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분열의 전조
* * *
회담을 종료하고 자리를 나섰다.
데카라비아도 작성한 회담내용이 쓸모없다는 듯이 던지면서 나를 따랐다.
아직 열려 있는 전이진.
이 마력먹는 하마 덕에 가진 허세란 허세는 다부릴 수 있었다.
장시간 동안 대규모 전이를 유지할 수 있는 마왕.
이동할 위치만을 잘 알고 있으면, 대륙 어디든지 대군을 이동시킬 수가 있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력을 더 빨리 소모하지만... 뭐, 내 마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조차 가늠이 안 될 거니까.'
두려움을 주는 것이라면 아주 대성공을 했다.
"소피아님 주둔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글리아스부터 공격할까?
이왕이면 국경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용족과 거인족에게 진군을 명령해, 지룡들로 돌진공격, 그리고 적진을 중심에서부터 교란시켜."
지룡들의 돌진은 어지간한 공성추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가졌다.
'사람이 공성추를 흔드는 것보다, 뿔 달린 코끼리들이 더 무섭지.'
그것도 공성추보다 단단한 뿔로.
"거인족과 수인족에게는 미안지만 감수해 달라고 전해 줘."
마왕성 외부에는 군량을 옮기는 병사들로 분주했다.
전선의 병사들에게 나누어 줄 군량들.
'리노하고 벨 씨, 리우스 씨에게 반납할 것은 짜로 빼놔야지.'
두둑해진 지갑이 금방 얇아지는 것을 보면, 카드값이 빠져나가는 직장인의 심정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소피아님. 어떤 것을 감수하란 말씀이신지..."
"응? 당연한 거지, 전사로서의 긍지."
이 전쟁은 힘에 대칭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구조였다.
한참 전에 기울어진 대칭.
만약 내가 시간을 더 주었다면 조금은 회복했을지도 모르나, 이미 협상은 결렬되었다.
"도시는 불타오를 거고, 인족은 무너질거야."
전사로서 지켜야 할 것을 포기되는 날도 올 것이다.
"'전사'로서 긍지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병사'로서 종족을 지키라고 전해."
'개인'이 아닌, '단체'.
핍박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단체들.
"무기를 놓고 도망치는 자를 쫓아가서 죽이라고는 안 해, 강간하라는 소리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이라는 소리도 하지 않을게."
딱히 한다고 해서 말릴 생각도 전혀 없지만.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원한이 있는자에게 용서와 자비를 겸비하란 소리는 아니다.
'나만 해도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혹해 질 수 있으니까, 두 선택을 강제할 수는 없지.'
"그냥, 전쟁에서는 전사가 아닌 병사가 되어 달라는 말이야."
"전달하겠습니다."
데카라비아는 고개 숙여서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러면 나도 일을 마무리 짓고 나서 전장으로 향해야지.'
☆☆☆
마왕이 떠난 회담장.
고요한 적막만이 남아 있던 가운데, 이반이 적막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망했군, 일을 어떻게 할 셈이지? 대책이 있기에 마왕 앞에서 잘도 짓거린 거 아닌가, 로젤리아."
'대책... 아니, 제가 한 말이 도대체 어때서..!'
그런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시선도 이반을 보지 못하고 땅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만든 괴물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니까, 결국에 네가 세상을 멸망시킨건 너야.'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까.
자신 때문에.
'뭐가, 제 잘못이라는 건가요?! 인족과 전쟁을 선언한 것은 자신이면서!"
라인하르트가 따르는 건 자신이기 때문이다.
앨리스와 연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협력했던 것도 자신이 요청했기 때문이다.
파니아가 세계수의 말을 전한 것도 자신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프로그조차 제가 모은 인재예요.'
각국에서 모은 통일되지 않는 사람들.
분명 그 사람들을 모은 건 자신이다.
인재를 모으는 것이 자신의 힘이다.
누구보다 뛰어난 인재를 모은 것이 그 증거였다.
'지금은 제곁에 라인하르트 말고는 없어서 그래요, 다시 한번 무시하지 못할 힘을 모으면...'
"역시 대책이 없었군. 아니, 그냥 본인이 무얼 잘못했는 지 조차 인식 못하고 있어."
"...제 잘못이 뭔가요, 전 인류를 위해서 일한 것뿐이었어요. 그가, 그녀가 새로운 악이라는 예언만 없었으면..!"
"이용했겠지, 지금까지 계속."
"..."
이반의 말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짐도 딱히 떳떳하게 살아온 건 아니야, 짐이 보기에도 그래, 당연히 이용해야지. 그런 사기적인 힘은 이용해야 맞는 거지."
자신만이 아니다.
이반도 그를 이용하고, 받아 갈 수 있는 건 받아 갔다.
어째서 그는 자신만을 탓하는 것인가.
"그런데 말이야, 짐은 적어도 생각은 하고 움직이네. 일이 어그러졌다? 그러면 대책을 강구해야지, 자신의 대책이 통하지 않는 상대다? 그러면 납작 업드려서 기회를 노려라."
이반도 벗어나려는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래 짐은 왕좌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만, 자네는 처음부터 높았던 계승서열 탓에 고개 숙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어."
밖으로 걸어가는 이반, 그러면서도 말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실패를 하면서 배우는 건 좋지만, 지금은 실패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지지, 오래 걸려도 상관없으니 다음부터는 부디 생각을 하면서 행동했으면 좋겠군. 짐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다."
마지막 충고, 또 하나의 패가 사라져 버렸다.
앞으로 협력이 있더라도 형식상의 협력일 뿐, 자신이 따르지 않으면 이반은 다른 노선으로 일을 진행시킬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아쉬워서, 완전하게 갈라서지는 못하겠죠...'
그 패조차 잃어 버리면 세계에 자신과 글리아스가 설 자리는 사라질 것이다.
조용하게 멸망을 기다릴 뿐.
"하하하... 정말로 망했네요, 아아... 라인하르트, 하리... 당신만이 제 유일한 희망이에요."
☆☆☆
"전하, 글리아스와의 동맹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의 측근이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누구도 믿지 않는 자신에게 스스로 주종계약을 걸면서 들어온 측근.
"음... 일단 글리아스라도 있어야 하지, 짐의 선택대로 움직이겠지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가 있거든."
로젤리아의 개.
기사 라인하르트.
로젤리아도 인식하고 있겠지만, 그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힘일 것이다.
그가 사라지면 왕국의 귀족들은 당장에 칼을 빼 들고 로젤리아를 치려하겠지.
마왕에게 받쳐서 목숨을 구걸하려고 말이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마왕은 더더욱 분노하겠지만.'
자신이 먹을 걸 빼앗겼다고, 미친 듯이 날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자네처럼 스스로 주종계약을 건자를 제외하고 왕성에 있는 모든 인물에게 감시를 붙여라."
"로젤리아 여왕에 대한 대책입니까?"
'짐 곁에서 오래 일한 만큼 눈치 하나는 빠르군.'
"그래, 로젤리아는 언젠가 어리석은 선택을 할 거야. 아마도 그건 둘로 나누어진 인족의 우두머리를 하나로 줄인 다음에 모든 지휘권을 가지는 것이겠지."
지휘권을 가진 자가 둘이기에 밀리는 것이라며, 지휘계통을 하나로 통일 시킬 것이다.
확실히 둘로 나뉜 지휘자보다, 지휘자가 하나로 있을 때 더욱 효율적이다.
다만 그 한 명의 지휘자가 어리석은자가 아닐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어리석은자가 명령을 내리면 멸망을 앞당길 뿐이다.
'마왕도 로젤리아를 죽이는 것은 아주 나중으로 미루었으니, 긴장이 풀린 로젤리아라면 충분히 그런 선택을 할 만해.'
당장은 잠잠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모르는 일이다.
"주의해서 나쁠것은 없지, 하... 짐은 마왕만이 아니라, 로젤리아도 주의해야 하는 것이냐? 머리 아프군."
☆☆☆
"...니... 언니... 언니!"
"엉?! 어.. 응, 불렀어?"
리노가 나에게 첫 번째로 전투에 참여하길 바란다며, 잠시동안만 진군을 멈추겠다고 전했다.
그러기에 빠르게 일을 끝내고 전장에 나가려 했지만...
처리해도 처리해도 사라지지 않는 서류의 산을 보고는 정신을 놓고 말았다.
'아직 수 시간도 안 지났지만...'
탈주하고 싶다.
협상을 엎어 버리고 전쟁의 시작을 알렸기에 급한일을 먼저 처리하려고 했다.
리노도 수시간만 기다리고, 적측이 방심할 밤중에 습격을 하겠다고 해서 알았다고 전했다.
"언니, 이왕 시간이 남은 거 일하셔야죠."
이것이 Unlimted Page Work.
무한의 일감.
리노의 야습은 좋은 전략이다.
밤이라면 경계하는 인원을 제외하고, 수면에 취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오히려 적측이 잠도 안자고 버티면 환영이다.
거인족과 용족은 하루 이틀의 수면정도는 걸러도 문제가 없었지만, 인족은 수면을 거르면 머리부터 돌아가지 않으니까, 비틀거리는 적을 공격하면 되는 손쉬운 작업이었다.
'우리는 야습까지 쉴 수 있으니까, 편한 기다림이지.'
단지 미리 찾아가면 안 되냐는 내 말에 리노는 거절하면서 이유를 댔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병력이 집중되고 적을 극도로 경계시키는 부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이유를.
나는 그 이유에 긍정을 했다.
가만히 보면 리노는 전사라기보단 악랄함을 겸비한 싸움꾼이라 생각된다.
'라나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전된 지력이니까, 싸움꾼이 아니라, 생존자라고 봐야 하나?'
"언니!"
"허윽..! 할게..! 일한다고..!"
'아니, 너무하잖아!'
"허어엉..!"
아공간에서 내 장비를 꺼내고 장착해 갔다.
"어.. 언니?!"
"으허엉!"
밤까지 기다릴 필요가 왜 있는가.
그냥 지금 당장에 치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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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량 분배만하고 가려 했는데, 리노의 전략에 못다 한 일까지 하게 생겼다.
"언니! 지금 도망치시면 나중에 더 늘어나요!"
"몰라! 그건 미래의 내가 책임질 일이야!"
그리고 전장으로의 탈주.
현재의 일은 미래의 나에게로.
☆☆☆
"마왕?! 왜 지금..!"
"후우... 전군, 진격!"
불타올라라 화풀이 대상.
아니, 멸망에 저항하는 인족이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