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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구한 용사는 세계를 멸망시킬 마왕이 된다-99화 (99/156)

〈 99화 〉 용사와 여신의 만남

* * *

황혼에 물든공간.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황혼은 시간이 멈춘듯 이 현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바닥에 있는 물은 걸을 때 생기는 잔잔한 물결을 제외하면 고요하게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위도 아래도 구분하기 힘든 이 공간을 하염없이 걷고 있다.

"돌아버리겠네, 나 죽은 건가? 죽어서 저승에 온 건가?"

현실적이 못한 공간은 충분히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들었고, 변치 않는 이 광경에 오래 있다 보면 미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지 원래부터 자신의 상황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서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었다.

그렇게 방향감을 상실한 상태로 오랜 시간을 걷고 있을 무렵.

"어? 뭐야, 뭐가 있네?"

시야 끝에 자그마한 '건물' 같은 것이 보였고, 나는 이 황혼과 거울같은 물만 존재하는 공간에 새로운 것을 발견한 기쁨에 빠르게 뛰어서 건물로 향했다.

"어... 음... 온실?"

황혼의 호수위에 있는 것은 온실이었다.

누구의 센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정신 나간 곳에서 온실을 만들다니.

분명 이곳에 오래 있다가 미친 사람이 틀림이 없다.

"밖에 오래 있는 것보다는 안에 있는 게 좋겠지?"

적어도 밖보다는 다양할 것이다.

☆☆☆

온실속도 상당한 넓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식물들이 알록달록하게 자라 있었고, 식물의 여러 가지 색들이 조화롭다면 조화롭다고 생각될 정도로 난잡했다.

'난잡함을 컨셉으로 삼으면 말이지... 가든 같은 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미친색감이야.'

다시 생각하지만, 이 온실의 주인은 미친놈이다.

빨주노초파남보 가든을 거닐고 있자, 다른 곳보다 넓은 공간이 나왔고.

그 중심에는 한 테이블이 놓여져 있으면서, 한 쌍의 여성들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한쪽은 황금을 가는 실로 길게 뽑은 듯한 머리를 하고 있었고, 가늘고 긴 속눈썹도 황금의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밖의 황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주황과 청색의 그라데이션의 유리구슬과도 같았고, 피부는 어떠한 잡티조차 보이지 않는 인간에서 벗어나 있는 외모였다.

청초하다.

차를 입으로 옮기는 분위기는 청초했다.

"늦으셨군요."

"어..? 네?"

"왜, 저 인간을 부르셨나요."

'엘프? 아니, 하이엘프인가?'

푸른 숲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싱그러운 초록색 머리와 기다란 귀는 엘프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 엘프는 일반엘프들과는 달랐다.

눈동자는 나무의 속살을 연상하게 만드는 색을 가지고 있었고, 고고해 보이면서 다정해 보이는 분위기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거기에 황금발의 여자보다는 부족하지만,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외모였다.

'근대, 왜 날 썩어 버린 음식물 쓰레기 보는 것처럼 보는 거야?'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요."

"아, 네."

"여신 님!"

"위그, 당신은 조용히 하고 계세요. 힘이 어느 정도 돌아와서 당신을 문책하기 위해, 부른 것이니까요."

"읏..! 예, 알겠습니다."

'뭐?'

"여신 님?"

"예, 처음뵈어요. 이계의 주민이시여, 저는 이 세계의 여신. 프리스티지아예요. 후후후."

미친 공간의 주인은 여신이었던 것 같다.

☆☆☆

"저기요? 여신 님?"

"예, 이계의 주민이시여."

"어... 신혁이라고 불러 주세요."

"예, 신혁 님."

"저기, 위그라는 엘프는 왜 저렇게 저를 노려보는 건가요?"

시선으로 죽일 수 있었으면 벌써 수십 번을 죽였을 시선이었다.

"후후후! 그건 신혁 님 탓이에요."

"제 탓이요? 저는 저분을 처음 보는데요?"

"위그, 세계수 위그드라실. 여기까지만 말해도 아시겠지요?"

세계수.

'세계수?!'

어쩐지 그날들의 사랑... 아니, 내 위로행위를 전부 기억하고 계실거니까, 노려볼 만하다.

단지.

"난, 틀리지 않았어..! 맞잖아 밀프! 엘프 밀프! 멜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만세를 외치고 있는 건 실례되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여신 님! 역시 저는..!"

"위그."

"크윽..!"

"애초에 당신은 제가 힘이 없어진 동안에 아주 제멋대로 행동하셨더군요. 심지어 그 행동의 끝은 '그분'에게 존재부터 속박당하는 것이라니.. 참 어울리는 결말이군요."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던 여신은 세계수에게는 매우 차가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아... 일단 위그, 당신의 문책은 신혁 님과의 대화가 끝나면 다시 이어서 하겠어요."

세계수에게서 눈을 땐 여신은 다시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선 당신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서 사과했다.

"어? 네? 아니, 왜 갑자기.."

"이 세계의 사람들의 사정으로 인해서 당신들이 큰 고통을 겪었어요, 특히 '그분'은 끔찍한 배신을 당하고."

꽈악.

'그분'의 이야기가 나옴과 동시에 세계수의 귀를 잡아당겼다.

"초대용사 님은 그 희생을 보답 받지 못한 세계로 변질되어 버린 것을 목격했어요."

'그것도 아주 잔인한 세계로...'라는 말을 하면서 표정이 매우 어두워졌다.

"저는 어지간해서는 세계에 관여하지 않으려하고 있어요. 이계의 마수가 침략했을 때를 제외하면, 가르침만을 전했지요."

핍박과 차별이 아닌, 공존과 조화.

설사 세계의 주민들이 다투더라도, 일방적인 차별만 아니면 간단한 가르침을 주고 성장해나가길 지켜본다고 했다.

"기적의 대가로 저는 가르침도 전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도 지금은 마지막 기적만 남은 상황이라 힘도 어느 정도는 회복했어요."

"아, 그렇군요."

어차피 이미 죽었는데 사과가 다 무슨소용인가, 사과를 들을 사람들은 이제 없다.

"후후후, 글쎄요. 과연 어떨까요?"

"네?"

"아니에요. 한 사람은 이 온실속에 있기는 해요."

"?"

"그러면 설명을 다시 이어나갈게요. 다시 지상에 제 말을 전하려면 멀었지만, 수십 년뒤에는 가능해질거예요. 그러면 다시는 이런사태가 벌어지지 않겠지요."

여신은 세계의 주민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단호하게 내치고 있는 것 같았다.

"수십 년으로는 사람들이 망각에 빠지진 않을 거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이 엇나가면 가르치는 것도,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해 줘서는 안 되는 것도 전부 부모가 해야 할 일들이에요."

부모.

여신은 부모로서 세계의 사람들을 지켜보는 거였다.

자신의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면서 가르침을 준다.

자신의 아이들이 한 선택의 책임은 져도 아이의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신 님의 아이들이 사고친 것에 대한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군요."

"예... 정말 죄송하게도, 지금의 저로서는 수습하기가 힘들어요. 그 수습과 아이들에게 훈육을 하는 것도 '그분'께 맡기게 된 것이 너무 죄송스러울 정도로요."

"저기, 아까부터 그분이 누군가요?"

혼자만 알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가만보니까 여신답게 생각도 읽고 있는 것 같은데, 같이 좀 알자.

잉여신이라고 부르기전에.

"어머? 그 파란 머리를 한 여신은 뭔가요? ...정말 뭔가요?!"

축복을 바라는 세계의 전생담당이었던 여신이요.

"어흠! 조금 놀랐지만,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이제 시간이 다 되어가네요."

차를 다 마신 여신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전할게요. '그분'을 만나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만 부탁드릴게요. 훈육이야기만 빼주시면 다른 이야기는 전부 말씀해도 돼요."

"그러니까 그분이..!"

"잘 전달해주시면, 여신의 힘을 빌어서 단 한 명을 실체화시킬 수 있는 힘을 드릴게요."

"어... 예?"

여신은 다시 한번 세계수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이야기했다.

"위그드라실은 인계에서는 나무의 모습만을 할 수 있지만, 이 신계에서는 이 모습으로 있을 수 있어요. 제 힘을 사용하시면 이 모습도 인계에서 보는 것이 가능해요."

"맡겨만 주십시오, 여신 님."

"여신 님! 왜 저를..!"

꼭 세계수 말고도 단 한 명에 한해서 인화가 가능하다?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우후후, 지켜볼 때부터 재미있으신 분이시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로 본능에 충실하신 분이네요. 후후후."

기다려라, 몬스터 아가씨들.

"어? 근대 나 죽었잖아."

"신혁 님을 너무 오래도록 붙잡고 있으면 '그분'이 이곳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르니까, 보내드릴게요. 로물.. 카르마와 로자리아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여신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아니, 공간과 함께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제 선물로도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아니니까, 신중하게 사용해주세요...!"

나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었지만, 가장 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그분'이 누구냐고?!!!"

☆☆☆

"목걸아? 정말 기적으로 되살리면 바로 일어나는 거 맞아?"

<맞아요! 지금은="" 신혁="" 님이="" 이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전="" 잘못이="" 없다구요!=""/>

<예이~ 불량="" 목걸이래요~="" 에베베,="" 본녀가="" 더="" 도움된다!="" 히히,="" 로자리아보다="" 훠어어얼씬="" 도움되지,="" 소피아?=""/>

어린이들은 나가서 좀 싸웠으면 좋겠다.

환자가 쉬는 공간에서는 소란스러우니까.

"오빠, 몸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아. 단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흔히들 이야기하는 코마상태의 환자랑 비슷해 보여."

시연도 의사는 아니기에 확신은 못하지만, 코마상태나 마취에서 깨어나기 전의 환자랑 비슷해 보인다고 했다.

내가보기에도 겉으로는 말끔하게 회복했지만, 잠에서는 깨어나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이었으니까.

'음... 여신의 기적이니까, 여신을 붙잡아서 물어봐야 하나? 지금 내가 여신을 붙잡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신혁이 누워 있는 침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으.. 으음.. 그분이 누구냐고..."

<어라? 일어났느니라.=""/>

"으.. 어? 소피아..?"

신혁은 그의 상태를 보러 온 나와, 간호사로 일하면서 환자를 대하는 법을 잘 알고 있어서 같이 온 시연을 바라보았다.

"어... 소피아가 있으면, 천국인가? 어? 그런데 시연 누나가 있으면 천국은 아닐 건데... 그 누나가 천국에 갈 인물은 아니... 끄억!"

"말 잘하는 거 보니 멀쩡하네."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이 온전치가 않은 것일진대...

헛소리를 하고 있던 신혁의 명치를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병원에서도 이런 식으로 일한 건 아니지?'

"커헉..! 헉! 으어억..! 역시 이 정확도..! 분명히 누나가 맞는데..!"

확실하다.

시연은 병원에서도 환자를 괴롭혔을 거다.

나와는 다른 의미로 진상환자들을 괴롭혔을 거다.

"신혁아?"

"소.. 소피아? 어? 뒤에는 프레디하고 올리비아? 설마 둘 다..!"

아직까지 착각을 하고 있는 신혁에게 진실을 전해 줘야겠다.

끝없는 착각의 늪에 빠지기 전에.

☆☆☆

"그러니까... 나는 살아 있는 것이 맞고."

"그렇지."

프레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했다.

"시연 누나도 소피아도 니드호그에게 잡아먹힌 것도 거짓이었고."

"몇 번을 확인하는 거야? 오빠는 닉스에게 다른 의미로 잡아먹히고 있지만."

날카롭게 쏘아 붙히지만, 시연도 긍정을 해주었다.

"심지어, 소피아는 성재형이었다고? 그것도 아내들을 네 명이나 두었고?"

"하하... 응. 숨겨서 미안하다 신혁아, 형이라고 말하면 안 믿을 것 같아서..."

모든 정리가 끝난 신혁은 절망하듯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숚였다.

어느의미로는 고생의 원인중 하나가 나이니까 조금은 미안해진다.

"'따르던 옆집 형이, 연하의 여자로 암타해서 돌아왔다?', 오늘은 이건가?"

...취소, 이놈은 역시 더 굴러야 한다.

프레디의 말로는 우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개과천선했다고 들었지만, 우리가 멀쩡하게 살아 있고 심지어 반은 고의적으로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니까.

즉시 이렇게 돌변했다.

"크흡! 소피아, 신혁은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가끔 저랬습니다."

내 눈을 피하지 말거라, 프레디.

어떻게 해야 저 모습이 처돌이가 멀쩡해진 것이야.

"아, 맞다. 소피아."

"형이라고 해야지."

"이제는 내가 연상이니까, 그것보다. '그분'이 누구인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안다고 물어보는 것인가.

"그러니까, 내가 방금까지 여신을 만나고 왔거든?"

"뭐? 여신?"

<예?! 여신="" 님이요?!=""/>

어떻게 여신을?

"그러니까, 여신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소피아가 기적을 거의 사용한 덕에 힘이 어느 정도 회복 되었다고 했어."

이건 새로운 변칙이다.

이계의 존재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여신의 입장에서, 나는 그야말로 처단해야 할 존재.

그 대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생겼다.

"그런데, 이 세계의 인간들의 사정으로 억지로 소환된 우리한테 사과하고 싶다고 하네?"

"응? 뭘 해?"

"사과, 자기는 솔직히 세상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는 것을 꺼려한다고 했어, 그리고 세상사람들이 혼 좀 나야 한다고도 했고."

어.. 그러면..

"'그분'이라는 사람한테 정말 미안 하고, 수십 년이 지나면 다시 '가르침'을 전할 수 있으니까, 부탁 좀 한다고도 전했고."

허락인가? 이계의 존재가 난동을 피워도 관여안 하겠다는 허락.

"그다음에 뭐라고 했더라... 당신은 침략자가 아니라고 했던가? 세상에 소환되어 끔찍한 일을 겪게 만들어서 죄송하다고도 했는데."

"...그래? 그러면 허락이 맞지?"

"응? 뭐가? 아..! 그분한테 전멸만은 참아달라고 전해 달래."

"알았어, 노력은 해볼게."

"응? 소피아가 왜 노력해?"

<소피아, 저="" 바보는="" 아직도="" 모르는="" 눈치다.=""/>

전멸만 아니면 관여안 하고, 전멸시키더라도 지금 당장은 관여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신혁 님!="" 여신="" 님이..!="" 님이="" 저는="" 언급하지="" 않던가요?!="" 아니면,="" 제="" 용사="" 님이라든지요?!=""/>

신혁을 흔들면서 대화를 하는 로자리아는 떠들도록 내버려 두자.

여신이 원하는 혼나는 수준은 넘겠지만, 허락은 허락이다.

"어어? 뭐지? 설마 이게 그 '선물'?!"

<오! 그대,="" 무려="" 여신의="" 선물을="" 받은="" 존재가="" 되었구나.=""/>

사과도 받고 '조금' 도를 넘는 혼도 내주자.

"아즈아!!! 몬스터 아가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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