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위선자
* * *
천막 안은 꽤나 깔끔했다.
원형 테이블과 세 개의 의자.
그리고 각국에서 나온 서기관들.
'그래, 여기서 나온 내용을 전부 기록해야 하니까, 당연히 있어야지.'
우리 쪽 서기관 중에 대표로 보이는 데카라비아.
잠입, 조사를 특화로 가진 인물들이기에 이런 일에도 적합했다.
다른 곳도 여러 서기관이 나온 것을 보면, 다른 나라의 서기관도 회담의 한 글자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이런 자리에 서기관을 한 명만 데려오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지.'
회담 내용을 받아적을 서기관도 부족한 것이냐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에 적당한 숫자가 필요한 것이다.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역시, 일은 잘해.'
데카라비아는 가장 큰 단점인 이상성욕만 없으면 완벽한 비서일 것이다.
사람이 어찌 장점만 가지느냐고 볼 수 있지만, 그녀의 식물, 광물, 가학성은 이해의 범주를 뛰어 넘었으니까 문제인 것이다.
'잘 적기는 하겠지...'
"음, 마지막 참가자가 들어 왔군."
이반의 말에 입구로 들어오는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직 공포가 완전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네.'
굳어 있는 표정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폼으로 수년간 파티원이었던 것이 아니니까, 대충 봐도 그녀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여야 할 텐데... 아니면 뭐, 로젤리아만 불리한 회담이 되겠지.'
"자, 어디 한번 말해 봐."
이반과 로젤리아, 그리고 내가 왕으로서 가지는 최초이자, 마지막 회담.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내가 다음에 이 사람들을 만날 때는 서로의 목에 칼을 꽂을 때겠지.
☆☆☆
"어머나, 이제 와서이지만, 꽤나 귀여운 모습이 되셨네요."
"내가 여기서, 특히 너랑 사담을 나눌 이유는 없은 텐데?"
자연스럽게 옛처럼 치고 들어왔지만, 저 대화를 받아줄 의무는 없다.
"팍팍한 회담중에 가끔은 공기전환용으로도 좋지 않나요? 사담."
"응, 난 팍팍한 게 좋아."
로젤리아랑 허물 없이 대화를 나눌 바에는 그냥 퍽퍽한 고구마를 물 없이 쑤셔 넣는 것이 더욱 시원한 청량감을 느낄 거다.
거기에 말을 뚝 끊고, 없는 인간 취급하면 빠르게 진정되는 위장약이 필요 없을 정도다.
"칫."
내 철벽에 기분이 나빠진 로젤리아는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아우~ 속 쉬원해!'
"짐이 바라는 것이라... 어차피 전쟁을 멈추라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고, 짐이 원하는 건 단 하나다."
턱을 괴고 있는 이반이 손가락 하나를 피면서 입을 열었다.
"준비기간, 준비기간을 주게나. 지금 당장 전쟁이나면 인족은 필패일세, 적어도 인족이 희망이라도 있어야 포기하지 않고 검을 들지 않겠나?"
"한 달이면 충분히 준 것 같은데? 둘 다 뒤에서 별 짓을 다하고 다녔잖아."
묘한 미소를 띄우면서 나를 바라보는 이반.
"우선 이반, 마르스와 그레고리. 그리고 운 좋게 살아남은 마탑의 마법사를 이용해서 로마노프의 영약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지."
"호오... 자네의 낮새와 밤쥐가 열을 올리면서 조사 했나보군."
항상 즐겁다는 듯한 미소를 지우고, 어떤 표정조차 없이 앉아 있는 로젤리아.
"열심히 국민들을 세뇌하고, 또 용사소환. 야, 넌 질리지도 않냐? 힘이 부족할 것 같으면 이계인을 소환하고, 네가 할 수 있는 거는 하나도 없니?"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전부 사용해야 하지 않나요? 자칫 인족이 멸망할 수도 있는 일에 당연한 것을..."
"쯧!"
한마디를 안지려고 한다, 한마디를.
"그래, 일단 그렇다 치자."
가장 중요한 것.
필요 없는 신경전을 제외한 본론.
"내가 왜 너희에게 시간을 내 줘야 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쪽에 승률이 떨어지는데, 안 그래?"
이쪽도 수많은 목숨을 책임지는 입장이다.
어떤 조건도 없이 시간을 내주는 멍청이로 본 것이라면 이 자리에서 협상을 종료 시킬거다.
"우선 첫 번째 조건이다. 전에도 말한 농업문제, 수확기가 끝났다고 해도 농작물을 심어 줄 시기가 필요하지, 설마 수확이 끝나고 살 떨리는 추위 속에서 전쟁을 시작하자는 건 아니겠지?"
'한 겨울에 전쟁이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겠다.
수확이 끝난 가을에 전쟁을 시작하면 당장에 농업 걱정은 없겠지.
문제는 겨울이다.
가을은 금방지나간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병사들은 적군만이 아니라, 추위와의 전쟁도 시작해야 한다.
얼어붙어서 검집에서 빠지지 않는 검.
높이 쌓여서 이동을 방해하는 눈.
살을 에는 겨울의 칼바람.
동상에 걸려서 떨어져 나가는 손발.
비교적 따듯한 지역이 아니면, 전쟁은 암묵적으로 중지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봄철에 찾아오는 파종기.
전쟁에 참여하는 인원을 제외한 소수의 인원이라도 파종을 해야 한 해를 버틸 수 있다.
한 번의 전쟁에서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전쟁이란 그것들을 뛰어넘는 명분이 있어야 하지.'
나에게는 복수와 타락한 인족에 대한 심판이라는 명분이.
마왕군에게는 억압과 차별, 그리고 생존이라는 명분이.
'식량이 떨어지면 생존이라는 명분이 흔들려, 인족의 군량을 받아 간 지금이 적기야,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하면 끝도 없어, 수확을 해야 한다, 한겨울에 전쟁은 위험하다, 봄에는 파종을 해야 한다. 곡식을 돌봐야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유들.
어느 한쪽이 지쳐서 포기할 때까지 사용 가능한 변명.
이렇게 평화롭게 살다가, 다시 시작되는 사냥과 학살.
"언제까지 그런 핑계로 미뤄야하지? 이반, 나는 벌써 한 번 진격을 멈췄어. 그리고 내 군은 전선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진군을 대기하고 있지."
내 명령이면 즉시 창칼을 들고서 인족령을 정벌할 대군들이.
"그 군을 물리라고? 거기서 발생하는 비용은? 설마, 오늘 받아 간 군량을 대가로? 그건 이 회담을 열어 주고 한 달이란 시간을 기다려 준 대가야."
지금 당장 전쟁을 멈추기에는 이득보다는 손실이 훨씬 컸다.
"이제, 첫 번째 이유가 사라졌네? 다음 이유를 이야기해 봐."
☆☆☆
"해서 두 번째 이유예요. 의외로 당연한 지도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어요."
왕의 의무?
어떤 의무를 해야 하기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거지?
"후계 문제예요, 후계자도 없는 왕이 사망하면 나라가 어떤 꼴이 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무슨 문제?
"그러고 보니, 이곳에 후계자가 있는 건 짐뿐이었네."
그마저도 나의 수중에 있지만, 전쟁 전에 후계를 만들어야 된다니, 그런 이유는 생각해 본적도 없다.
'아니, 필요한가? 왜?'
"저희도 목숨은 버린 건 아니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쉽게 이야기하면, 후계를 만들어서 왕의 전통성을 이어간다?
후계가 있으면 언제든지 반격의 명분을 세울 수 있으니까, 십수 년 뒤를 본 작업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로젤리아가 죽어도 글리아스의 왕족은 남는다, 그리고 최소 일 년이라는 시간이 생기니까, 무엇을 꾸미든지 대부분 이뤄낼 수 있을 거다.
이런 건 당연히 기각이다.
"안 돼, 내가 네 더러운 핏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둘 것 같아?"
"!! 뭐라구요?! 더러운 핏줄?! 나라를 세웠다고 기고만장하셨군요, 저는 글리아스의 전통성있는..!"
내 모독에 발끈한 로젤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소리를 질렀다.
콰아앙!
"기고만장한 건 너다, 로젤리아. 내가 지금 참고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 참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쉽게 잡혔다.
"처음부터 모든 걸 얻고 태어난 네가 처음으로 모든 것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만났으니 당황스럽겠지, '아...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됐는데, 왜 해결이 안 되는 거지?', '아... 보통은 내 지시를 따르는데 왜 저 마왕은 따르지 않는 건가?'."
내 목소리는 이 장소에 낮게 깔렸고, 방금 마력을 뭉쳐서 날려보낸 글리아스측 서기관을 제외하고,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귓속에 박혀 들어갔다.
"여기서 네 명령에 따라야할 사람은 없어, 네가 손에 쥔 '왕'이라는 패는 하등 쓸모는 패야."
타고난 권력자이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오만함.
용왕과는 다른 오만함.
'용왕의 오만은 자신의 강함에 있었어.'
그리고 로젤리아의 오만함은 그녀의 권력에서 나온다.
"용왕은 나와 전 마왕 탓에 묻혀 있던 거지, 그의 강함이면 충분하게 오만해 질만해."
'아무리 오만해도 힘으로 증명했고,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에 둘 만한 강함을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로젤리아 너는 뭐지?"
그저 운이 좋아서 얻은 권력.
"1왕녀로 타고 났기에, 최강의 기사가 네 것이기에, 인류의 대마법사가 네 친구라서, 교국의 성자가 동료라서, 세계수의 말을 전하는 하이엘프가 네 인형이라서."
무엇 하나도.
"무엇 하나도 네 힘으로 이룬 것이 없어."
1왕녀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룰 수 없었던 업적.
최강의 기사가 그녀의 것이 되지 않았으면 이룰 수 없었던 업적.
대마법사가 친구가 되지 않았으면 이룰 수 없었던 업적.
성자가, 하이엘프가...
"네 인류의 영웅이란 멋들어진 업적도 내가 없었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이름뿐인 왕녀, 여왕 로젤리아.
"저... 저는!"
"알아, 로젤리아 여왕. 네가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왕족으로서 나오는 오만함은 지울 수 없으니까. 하하하."
아무리 머리를 숙이려고 해도, 몸에 새겨진 습관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왕족.
"그러니까, 너에게 해 줄 말은 하나야. 이 회담이 끝나면 전쟁은 시작될 거야. 협상 결렬이란 뜻이야."
이반은 이마를 부여 잡고 한숨을 쉬었고, 로젤리아는 떨리는 동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규모 전면전은 안 해, 천천히, 매우 천천히 인족이 멸망해가는걸 지켜봐."
아무리 힘을 써도.
노력을 해도.
모든 것을 깨달아서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어도.
"뭘 어떻게 해도 손 쓸 수 없는 절망적인 강함이 무엇인지 보여 줄게."
절망의 끝에서 두려워하고 발버둥 치거라.
"혹여나 자결하지 말고 부디 끝까지 발버둥 쳐야해? 내가 직접 '위선자의 인류'를 처단하고, 그 '위선자'를 처단 할 것이니까."
너의 괴물이.
"네가 만든 괴물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이니까, 결국에 세상을 멸망시킨건 너야."
너를 죽이기까지 살아라 위선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