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연설
* * *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서류의 산.
사흘 동안 밀려 있던 업무였다.
"아~ 일하기 싫어..."
어째서인지 의욕이 끝없이 꺾여가는 서류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부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인 것을.
'그냥 말이라도 하고 싶을 뿐이지.'
"후우... 이건 소수민족이 마왕국에 복속하겠다는 서류인가? 어디 보자... 어? 소수민족은 아닌데?"
인어족, 수인족이랑은 사는 생태가 달라서 묶이지 않았던 종족.
'거기에 이 사람들은 물속에만 살아서, 전대 마왕이랑 안 엮였던 거로 아는데? 아... 이 사람들도 노예사냥을 당하고 있었군.'
쉽게 말하면 마왕국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한 종족으로서 일부의 자치권을 인정해 달라는 뜻이었다.
물론 무작정 보호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이나, 마왕국의 통화가 될 것으로 세금을 납부 하겠다고 전했다.
"인어여왕으로부터인가? 어? '가장 아름다운 딸을 마왕님의 후궁으로 보내겠습니다.'라고?"
이건 거절해야지.
뭘 더 늘리라고 하는 것이냐, 여왕이여.
요즘 복속하겠다는 종족들에게 어떤 소문이 돌았던 것인지, 자주 이런 조건도 들고 왔었다.
공주에 관한 건은 거절하겠다. 마왕국의 복속으로 이제 그대의 휘하에 있는 인어족은 전부 마왕국 크라이스의 국민이 되었음을 선포하고, 이후 인어족을 타국이 납치, 공격할 시에 마왕국의 국민을 공격한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하지.
마왕 소피아 드 리 크라이스.
"거기에 일단 납치 당하지 않게 하는 것도 포함해야 돼요, 언니."
"..."
추가 내용을 조용히 받아적었다.
"언니?"
"..."
다음 서류를 본다.
'군의 군량 배분 건인가? 음... 전부 공평하게 배분하고 싶지만, 거인족이나 용족은 먹는 양부터 다르니까.'
전체적인 인구수로 따지면 나름 공평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막 나눌 수도 없는 것이 아직은 세금을 걷지 않아서, 원래 종족들이 가지고 있던 식량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족장들에게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는 식량으로 군을 운용하라고 해야 하나? 빨리 이반한테 군량을 뜯어와야 하는데.'
이제 그들은 '정규군'이기에 개인의 자금으로 식량을 얻어 가는 것이 아닌, 군량을 받아 갈 권리가 있다.
하루라도 빨리 내가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책임져야 한다.
'일단 족장들에게 식량을 대여하는 형식으로 군량을 채운다, 인족에게서 회담을 대가로 받는 군량을 일부 이자를 줘서 갚고.'
리우스나 벨제부브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하겠지만, 거인족의 리노나 용족은 엄밀히 따지면 군신관계 이상이 아니기에 그냥 받아 갈 수도 없다.
공식으로 세금을 걷어갈 시기는 적어도 몇 달은 지나가야 할 것 같으니까, 당장으로서는 그 수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 각 족장을 불러서 한번 회의하기로 하자.
쾅!
"언니!"
"힛! 넷!"
아... 너무 무시했다, 리리스가 조금 화난 상태로 테이블을 내려 쳤으니, 적당하게 못한 내 잘못도 있나 보다.
"그... 실금건은 정말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어제 실금해 버린 이후로 토라진 나는 결국 혼자서 잠에 들었고, 지금까지 토라진 상태였다.
리리스도 눈썹끝을 내린 채로 사과를 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계속 미안하다고 전했다.
'다들 일하는 중간에 와서도 계속 미안하다고 했지...'
닉스도 오늘은 같이 있어야 하는 날인데, 참고서 집무실 밖을 기웃거리고 만 있었으니, 다들 반성은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
"응."
"저희도 조금 과했지만, 언니도 말도 없이 외박을 하셨잖아요?"
"...네."
그건 분명하게 내 잘못이 맞기는 하다.
"그리고 음주상태였다고는 해도, 미네르바를 실금 시킨적도 있구요."
"네..."
있었어요, 분명히.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게 기억난다.
"미네르바가 그날 이후로 따진적 있나요?"
"없었지."
그날 바로 복수했지 않았나?
"그러니까, 언니도 화를 풀어 주시면 안 되나요? 닉스도 저렇게 오도 가도 못하고 있잖아요."
<소피아가 속이="" 좁기는="" 하지.=""/>
조용.
<거참, 침대에="" 한번="" 지린="" 거="" 같고="" 너무="" 버티는="" 같죠?=""/>
그만.
"크흠! 미안, 나도 너무 오래 끌었던 거 같아. 닉스?"
솔직히 만 하루도 않지났지만.
"남편? 들어가도 돼?"
닉스는 문밖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응."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주며, 팔을 벌렸다.
도도도도.
잔걸음으로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헤헤, 남편..."
품에 안겨서 가슴에 머리를 비비고, 다시 내 무릎에 앉아서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나도 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안아 주었다.
'이런걸 보면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가 맞는 거 같네.'
토라져도 금방 풀리는 걸 보면.
"후후후, 언니 그러면 다시 일을 시작하죠. 저도 늘 하는 것처럼 보조할게요."
"응, 다음은 로젤리아의 즉위이후 첫 연설에 대한 보고인가?"
데카라비아로 부터 올라온 인족령의 근황이었다.
이건 일이 있을 때마다 바로 올라와서 빠르게 인족령의 소식을 알 수가 있었다.
'일이 없으면 일주일마다 몰아서 보고하라고 했지만, 연설이라...'
어떤 소리로 인족들을 현혹했는지 궁금해지는 보고였다.
☆☆☆
웅성거리는 시민들.
사람들은 아무리 통제하더라도 소문은 막을 수 없다.
마왕의 전쟁선포.
새로운 여왕의 즉위.
마왕국의 정식 건국.
어느 하나도 사람을 안심시킬만한 소식은 없었다.
특히 여왕의 즉위가 찬탈이라는 소문이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글리아스의="" 국민여러분.=""/>
로젤리아 여왕의 연설이 시작 됐다.
멀어서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확성구로 인해서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새로운 마왕이="" 탄생하였습니다.=""/>
그녀의 말에 시민들은 더욱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마법국도 공격당하고, 나라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녔는데 모르면 더 신기하지."
"아휴..! 이를 우짠데, 또 전쟁나는 거 아니여?!"
<마왕은 디퍼루드를="" 공격하고,="" 마탑을="" 무너뜨리면서="" 전쟁을="" 선포하였죠.=""/>
소문으로만 퍼지고 직접 일을 겪은 이가 아니면,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전부 여왕의 입에서 '인증' 되어갔다.
10년 전에 치열했던 그 전쟁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시민들은 그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마왕의 존재와 다시금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절망과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포로 몸을 떨었다.
아니, 이전의 전쟁에서는 희망은 있었다.
신화의 용사라는 희망이.
지금은 어떠한가, 신화의 용사는 전대 마왕과 함께 공멸했다.
"아휴... 우짠데, 참말로 큰일이구먼! 이제는 용사님도 없는디 이를 우짠디야.."
"거, 형님. 전에 새로운 용사님을 소환했다고 들었잖아요."
"요즘 세상이 뒤숭숭한 게 전부 마왕 탓이었어."
<그 마왕의="" 존재는="" 전대="" 용사="" 이성재.=""/>
뚝.
소란이 잦아 들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사람들도, 하루를 살아가기에 바빠서 세상일에는 관심을 못 두는 사람들도.
한 명의 어린아이까지 모두.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름.
용사 이성재.
여왕의 입에서는 새로운 마왕이 그라고 이야기했다.
"시방, 지금 여왕님이 뭐라고 했당가?"
"용사님이 마왕이라고 했어요, 용사님은 분명..."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죽었다고 알려졌다.
거기에 그 용사가 이제는 마왕이라니.
침묵이 잠긴 곳을 여왕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비열하게="" 자신의="" 죽음을="" 속이고,="" 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암약했던="" 것입니다.="" 최초로="" 마법국="" 디퍼루드의="" 다이너="" 령을="" 시작으로="" 지저국="" 언더그라운드를="" 괴멸,="" 교국="" 프리스티지,="" 니드호그를="" 조종해서="" 세계수의="" 숲을="" 파괴하고="" 신용사="" 이시연을="" 살해,="" 마지막으로="" 마탑을="" 소멸시켰습니다.=""/>
이미 마왕의 손에 의해서 많은 것을 잃어 갔지만, 시민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들의 희망이었던 존재가 절망이 되어서 돌아왔다는 소식만으로도 혼란스럽기는 그지없었으니까.
"용사님이 왜 인족을 공격한다는 거야?!"
"그분이 도대체 왜..."
사람들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 죽음을 속인 것인지, 또 왜 세계를 노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계의 괴물은="" 지금까지="" 본="" 모습을="" 숨긴="" 것이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용사의="" 가면을="" 쓰고,="" 모두를="" 속이면서="" 이="" 세계를!=""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요!=""/>
자신들이 정말로 속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일까.
설사 진실을 알더라도 소용은 없을 것이다.
<선왕은 그에게="" 복종하려="" 했습니다!="" 디퍼루드의="" 이반="" 왕은="" 마왕을="" 막아서면서="" 내="" 놓은="" 조건으로="" 국민들의="" 혈세로="" 만들어진="" 군량을="" 바쳤죠!="" 이="" 부분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국가간에="" 체결된="" 약조를="" 무를="" 수="" 없었으니까요!="" 대륙의="" 인족이="" 협력해야="" 하는="" 시기에는요!=""/>
결국에는.
<선왕은 가면을="" 썻던="" 악독한="" 마왕에게="" 겁을="" 먹고="" 이를="" 쉽게="" 체결="" 했던="" 것입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우왕을="" 처단하여서=""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지금이="" 그때입니다!=""/>
이미 용사는 인류의 적으로 돌아섰으니까.
<비록 군량으로="" 일시적으로="" 멈춘="" 전쟁이지만,="" 우리는="" 평화를="" 손에="" 넣어야="" 합니다!="" 군량이="" 떨어지면="" 다시="" 약탈을="" 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 당할="" 것입니까?!="" 대비해야="" 언제든지="" 시작할="" 전쟁을요!="" 여러분의="" 가족이="" 살해당하여도="" 무기를="" 드세요!="" 이제는="" 누구나="" 영웅급에="" 도달="" 수=""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려 한다.
<마력석의 여유분도="" 충분하니,="" 이계의="" 도구는="" 새로="" 소환하면=""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늘="" 승리="" 했습니다!="" 이기는="" 존재였습니다!="" 악독한="" 마왕은="" 군량에="" 눈이="" 멀어서=""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자!="" 여러분="" 다시="" 승리합시다!=""/>
다시 승리한다.
그래, 인류는 항상 승리해 왔다.
용사가 어떻게 타락을 했건 간에 상관은 없었다.
이대로는 분명 자신의 가족들이 살해당하는 날이 오리라, 피땀 흘려서 낸 세금들이 마왕에게 약탈 당할 것이다.
그리고.
"용사님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해도, 우리는 위의 나랏님들이 시키는 데로 해야 하잖아."
"어쩌겠나, 이미 시작된 일인걸. 우리 같은 천한 평민들은 알 수 없는 진실이 있겠지."
"뭣들 하는겨, 빨리 환호성이나 질러. 안지르면 큰일 나니께."
거친 함성이 퍼진다.
몇은 진실된 함성이지만, 일부는 단지 늘 하던 대로 연설자의 기분에 맞춘 것뿐이었다.
☆☆☆
"감점, 짐이라면 용사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가 이 세계에 이룬 업적이 너무 커, 오히려 그의 이름을 꺼낸 것이 역효과를 불렀다."
이반은 보고 서류를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라면, 차라리 짐 말고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 했을 것이다."
그를 따르는 대신은 '참 간결하고 효과넘치는 명령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걸 꾹 참아 냈다.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하, 말씀하신대로 마르스 니아스와 그레고리 다이너를 데려왔습니다. 그레고리는 아비의 연구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일과 마법을, 그리고 마르스는 지휘와 전투를 맡기려 합니다."
"하하하! 미리 이야기 안 해도 빠르군, 하긴, 느린자들은 전부 짐의 손에 처형당했으니 빨라야지."
그레고리는 로마노프의 자식이니만큼 머리가 뛰어났고, 마법실력도 출중했다.
마탑을 벗어나 있었기에 화를 피한자들의 머리가 되기에는 충분한 인재였다.
마르스도 아비의 원수와 믿었던 자의 배신에 이를 갈고 있었다.
뭐든지 할 만한 존재였다.
'복수심만큼 사람의 원동력이 될 만한 건 없지...'
"'그것'을 깨우는 건 어찌 되고 있나?"
"준비는 끝났습니다."
"좋아."
'마왕. 한 달이라는 시간을 알차게 쓰지, 그 뒤 회담에서 더 주면 좋고.'
"그건 극비리에 진행 되어야 할 것이야."
이반의 말에 대신은 목에 새겨진 '주종의 계약'을 보이며 대답했다.
"존명."
☆☆☆
"지랄났네, 파랑머리년."
나는 보고서류를 거칠게 내던지며 욕을 했다.
서류의 내용이 너무 가관이라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타락했냐? 그것들이 타락시켰지. 그리고 약탈인 네가 먼저 한 건데, 왜 우리가 약탈했다고 따져?"
물론 내 이야기만 안 꺼냈으면 인족에게는 충분히 효과좋은 연설이었겠지만, 인족들에게 전해진 내 이야기는 이미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용사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용사를 갑자기 악으로 몰고 갔으니,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소피아, 진정하거라.="" 본녀도="" 지금은="" 팝콘각이라고="" 안말할게.=""/>
카르마도 요즘은 말없이 팝콘만 뜯더니, 성장을 한 것 같다.
"그래, 검순아. 네가 간식을 마다하다니, 성장했네."
대단하다.
<이익! 걱정해="" 줘도="" 그러느냐?!=""/>
화를 내며 씩씩대는 카르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하... 아니까 이런 식으로 장난도 치지, 안 그러니 목걸아?"
<맞아요, 카르마.="" 소피아="" 님이="" 정말로="" 화났으면="" 저런="" 식으로="" 말안하죠.=""/>
로자리아도 착각했으면서,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양손을 허리에대고 잘난채 한다.
가만 보면 둘이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다.
'서로 놀려 먹으니까.'
"소피아, 소피아."
"응?"
리우스와 같이 수인족 부대를 맡았던 미네르바가 말을 걸었다.
전투부대를 맡은 그녀는 내 보조를 맡은 리리스나 의료하고 약의 연구를 맡은 시연보다는 시간이 많이 남아서 종종 집무실에 놀러오고는 했다.
"전에 디퍼루드쪽에서 뭔가 하고 있다지 않았어? 그럼 한 달후에는 바로 전쟁을 하는 거야?"
"음... 시간을 끈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 쪽의 손해는 아니어서,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야, 자세한 건 회담에서 결정해야지."
그러기 위한 회담이지, 단순하게 한 달만 늘려달라는 것이었으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저쪽으로서도 그게 이득이니 원만하게 나오겠지만... 로젤리아는 모르겠네.'
회담은 주로 이반과 하겠지, 어차피 로젤리아랑 하면 듣지도 않을 거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