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거인족
* * *
거대했다.
그곳은 모든 것이 거대했다.
"'걸리버여행기'가 생각나네."
시연의 표현이 정확했다. 거인족의 마을은 말 그대로 '걸리버여행기'의 거인의 나라 같았으니까.
'아니, 거인족 마을이니까. 거인의 나라가 맞나?'
심지어 중앙에 있는 족장이 머무르는 곳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크기가 더욱 컸다.
"우리는 한 사람당 크기가 너무 커서 말일세, 골리앗이 유독 큰 것도 있지만 일반 거인들도 모두 크니까 자연적으로 건물도 커지지. 뭐, 높은층수는 무리지만 말일세."
특징이라고는 모든 건물이 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였다.
"그렇군요, 삼손씨 아마도지만, 저기 중앙에 있는 곳이 족장저인가요?"
나는 손을 뻗어서 중앙에 있는 건물을 가르쳤다.
"네, 맞아요. 언니. 예전에 들렀을 때는 저곳이 족장저였어요."
내 물음에 답한 것은 리리스였다.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단순하다고 해야 할까. 중앙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배는 커 보이는 건물이 족장저였다.
'골리앗이 너무 커서 그렇지, 삼손씨도 거인족중에서 꽤 큰 편이니까.'
족장들이 거대했으니, 그들이 머무르던 건물도 자연적으로 거대해지는 것이 맞다.
"소피아, 그러면 이제 족장한테 가야지? 히히."
내 팔짱을 낀 미네르바가 나를 중앙에 있는 건물로 끌고 갔다.
요즘 들어서 그녀가 부리던 애교가 뜸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오늘은 유독 심하게 붙어 오는 거 같다.
"하하, 그래. 그러면 가 볼까?"
거리가 멀어서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지만.
☆☆☆
"네가, 마왕, 대결, 협력."
눈앞에 있는 거인족.
삼손이 현 족장이라고 소개했던 자가 말했다.
'말 한 건가? 어째 세대가 가면 갈수록...'
대화가 안되 는 존재가 태어나는 것 같다, 혹시 족장의 조건 중 하나가 말을 못 하는 것일까.
"아가씨 뭔가 말도 안 되는 걸 생각하는 것 같지만, 오해다. 아들놈과 손주놈은... 하아..."
"..고생하시네요."
"마왕, 답."
뭐라고 하는 것인가.
'답?'
"아! 답해 달라고?"
내 말이 맞았던 것인지, 눈앞의 거인족은 고개를 끄덕였다.
총명한 눈빛...을 하고서 알아듣기 힘든 단어로만 이야기했다.
"오빠, 저 대머리. 머리에 문제 있어 보이는 데?"
"쉿! 시연아 일부러 언급 안 하고 있었는데..."
이번대의 족장은 머리가 없었다. 신장은 삼손과 비슷했고, 연한 갈색의 눈에는 총명함이 깃들어 있었다.
큰 단점은 말하는 것을 잘 못하고, 머리도 못 감는... 앗! 실수.
"크흠! 그래서 나는 아직 네 이름도 못 들었는데?"
"조부."
뭐, 조부가 뭐.
쾅!
"내가 해석하겠다."
그 말을 하고서 한 여성이 등장했다.
"난 이놈의 동생이다, 조부에게 이름을 듣지 않았냐고 묻는 거다."
'나이스!'
안 그래도 답답하던 와중에 해석자가 등장하셨다.
붉은색의 사자 갈기 같은 머리의 다부진 몸을 한, 거인족 여성의 등장으로 대화가 한결 수월 해질 것 같다.
"안녕하세요. 네, 삼손씨에게는 이름은 듣지 못했어요."
"나, 리노, 동생, 라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족장이 자신의 이름과 동생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미안하군, 저 대머리가 바보는 아닌데 머리털과 같이 어휘력을 잃었다."
신랄하다. 신랄하게 자신의 형제를 깎아 내리고 있었다.
"나, 민머ㄹ..."
"닥쳐, 민머리인척하지마. 네가 민머리면 그 빛나는 두피를 어떻게 표현할 건데? 밀어서 뽑혀 나간 거라고?"
라나는 과거의 솔직하지 못했던 시연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시연이도 자주 나를 놀렸는데... 아니, 저 정도는 아니었나?'
"음... 그러면 대화를 이어나가죠, 리노씨. 협력을 원하면 대결하라는 뜻인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대결을 원했다.
수인족과 악마족이 비교적 쉬웠던 것이지, 어떻게 보면 거인족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인물에게 조부의 말만을 듣고 협력할 수 없는 노릇이니.
"좋아요, 한 번 대결하죠."
"대결, 인물, 판단."
"네?"
"대결 후에 네가 어떤 인물인지 판단 한다고 말했다, 아마 올바르지 못한 전사이면 협력하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리노의 판단에 일족의 운명이 걸린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라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도 나를 같이 판단하겠다는 거겠지, 원하는 대로 해주자.
"알겠습니다, 시작은 단순한 복수였지만... 지금은 마냥 인족의 횡포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여드리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
넓은 평원, 거인족의 대련장소로 거대한 그들이 날뛰어도 무방할 정도의 크기로 다져진 평원이었다.
나와 리노는 그곳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리노씨도 크네, 거인족이 큰거야 당연하지만...'
골리앗과 삼손의 중간 정도,딱 그 정도의 크기였다.
"리노씨? 미리 말하지만 투력만 사용하겠습니다. 골리앗에게도 투력만 사용했고,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는 투력만을 사용하고 싶은 작은 고집이라 생각해주세요."
"긍정."
마력도 같이 사용한다면, 압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압도적인 것이 아닌, 인정이 필요한 대결. 그렇기에 그와의 대결에서는 마력을 봉인 할 것이다.
'딱히, 마력을 쓴다고 해도 인정 못 할 것은 없지만...'
저 부자는 어째선지, 투력만으로 승리하고 싶은 분위기를 형성 했으니까, 그날의 고양감은 잊어버리기가 힘들었으니까.
전사들.
수인족과 거인족을 나타내는 대명사, 죽는 것보다 전사로서의 명예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답답하면서 존경스러운 존재들.
"양측 준비!"
라나의 호령에 우리는 각자의 무기를 빼 들었다.
나는 카르마를, 리노는 쇠로 되어 있는 거대한 곤봉을.
'우와... 뭔 곤봉이 아니라 기둥인데?'
맞으면 뼈도 못 추릴것 같은 거대한 곤봉을 손에 쥐었다. 진검 승부, 서로 죽지는 않도록 할 자신이 있기에 허용된 승부.
가장 익숙한 무기를 든 상태로 투력을 끓어 올렸다.
엔진을 예열하는 것처럼 온몸을 뜨겁게 달구고, 전신을 순환시켰다.
"시작!"
라나의 신호와 동시에 나에게로 쏘아진 리노.
그가 내게 거대한 곤봉을 휘둘렀다.
'어...? 뭔데...'
"뭔데, 이렇게 빠른 건데!"
쾅!
나를 중심으로 흙먼지가 일어났고, 카르마에 공격이 막혀 버렸다고 생각한 리노는 즉시 몸을 뒤로 뺐다.
'단순하지만은 않네!'
후퇴를 하는 리노를 즉시 추격했다.
골리앗보다는 적은 힘이었지만, 그만큼 속도는 더욱 뛰어났다.
쾅!
뛰어 올라서 공격을 했지만, 간단하게 막혔다.
'이런 게 먹혔으면 오히려 실망할 뻔했어!'
공중에 체공중인 나를 향해서 곤봉이 휘둘러진다.
투력을 발바닥에 모았다.
"!!!"
쾅!
"하하하! 공중에서 피할 수 있는 건 미네르바 뿐만이 아니라고?!"
투력을 모아서 공기를 차버린 무식한 방법.
어떻게 미네르바를 따라 할 수 없을까 해서 생각해낸 방법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무사하게 바닥에 도착한 나는 다시 한번 리노에게로 달려갔다.
"흡!!"
그러자 리노는 발을 구르면서 흙먼지를 일으켰고 내 시야를 차단했다.
'전법도 있고... 단순한 돌격이었던 골리앗보다 나은데?"
흥분된다.
힘으로는 부족할지언정, 다른 부분이 그 부족한 힘을 매꿨다.
인족보다 높은 시야를 가진 그이기에, 그는 흙먼지에 방해를 받지 않았다.
흙먼지로 가려진 곳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헉!"
"큭!"
리노는 나를 발로 차올렸고.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검을 세웠다.
"크하하하! 리노! 시야가 차단됐다 해서, 다른 게 차단되는 게 아니라고!"
공중에서 입가에 고인 피를 닦으며 충고했고.
"명심..."
다리에 검이 찔린 리노는 그 충고를 받아드렸다.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한 나와 리노는 대치를 했다.
서로의 역량은 파악했다.
더 이상의 대결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상대를 알기 위한 대결의 선을 넘어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재미있다.
얼굴에서 미소가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건 리노도 마찬가지 였는지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나는 카르마에게 투력을 담아냈다.
"피할래?"
"막기, 회피, 모두, 방법."
'맞춰 보라는 거군, 역시 골리앗이랑은 달라!'
땅을 가르며, 카르마를 휘둘...
"오빠?"
"야 대머리."
멈칫.
대결을 이어나가려던 우리는 소름 돋는 높이로 부르는 동생들에 의해서 동작을 멈추었다.
올려치려던 나와 공격을 흘려보내려던 리노.
둘 다 식은땀을 흘리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왜? 더 해 봐."
'죽고 싶으면.'
"신났네? 대머리."
'미쳐가지고.'
두 사람 모두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들렸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동공.
쓴웃음을 지으며 구경중이던 미네르바와 레이나를 돌보려고 이 자리에 없는 리리스와 닉스.
그리고 표정이 사라진 시연과 라나.
'아.. PTSD...'
"하하하! 이봐 친구! 우리 그만할까? 이.. 이 정도면 충분 한 거 같은데..."
"긍정! 긍정! 긍정!"
뒷머리를 긁으면서 애써 웃는 나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리노.
'하하하... 리노도 나랑 같은 과네... 너도 힘들겠다...'
우리는 식어 버린 몸을 뒤로 한 채 평원을 떠났다.
☆☆☆
"하하하! 둘이 잘 이야기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
삼손은 시원하게 술을 들이키면서 웃고 있었다.
"긍정, 조부, 마왕, 강함."
여전히 알아 들을 수 없지만, 그와 나는 알 수 없는 동료애로 묶여 버렸다.
"마왕, 동생, 고생."
"너도.. 아마 결혼하면 더 힘들 거야.."
우리에게 협력을 해서 새롭게 마왕군으로 편입된 거인족과 그 축하를 하는 자리.
나는 술을 거절했지만, 그들은 기뻤던 건지 성대한 축하자리를 열어 주었다.
"소피아라고 했나? 현 마왕이여, 네가 단순히 악한 존재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라나도 아내들과 친해진 건지, 그녀들과 사이좋게 떠들던 중에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대머리가 말하는 건 병신이어도, 진짜로 병신은 아니다. 잘 좀 부탁하지."
"걱정 마세요, 라나씨. 말만 못하지 속은 깊어 보여요."
"나에게는 왜 존대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라나.
'어... 그러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거대한 손이 내 머리 위에 얹어졌다.
리노의 손이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고. 서로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 마왕, 전우, 대결, 끝, 동지."
이건 뭐라 하는지 알 거 같았다.
'너도 나랑 같잖아?'
눈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서로를 안타깝고 애잔하게 바라보는 저 눈빛.
이건 동생에게 까이면서 사는 오빠들의 눈빛이다.
"크흡!"
눈물이 흐를 것 같은걸 애써 참아내고 그에게 이야기했다.
"리노, 선지자로서 이야기한다. 너도 결혼하면 고생할 거 같다..."
흠칫!
그는 온몸을 떨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대머리 대신 이야기하지, 마왕씨. 아까 전에 올려치던 검은 대머리가 못 막았을 거야. 그것만 생각도 승부는 났다고 봐도 무방해. 마왕씨가 거인족을 부려 먹을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겠어."
그녀가 뜸을 들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집 등신 같은 대머리랑, 조부, 거인족을 잘 부탁해. 마왕씨."
"예, 걱정 마세요. 제 욕심대로 희생시킬 일은 없을 거예요. 라나씨."
역시 이 집도 우리 집이랑 똑같다.
"그러고 보니, 마왕씨 아내들이 마왕씨를 어떻게 먹을 지 의논 중이더군."
'예? 남의 집에서요?'
아내님들 때와 장소는 가려주세요.
"언니이? 히히. 술 한잔 하실래요?"
아니요.
"소피아.. 히끅! 나 취한 거 같아... 안아죠.."
거짓말 치지 마세요. 너 드워프랑 승부해도 안 지잖아요.
"오빠앙! 거인족은 바닥에서 잔다고 해! 마루에서 하는 것도 래보고 싶었어! 흐흐흐."
우와, 저는 침대가 더 좋아서 거절할게요.
"남편, 술이란 거.. 나랑 안 맞아..."
아... 닉스는 진짜로 잔다.
집에서는 거절 안 하니까, 제발 남에 집에서는 참아줬으면 좋을 아내들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