말로 하지는 않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거야?"
그녀는 표정으로 '내가 오빠 생각도 못 읽을 것 같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
아내들 중에서 내 표정을 못 읽는 사람은 없다지만, 시연은 그 능력이 거의 독심술수준이었다.
잠깐동안 시연에게서 멀어지는 동안, 리노가 이쪽으로 와서 포위가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마왕, 포위, 완료."
"그래? 수고했어, 리노. 내가 말한 대로 잘 숨으면서 포위 한 거지?"
"긍정."
나는 리노에게 이왕이면 눈에 띄는 전력은 틈이 많이 보이도록 배치하라고 했고, 비교적이게 눈에 띄지 않는 전력은 땅속이나, 바위 뒤에 숨어서 빈틈을 매우라고 지시했다.
요새에서는 그 빈틈이 비어 있는 엉성한 포위로 보였을 것이다.
'너무 비어 있으면 눈치채기 쉬우니까, 아주 조금만 엉성하고 전투를 오래 겪은 사람만 보이는 빈틈을 만들었지.'
그냥보면 촘촘해 보이지만, 경험이 부족해서 만들어진 빈틈.
이 포위진은 그들의 경험이 만들어 낸 함정이다.
전투를 오래한 사람일수록, 걸려들 수밖에 없는 전략.
인족군중에 내 마법이 단순한 견제용이라고 깨달은 자가 나와도, 이 포위를 하기위해서 견제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늘의 전투는 더 없을 것 같고, 간간이 견제만 해."
"의문."
어째서 그래야 하냐고 묻는 리노에게 이유를 알려주었다.
"이왕 신기루를 보여주기로 한 거,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어야지. 아마도 인족은 오늘 밤은 경계근무만 서고, 내일이 되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거야."
수 시간 전에 라나가 한 것처럼 정예 기마대를 이끌고서.
방어가 확실해지면 공격에 나서는 법.
첫 공격이니만큼 승리가 확실하다는 전력만을 내보낼 것이다.
수성을 할 때는 성이나 요새를 지키면서, 적 전력을 어떻게 깎아 내리냐가 관건이다.
공성을 하는 측은 내부로의 침입이 관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도 적의 전력을 깎을 수 있다면 좋다.
'뭐, 내일도 요새 내부에 틀어 밖혀 있어도 상관은 없지. 본격적인 공성은 내가 안으로 들어가고부터 시작할 거니까.'
손을 요새를 향해서 뻗었고, 다시 요란한 마법을 사용했다.
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