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78화. 옐로우 게이트.(48)
* * *
묵직한 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오던 녀석의 발소리가 점차 사그라들며 아주 가벼운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저벅저벅.
동네에 마실이라도 나온 듯이, 가볍게 뒷짐을 지고서 가장 선두에 있는 세 수장을 바라보는 녀석.
「그나마 이 짐승 같은 인간들 중에선, 너희 세 명이 가장 나아 보이는 군.」
세 수장을 바라보며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녀석은 그 뒤에 무릎을 꿇고 있는 라이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천천히 훈련생들에게로 다가온다.
저벅저벅.
흠칫 흠칫.
녀석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몸을 부르르 떠는 인원이 속출한다.
그렇게 녀석은 가장 오른쪽에 있는 나와 한시아 일행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왼쪽 끝에서부터 마음에 드는 먹잇감을 찾기 시작한다.
「약하군.」
「하찮아.」
「이놈은 벌레보다 못한 녀석이야.」
한국 최고의 엘리트들로만 이루어진 세 아카데미의 훈련생과 교수진들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으며 품평을 하는 녀석.
원래대로라면, 프라이드가 어마어마하게 높은 이 인원들이 저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러한 알량한 프라이드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욱 중요했기에, 그러한 말을 내뱉으며 녀석이 지나쳐가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던 녀석이 누군가의 앞에서 몸을 멈추어 선다.
그리고는...
「쓰레기 그 자체로군.」
그러한 말을 내뱉으며 얼굴을 와락 구긴다.
그런 녀석의 말에 정희철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린다.
저벅저벅.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녀석이 정희철을 그대로 지나치자, 정희철은 움직이지 않는 안면 근육을 최대한 움직이며 괴상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아마, 살아남았다는 기쁨 때문일 테지.
「하찮도다…. 너무나 하찮구나.」
그 많은 인원들을 전부 살펴본 녀석은 어느새 한시아 바로 옆에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곧 한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제, 제발... 그냥 지나가라.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그러한 생각이 솟아난다.
그 순간.
「...호오.. 신수의 혼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지금껏 들려왔던 모욕적인 언사가 아닌, 흥미로움과 호기심이 가득 담긴 말이 들려온다.
파르르르.
녀석의 목소리에 한시아의 눈이 사정없이 떨린다.
....씨, 씨발....왜 하필....
왜 하필 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한시아란 말인가.
왜 자꾸 상황이 나와 한시아를 이렇게 구석으로 몰아가는 것일까.
왜 항상 모든 앞길이 이렇게 시련과 고통, 절망으로 얼룩져 있는 것일까.
그러한 생각과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 분함과 같은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두근 두근.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당장에라도 한시아의 턱을 한 손으로 쓰다듬는 저 미라 새끼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내가 바라는 완벽한 대상은 아니지만, 신수의 혼을 가지고 있으니 합격점은 줘도 되겠군.」
아까부터 계속해서 지껄이는 신수의 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렴풋이 알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뱀의 심안】으로 들여다본 한시아의 크리쳐는 삼목구(三??)라는 한국의 신수였다.
신수의 혼이란, 대충 한시아가 가지고 있는 그 삼목구(三??)의 힘을 말하는 것 같다.
....우, 움직여...이 개 같은 몸덩어리야!!
눈에 실핏줄이 터져나갈 만큼, 무리해서 몸에 힘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있는 나의 몸.
....씨발!! 지켜준다고 약속했잖아!! 벌써..벌써 이렇게 약속을 어길 셈이야?
스스로에게 소리치며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고, 이미 몸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얼른 이 열기를 배출해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 뜨거운 숨을 내뱉는 것 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호오...아주 운이 좋았나? 이 녀석도 신수의 혼을 가지고 있군?」
나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짓는 녀석.
....마, 맞아!! 이곳에 오기 전, 운명의 대격변을 맞이하고서...내 운명이 뒤바뀌어 나도 신수(이무기)가 됐었어…!!
「이런 걸, 인간들의 말로는 심 봤다고 말했었나?」
윤곽이라고는 전혀 없이, 그림자에 눈, 코, 입만 달린 것 같은 녀석의 얼굴에서 입이 가로로 길게 찢어진다.
한시아에게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녀석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은 한시아를 발견해냈을 때 보다 더욱 진한 만족감이 배어있었다.
녀석은 한참을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더니,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이 순간을 끝내려 한다.
아니, 정확히는 끝내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녀석의 시선이 어딘가로 고정이 된 채 움직이질 않았다.
씨익,
다시 한번 진한 웃음이 맺히는 녀석의 새까만 얼굴.
「신수의 혼 뿐만이 아니라, 고대의 혼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있었군.」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그 대상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었다.
녀석이 바라본 방향에 서 있던 녀석들은....
표지안, 이진하, 오소리, 한설화.
그 중 표지안과 이진하, 오소리의 크리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흑표범, 송골매, 오소리였기에.
고대의 혼을 가지고 있다는 인물은 한설화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현재 【텔레파시】 채널에는 나와 한시아, 표지안, 이진하, 오소리가 참여하고 있었는데, 지금 나의 머릿속에선 이 네 사람의 복잡한 감정들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녀석에게 강제로 무릎을 꿇고 난 뒤부터 계속해서 입을 쉬지 않는 녀석들의 목소리였다.
【신수니, 고대니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야!! 씨발... 당장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데 입을 열 수가..】
【지, 진정해!! 지안아...계속 생각하다 보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도...】
【대, 대장!! 이, 이사장님들도 꼼짝도 못하시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사이비님...】
하는 말은 모두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절망적인 상황에 많이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녀석이 정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비벼볼 수 있는 모습을 보였다면, 괜한 허세로라도 녀석들을 조금 위로해주었겠지만, 아쉽게도 녀석에게는 아무런 빈틈도, 비벼볼 껀덕지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어. 누군가 한 명은 죽을 수 밖에... 그리고 그 죽음의 대상은....
이상하게도, 조금 전만 해도 거세게 뛰어대던 심장이 폭풍이 지나간 바다처럼 고요해졌고, 나의 몸을 옥죄어오던 그 무거운 두려움도 서서히 사라져간다.
나의 눈이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고,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희미해져 간다.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을 말 한마디로 정신도, 육체도 굴복시킨 그.
그의 이름은 탐(?)이었다.
탐은 무릎을 꿇고 있는 수많은 인원들을 꼼꼼히 확인하며 확인한 끝에 결국,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인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엄청난 힘에 정신과 육체 모두 굴복당한 인간들은 모르겠지만, 탐은 엄청난 무리를 해 자신의 힘을 사용한 상태였다.
다행히 거의 모든 힘을 사용해, 녀석들의 기를 확실하게 눌러놓은 탓에 싸울 의지마저 잃어버린 인간들을 구워삶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크윽....그 빌어먹을 저승사자 새끼들만 아니었더라면...이런 인간들쯤은….
살아있는 자, 죽은 자 모두 들어가면 절대 제 발로 나올 수 없다는 그 지옥에서 당당하게 제 발로 탈출한 것은 물론이고, 그 지옥에만 존재하는 힘을 훔쳐 달아나던 탐은 자신을 향해 엄청난 살기를 뿜으며 공격해오던 저승사자들과 지옥의 악귀들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구겼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던, 지옥을 빠져나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탈출 과정에서 입은 데미지가 누적이 되었다.
그로 인해,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을 반의반도 사용할 수 없게 된 탐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단 한 번의 압도적인 능력을 선보여 인간들을 말로 구워삶기로 정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은 이제 끽해야 한 번.
현상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될 예정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현상은, 이 수많은 인간들을 이 게이트에 내쫓아 원래 있던 세계로 돌려보내는 걸 의미한다.
....크윽...안 그래도 몸이 엉망인데, 녀석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현상의 힘을 두 번이나 사용했다.
확실하게 정신을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녀석들을 게이트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힘이 더욱 많이 소모되었고, 자칫, 잘못될 경우 인간들이 나의 힘에 저항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에, 무리해가면서 인간들의 정신을 완전히 굴복시킨 것이다.
...이 정도면, 남은 힘만으로 어떻게든 녀석들을 내보낼 수 있겠군.
자신의 힘에 완전히 굴복당해, 하염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탐은 어서 빨리 일을 마무리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뭐, 그래도 좋은 그릇을 얻을 수 있게 된 건 다행이군.
탈출 과정 중 입은 피해와 무리하게 힘을 쓴 탓에 서서히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한 탐은 자신의 새로운 그릇이 될 누군가를 바라본다.
그 녀석의 머리 위에는 떠 있는 죄악 수치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높았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상당히 자신과 비슷한 기운이 그 녀석에게서 느껴졌다.
모든 걸 먹어 치우려는 식탐(??).
....이제 보니, 비슷한 힘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힘과 기운을 가지고 있었구나.!
탐의 입꼬리가 말려 들어 가듯 올라간다.
육체가 봉괴되기 시작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럼 약속대로, 이 녀석만 빼고 모두 돌려보내 주겠다. 잘 가라 인간들이여.」
탐은 목에 힘을 주어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고, 곧 무릎을 꿇고 있던 인간들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허어억!!! 모, 몸이 다시 움직인다!!!"
"커헉...허억!!허억!! 저, 정말 이대로 돌려보내 준다고...?!!"
순차적으로 몸에서 빛이 새어 나오던 사람들이 신체의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한마디씩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빛과 함께 사라져간다.
......!!!
그 모습에 이제는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얼굴의 근육을 움직이며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표현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내며, 아니, 지켜냈다기보다는 강제로 살아남았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표현하거나, 웃을 수 없는 사람들 또한 존재했다.
그건 바로, 나와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러했다.
우리는 저 새까만 미라 녀석이 하는 말을 직접 앞에서 들었고, 그 미라 녀석이 이 주변에서 누군가를 선택했기에.
그 녀셕에게 선택받은 사람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빛과 함께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지금도 그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큭....하하하하...."
자조적이고 메마른 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래. 한시아가 아닌 것까지는 좋아. 한시아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다짐했으니까.
한시아를 바라보며 했던 다짐을 떠올린다.
...근데...근데... 저 년도 고대의 뭐라며...왜, 왜 하필이면....
왜 이렇게 모든 게 조금씩 어긋나는 걸까?
이놈의 세상은 도대체 나에게 뭘 해줬다고, 자꾸만 이렇게 나를 시험하려 드는 걸까?
내가 천살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니까? 아니면, 부모의 정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족보도 없는 천애 고아 새끼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정말 신이란 새끼에게 제대로 정신이 박혀있다면, 내가 아닌 한설화를 데려가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억울했다.
아니, 억울하고 분하다.
.......씨발...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데? 내가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거야?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 사이비님!! 흐, 흐흐흑.....아, 안 돼요... 안 돼..】
울지 마... 울지 마.. 지긋지긋해..
【대, 대장...이게 도대체 무슨....】
...시끄러워...그 놈의 대장소리...누가 네 대장이야? 아...지긋지긋해.
【야, 야!! 사이비!!!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아, 아직 안 끝났어!! 내가 어떻게든 구해줄 테니까...】
....네가 뭘 어떻게 해? 네가 뭘 해줄 수 있는데? 그만해. 지긋지긋하니까.
【...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미안...】
지랄 한다....그렇게 미안하면 네가 대신 남을 방법을 찾아내든가.
자신의 죄책감을 어떻게든 떨쳐내려 건네는 무책임한 말과 행동.
지긋지긋하다.
어느새 그 수많았던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가장 선두에 있던 세 수장에게서 빛이 흘러나온다.
깊게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한강진.
...씨발...씨발...씨발...씨발...!!!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내게 들리는 머릿속 녀석들의 음성이 희미해져 가고, 삐이이익 거리는 이명음으로 대체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원.
한시아와 오소리, 표지안, 이하진.
녀석들의 몸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
완전히 신체의 자유를 얻게 된 한시아가 달려오면 품 안에 안긴다.
환청인지, 정말로 이명음 때문인지, 한시아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점점 빛으로 산화되어가 가는 다른 녀석들도 내 곁으로 다가와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난 손을 천천히 뻗어 한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그 입 모양을 보니 "사, 사이비님?"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난 영웅이 될 운명도 아니었고, 영웅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 내가 정말로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기를 바라며 이런 잔인한 고통을 주는 것일까?
왜? 나 따위가 뭐라고?
시험에 드는 것도, 강한 척 연기하는 것도, 착한 척 연기하는 것도, 전부 지긋지긋했다.
"시아야."
"........."
"나 있잖아. 이제는...선함을 뒤집어쓰고 살기엔 너무 지쳤어."
그동안 애써 모른척하며, 터져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무언가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무너져내렸고,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는 한시아의 모습을 끝으로 모두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아...아...끝났다.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게, 여전히 몸의 통제권을 돌려받지 못한 내게로 녀석이 걸어온다.
「이제야 둘만 남게 되었군. 죄 많은 인간아.」
그 미라 같은 녀석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검은 그림자로 변해 두 무릎을 바닥에 꿇고 있는 나를 덮쳐왔고, 그 모습을 끝으로 나의 의식이 어디론가로 멀어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