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확신
* * *
"마리아님이 저희에게 주신 선물이라구요?"
교국을 정리하던 도중에 마리아가 시킨 일을 하러 온 프레디는 로젤리아를 향해서 공손하게 '선물'을 내밀었다.
"네, 마리아님께서는 왕녀님의 동료가 모이면 열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하셨다고? 직접들은 것이 아닌가요?"
"...신혁님이 제게 일을 맡기고, 그린우드로 떠났습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프레디경은 조금 쉬시죠, 다른 용사님들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남았으니까요."
로젤리아는 아파오는 머리를 잡으면서 프레디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쉴 사람은 아니지만... 뭐 알아서 하겠죠, 미친 듯이 몸을 굴리는 인간이 그냥 미친인간보단 나으니까요...'
소환에 성공한 두 도구를 생각했다.
하나는 쓸 만하지만 반발적인 도구.
하나는 쓰레기지만 이용하기는 편해 보이는 도구.
'여자 쪽은 주종계약으로 이용하면 제법 쓸 만한 도구가 될 듯싶네요. 반면 남자측은...'
신혁이 왕궁내에서 저지른 짓을 생각했다.
왕궁의 시녀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목욕탕에 난입.
훈련은 안하고 어디로 숨었는지 자주 도망쳤고, 찾아서 훈련을 시켜도 제대로 하는 꼴을 못 보았다.
자신과 앨리스에게도 작업을 걸려던 걸 라인하르트가 막았다.
죽이지는 말라는 명령에 라인하르트의 폭력이 시작됐고, 회복한 다음에도 작업을 걸었다.
'뭐랬더라...? '장애물이 없는 사랑은 시시하다.'고 했나요?'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 아닐 수가 없었다.
라인하르트에게 몇 번이나 맞고도 다시 일어나는 모습은 오히려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앨리스도 '내가 아무리 영계를 먹으려고, 젊음을 유지해도 저건 생리적으로 무리야.'라고 했죠...'
그래서 나온 결론은 그냥 철저하게 잡일만 시키고, 주로 시연쪽만 키우자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건 방패로도 쓰기는 힘들 거 같아요. 깔끔하게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능력도 쓸모없는 것이, 써먹기에도 별로였다.
'의심많은 도구만 아니었으면, 벌써 버리는 것이었는데...'
주종계약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써버리면 다채로움이 사라진다.
최후의 보루를 쉽게 쓰기에는 그 뒤에 오는 손실이 너무 컸다.
'쓰레기도 대충 적당한 여자만 던져 주면 열심히 할 거 같지만... 하아... 답이 안 보이네요.'
요즘들어서 두통이 심해진 것 같다.
마리아의 선물을 바라보았다.
'그가 준 선물이니, 교국과 관련된 무언가 쓸 만한 것이 들어 있겠죠.'
상자를 살짝들어 보니 조금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음... 뭘까요? 다른 사람이 모이면 열라니, 궁금해서 원...'
"로젤리아님, 제가 열어 보겠습니다."
"어머, 라인하르트. 마리아님은 모두가 모이면 열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로젤리아의 호기심을 알아본 라인하르트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고, 그에게 열어 보라고 무언의 지시를 내렸다.
"제가 열면 로젤리아님이 연것이 아니게됩니다. 마리아의 질책은 제가 듣겠습니다. 로젤리아님은 부디 궁금증을 해결하시지요."
"역시, 훌륭한 제 기사네요. 후후후."
"감사합니다. 저는 오직 로젤리아님을 위해 존재하기에 언제든 원하는 것을 시켜 주십시오."
로젤리아를 향해서 고개를 숙이는 기사.
라인하르트.
그가 상자를 열었고,
"어?"
"로젤리아님! 보시면 안 됩니다!"
그 안의 '내용물'을 먼저 본 라인하르트가 로젤리아의 눈을 가렸지만, 로젤리아는 이미 '내용물'을 봐버렸다.
"꺄...꺄아아아아악!"
상자안에 담겨 있던 '머리'를 보고 깜짝 놀란 로젤리아가 소리쳤고, 그 머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선물을 보낸 당사자.
마리아의 머리였다.
'어... 어째서 마리아님이..!'
"라..라인하르트,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손을 치워주세요."
"예..."
담담하게 대답한 라인하르트가 손을 치우자, 마리아의 머리가 보였다.
잘려진 머리는 두 눈이 없었고, 귀가 잘려 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입에 '그 브로치'가 물려 있었다.
"이건! 그때 그 브로치 아닌가요!"
"로젤리아님, 제가 꺼내겠습니다.
라인하르트가 마리아의 입에 물려 있는 브로치를 꺼내서 보여주었고, 거기에는 조금은 다른 문양과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진실을 바라보지 않는자, 두 눈을 잃을 것이고. 진실을 듣지 않는자, 두 귀를 잃을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마리아님이 진실을 보지 않는 자라도 된다는 소리인가요?!"
'거기에 두 명째, 두 명째가 불타올랐어요.'
여섯의 인간 중에 두 명이 불타올랐다.
"이건..."
"명백하게 저희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로젤리아님."
여섯 명의 인간.
죽은 두 명의 동료.
남은 세 명의 동료.
거기에 자신.
"누군가가 전 용사파티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짐작이지만... 아마도 짐작이 아닌 확신 일 거 같네요. 라인하르트!"
"명령을..."
로젤리아는 라인하르트를 바라보면서 지시를 했다.
"당장 앨리스와 파니아에게 전하세요. 누군가 저희를 노린다고."
파니아에게는 새로운 용사와 성녀가 가 있다.
그녀라면 그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숨은 살릴 것이다.
'앨리스도 쉽게 당할 인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쉽게 당하지 않을 마리아가 살해되었다.
"미리 알고 있으면 대책은 가능하겠죠, 마왕도 신경 써야 하는데 이제는...!"
"로젤리아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지키겠습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솔직히 하이엘프인 파니아는 세계수의 전서구 역할 말고는 쓸모없어요. 하지만 앨리스는 우리 쪽에 있어야 합니다."
"예, 앨리스를 불러들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난 라인하르트를 바라본다.
그와 앨리스가 뭉쳐 있으면 이곳은 안전지대가 된다.
'두 사람이 있으면 어지간한자가 와도 막을 수 있어요.'
그 '괴물'이 등장하는 게 아닌 이상에는.
"이미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올 일은 없고, 로자리아의 기적이면 가능하겠지만... 성녀는 인족측 인물이니 그녀도 이곳으로 불러야겠죠."
로젤리아는 다시 상자를 정중하게 닫고, 마리아를 애도했다.
☆☆☆
나는 엘프에게 파니아의 위치를 물어보고, 천천히 그녀를 찾아가고 있었다.
'다른 엘프들은 안 보이네...'
길을 나서며 주변을 살폈지만, 우리의 안내를 맡은 엘프를 제외하고는 보이지가 않았다.
'세계수에 가까운 곳이라 그런가? 일반 엘프는 접근하기도 힘든 것 같네.'
그런 감상을 하면서 길을 걷던 와중에, 이쪽으로 오고 있던 파니아와 마주쳤다.
"어... 소... 소피아! 내가 먼저 찾아가고 있었는데.. 기..기다리고 있지.. 하하하..."
'더듬인가? 왜 심하게 더듬는 거야?'
이쪽을 보면서 겁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떨고 있는 파니아를 보자, 이상한 의문이 느껴졌다.
'뭐지? 왜 떠는 거야?'
내가 그런 의문을 품고, 한 걸음씩 다가가면 그녀는 한 걸음씩 멀어졌다.
"파니아씨? 왜 피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보면서 얼굴에 표정을 지우자, 그녀는 더욱 겁을 먹으면서 대답했다.
"내.. 내가?! 아니야! 아니.. 화낸 거 아니야.. 잘못했어..."
'누가 뭐라고 했나? 왜 저러는 거야, 짜증나게.'
그녀는 목적이 있어서 '성녀'인 소피아를 친절하게 대한 것일 거다.
다른 인물들에게 하는것처럼 가시돋친 말을 하지않았고, 명백하게 편애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더욱 분노를 불렀고, 지금의 겁을 먹은 듯한 태도도 불쾌했다.
'그냥 저들이 불쾌한 거지만... 되도록이면 티를 안 내려고 하는데, 저러니까 힘드네.'
"파니아씨? 따로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저만 부른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요?"
"히익! 그...그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하아... 확실하게 말해주시죠? 뭔가요?"
겁을 먹고 우물거리는 모습에 조금씩 날카로워지는 자신이 느껴졌다.
어째선지 겁을 먹고 있는 파니아를 보면서, 겁을 먹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자신에게 겁먹을 이유는 없다.
몇 시간 전에 따로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친절하게 나를 안내했다.
아마도 그건 성녀의 힘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세계수든, 파니아든 둘 중에 하나가 내 힘. 정확하게는 로자리아의 힘이 필요한 것이겠지.'
용사의 힘이 필요했으면, 용사를 친절하게 대해주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시연과 신혁을 향한 태도가 날카로웠다.
그런데 잠깐동안 떨어지고 나서, 그녀는 겁먹은 어린양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겁을 나한테 먹은 것 같네? 마치 내가 자신을 해칠것처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음..."
"히익!"
뒷걸음질 치다, 결국에는 벽에 막힌 파니아는 더욱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 이거 혹시?"
"소... 소피아?! 조금만 떨어져..."
쾅!
나는 파니아의 말을 끊고, 그녀의 뒤쪽 벽을 강하게 쳤다.
"야, 파니아. 너 세계수한테 들은 거지?"
"흐! 히.. 히익..."
'정답이네...'
공포로 다리에 힘이 풀린 파니아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물이 실금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악!"
그런 파니아의 머리를 붙잡고,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어으... 흑.. 잘못...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흐... 살려주세요..."
"내가? 왜? 왜 너를 살려줘야 해?"
공포로 온몸을 떨고 있는 파니아에게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해주었다.
"내가 너를 살려줘야 하는 이유가 없잖아? 파니아, 우리 어딘가 조용한곳에 가서 죽자? 시끄러워지면 귀찮으니까."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전부 세계수님이 시킨 거예요! 저는...!"
머리가 잡힌 채로 끌려가던 파니아의 말에 잠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파니아? 바로 세계수를 팔아버리네... 그것도 나름 살라고 알려준 거 같은데... 아닌가? 빨리 죽으라고 알려준 건가?"
파니아가 고통스러워하자, 그녀와 계약한 정령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날파리들이... [ANTI ELEMENT FIELD]."
나는 그런 정령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마법을 시전했고, 정령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게 된 파니아는 더욱 겁을 먹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잘못했어요!!!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개처럼 살라고 하면 개처럼 살게요! 앞잡이 노릇을 하라고 하면 할게요!! 살려만 주세요! 제발 살려만...!!"
"내가 너의 뭐를 믿고 살려줘?"
그녀의 머리를 들고 눈을 바라봤다.
겁을 먹고, 공포에 질린 눈.
목숨이 걸린일이라면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복종을 할 것이다.
'그게 누구라도 말이지...'
"응? 파니아. 너처럼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팔아버리는 것을 뭘 믿고 살려줘?"
"주... 주종계약을 하면...! 성재님의 노예가 되면 거스를 수 없으니까... 어억!"
옛이름이 불리것에 화를 못이기고, 그녀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아니, 너희한테만 불리려고 했는데 잠깐 화를 냈네? 미안 미안 하하하."
영혼 없는 사과를 하면서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비비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면서 웃어주었다.
"'노예'라... 네가 노예가 된다고 하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하고 살려줄 거 같았어? 세계수가 그러든?"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 진짜로? 세계수도 대놓고 버렸네?'
"내가"
쾅!
"아악!"
"너를!"
쾅!
"어억!"
"왜!!"
쾅!
"으헉.."
"살려줘야 하는데? 자꾸 같은 소리만 하게 만드네..."
머리를 계속 바닥에 내려쳐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피와 눈물이 섞인 얼굴로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했고,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조금씩 만족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네?'
"더 해 볼까?"
잠시동안 그녀를 바닥에 내리쳤고, 그 행위가 질릴 때쯤 다시 그녀를 들어 올렸다.
"우와, 파니아. 이게 더 아름답게 생겼다. 하하하하!"
코는 내려앉았고, 이는 전부 나갔으며 눈은 부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하...할혀후헤효..."
"두고두고, 이러면 재밌을 거 같긴 한데..."
'일단 아내들한테 말이나 꺼내볼까?'
장난감을 멋대로 사오면 아내한테 혼난다.
'지구에서는 일단 지르고, 혼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착하고 말 잘듣는 남편이다.
절대로 안 들었다가 돌아올 후폭풍이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다.
☆☆☆
"언니? 이건 뭔가요?"
리리스가로자리아를 사용해서 '일단' 회복을 시킨 파니아를 가르키면서 물어 봤다.
"어... 장난감으로 쓰려면 일찍 고장내면 안 되니까?"
"그걸!"
"히익!"
"묻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멋대로 지른 장난감에 분노한 리리스를 보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소피아, 어째서="" 피범벅이="" 된="" 파니아가="" 누워="" 있는="" 것이냐?="" 로자리아.="" 무엇을="" 본=""/>
<음...그게요.../>
로자리아의 설명이 이어지자, 아내들은 한숨을 쉬면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공손하게 손은 모으고 있지만...
"오빠? 그러니까. 저 귀쟁이가 눈치채서, 두들기다가 막상 해 보니까 재미있어서 가져 왔다. 이 소리지?"
"응..."
"하아..."
움찔!
시연의 한숨에 다시 슬쩍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 일단 가져오긴 했는데... 버리라고 하면 적당히 괴롭히다가 죽일게..."
"소피아..."
"네..."
마치 말썽부리는 남편을 보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미네르바가 입을 열었다.
"저거 가지고 놀면 재미있어? 저런 건 관리도 잘해야 하잖아?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그... 가지고 놀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또... 질리면 다른 방식으로 놀면 되고..."
나는 게임기를 샀다가 아내에게 걸린 남편처럼 쭈그러들면서 변명을 했다.
"하아... 언니?"
"!! 네!"
"정말 잘 관리 할 수 있어요? 저희는 안 도와줄거예요."
"응! 나 잘 관리할 수 있어!"
혼나면서 쭈그러드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리리스는 한숨을 쉬면서 물어왔다.
"소피아? 먹이도 잘주고, 산책도 시켜줘야 하나? 아무튼 망가지면 알아서 고쳐써."
"응!! 정신이 나가도 고쳐 쓸 수 있어!"
반려동물이 불쌍하게, 반쯤 파니아를 반려동물 취급하지만, 엘프니까 적당하게 풀을 뜯어먹이면 될 것이다.
"오빠. 가지고 노는 거 재밌어 보이니까 허락은 해주는데... 저거로 이상한 짓하는 건 아니지?"
"? 뭔짓?"
"바람. 하면 내가 먼저 저거 부실거야."
"..."
시연의 말에 내가 뭐씹은 표정으로 대답해주자, 그녀는 대답이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허락도 맡았겠다. 쓰러져서 기절한 파니아를 깨우러 갔다.
"[WAKE UP]."
"으헉!"
강제로 깨워진 파니아는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고, 나랑 눈이 마주치면서 다시 공포에 빠졌다.
"!!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이대로 있으면 계속 같은 말만 할 거 같네...'
파니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파니아? 일단 살려는 줄게."
"!! 가...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
살려만 준다고 한 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살아만 있으면 되는 것인지 파니아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파니아의 말을 끊고, 허공에 마법으로 한 가지 계약서를 만들어 냈다.
"나는 너를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두고두고 괴롭힐 거고, 너는 내 노예로 속박돼서 평생동안 장난감처럼 고통받다가 죽을 거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담담히 그녀에게 앞으로의 미래를 알려주었다.
"뭐... 싫으면 그냥 죽고, 어때? 살려는 주는 거지? 하하하!"
절망에 물든 그녀를 비웃어 주면서,
자존심 높은 하이엘프에서 그렇게 경멸하던 인간의 노예이자, 장난감으로 떨어진 그녀.
선택권은 주었다.
노예로 비굴하게 고통받으면서라도 살지.
아니면 그냥 죽을지.
"예... 주인님..."
그녀는 계약을 했고, 비굴하게 연명하기를 택했다.
"하하... 계약완료네... 적어도 자존심이 있다면 그냥 죽는 것을 선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비굴한 자였네?"
일단 가져오긴 했으나, 파니아가 죽는 것을 선택했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면 그냥 죽일 뿐이고, 살려 준다고 해도 노예제도에 화를 내던 예전의 나처럼 인격적으로 대해주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읏차!"
나는 즉시 파니아를 의자로 쓰고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했다.
"파니아가 세계수에게 들었다고는 해도, 이거 말고는 아무도 세계수의 말을 못 들어. 그러니까 우리는 천천히 일을 진행하자고?"
입을 열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면 달라졌지만, 그녀는 내 밑에서 의자가 되었다.
'슬슬 내 존재를 들어내도 될 거 같지만...'
지금 파니아를 죽여서 새로운 하이엘프를 만드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
'몰려들면 귀찮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