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74화. 옐로우 게이트.(44)
* * *
결국, 난 한시아에게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서 잠시 들릴 곳이 있다면 한시아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한강진을 찾아 나섰다.
한강진은 1층에서 이석훈과 커피를 마시며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작게 허리를 숙여 둘에게 인사를 올린 난 곧장 【텔레파시】를 이용해 한강진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말을 했다.
그러자, 한강진은 이석훈에게 "잠시 실례하지."라고 말하고선, 자신이 머무는 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와인처럼 보이는 술병이 몇 개 올려져 있는 한강진이 머무는 룸으로 들어선 난 서론은 제쳐두고 본론을 얘기한다.
조금 전 있었던 한시아의 과거에 관한 얘기를 말이다.
그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한강진에게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보았던 한설화의 만행을 고발했고, 한강진 또한 한설화의 【기억 소실】에 당한 피해자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침을 튀겨가며 모든 얘기를 마쳤을 때, 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너무나도 다른 한강진의 표정에 말문이 턱 막혔다.
혹시나 하는 생각과 그럴 리가 없다는 배신감이 몸을 휩쓸기 시작하자, 더는 볼 것도 없이 【기억 조작】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힘을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내 눈앞에는 한강진 머리 위에 떠 있는 문구가 보였다.
『아무런 정신에 대한 간섭이 없는 상태』
"하, 하하..."
맥빠진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온다.
.....아니, 【기억 소실】에 당한 게 아니라, 아예 한설화가 한시아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스쳐 가자, 다시 한번 한설화의 만행을 말하려던 찰나.
"...그만해주게나."
빠드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난폭하게 울려 퍼진다.
"....다, 당신...알고 있던 거지?"
치밀어오르는 배신감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한강진에 대한 존중 따위는 없는 말이 튀어 나간다.
"..그치? 전부 알고 있었어!! 한설화 그 미친년이 한시아의 눈을 아주 박살을 낸 일을 말이야!!"
"........."
"씨.,.발!!! 뭐라고 좀 대답해!!"
콰아앙!
쨍그랑..!!
나의 분노가 섞인 말에도 묵묵부답으로 임하며, 힘없이 눈을 깔아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술병을 후려쳤다.
부들부들..
한시아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을 것처럼, 무엇이라도 해줄 것처럼 행동하더니 이런 식으로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을 줄을 상상도 못 했기에 더욱더 화가 났다.
안전지역 하르멜에서 라이프 게임을 시작할 때, 그가 내게 보낸 눈빛에 담긴 의미는 만에 하나 한시아가 랜덤 뽑기에서 당첨이 되지 못할 경우, 시아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냐는 의미가 담긴 눈빛을 내가 모를 수가 없었다.
한강진은 결코, 한시아를 위해 죽을 수 있냐는 말을 건네오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 눈빛 속에 숨은 그 의미를 찾아내었을 뿐.
...씨발..!! 씨발같네!!! 나에게 그딴 눈빛을 보내면서 나를 시험하던 걸로 모자라, 뒤에서 이런 좆같은 만행을 눈감아주고 있었어?
한시아에게 앞으로는 바르게 행동하며 운명을 바꿔보겠다고 말한 게 엊그제 같았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루에 한 번씩 복기하며 최대한 성질을 죽이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낼수록, 마음속의 무언가가 조금씩 녹아내리며 나도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함이 올라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오직, 단 하나.
한시아.
한시아 그녀 때문이었다.
그런데...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이에서 연인이 된 나도 이렇게 그녀를 위해 행동하고 많은 걸 바꿔가려고 하는데, 가족이란 작자가 이따위로 행동하고 있을 줄이야.
"이러면 안 되는거잖아요....응? 아니, 이건 진짜 아니지..."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그 미친년을 당장이라도 잡아들여서 죗값을 치르게 만들겠다고.
"당신 입으로 말해."
"........"
"어떻게든 쳐 잡아서 죗값을 치르게 만들겠다고. 당신 입으로 직접 말해."
"......"
"대답해!! 씨발!!! 당신 뭔가 착각하나 본데, 당신 손녀는 한시아야. 그 미친년이 아니라."
".....미안하네..."
"..이런 미친..!! 이제보니 당신도 제정신이 아니야..크크큭 하하하...둘이 아주 제대로 미친 거 맞지?"
왜 어째서 한시아 주변에는 이런 쓰레기들밖에 없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해져 왔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내 정신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아주 제대로 알려주고 있었다.
...쓰레기는 처분한다.
휘이이익!
거센 바람 소리를 내며 일미가 아주 빠르게 쏘아져 나간다.
눈을 내리깐 채, 공격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한강진의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뒈져버려, 쓰레기.
진득한 살기를 품으며, 끝까지 힘을 거두지 않았다.
....뭐, 한시아가 많이 슬퍼하겠지만, 상관없어. 이런 쓰레기에게 받을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주면 되니까.
실로 오래간만에 비릿함이 가득 담긴 조소가 입꼬리를 올린다.
그 순간.
콰아아앙!
거대한 마찰음이 울려왔지만, 그 조소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었다.
....그냥 죽기는 싫었나 보지?
한강진의 왼손바닥이 일미의 머리를 막아낸 것이다.
"용서해달란 말은 하지 않겠네. 대신 평생 속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게나. 시아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뭐, 기회? 시아? 그 아이?"
나의 물음에도 더는 대답을 하지 않는 한강진이었다.
...당신 입으로 말할 생각이 없다면, 내가 직접 알아봐 줄게. 얼마나 대단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지.
일미와 맞닿은 한강진의 손바닥을 스윽 쳐다보고선, 그대로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했다.
지금 나의 심정을 대변하듯 그의 기억들이 거칠게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주름진 얼굴이 아닌, 20대 초반 시절의 한강진이 보이기 시작했고, 수많은 영웅담을 쌓아 올린 그의 업적들이 화려하게 내 눈앞에서 펼쳐진다.
그렇게 꼴 보기 싫은 한강진이 세운 업적들을 끝없이 바라보던 중, 13년 정도의 기억을 더듬어 보고 있을 때.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던 한시아가 계속해서 머무르던 그 병원이 튀어나왔고, 그 병원의 뒤로는 이 옐로우게이트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커다란 푸른색의 게이트가 보인다.
다급한 사람들의 외침과 곳곳을 울리는 비명.
저 푸른색의 게이트는 옐로우게이트와 같은 특수 게이트인 블루 게이트인 게 분명했다.
블루 게이트는 게이트가 나타난 지, 10분 안에 게이트 입장 조건에 맞는 누군가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바로 몬스터브레이크를 일으키는 아주 악명이 높은 특수 게이트였다.
한강진은 한시아가 머무는 병원에 뒤편에 블루 게이트가 나타나자, 화들짝 놀라며 재빠르게 한시아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블루 게이트를 바라보며 이를 꽉 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게이트 위에 떠 있는 숫자는 183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183은 눈 한 번을 깜빡하니 다시 182로 내려가 있었다.
앞으로 3분 후면, 블루 게이트는 몬스터브레이크를 일으킬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한강진이 한시아를 꼬옥 껴안고서 한심하게 신이란 작자를 찾고 있을 때.
"서, 선배님!!"
옅은 하늘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성과 검은색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여성이 숨 가쁘게 달려온다.
"브, 블루 게이트의 입장 제한을 알아냈습니다!!"
하늘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남성, 한진우는 말을 하면서도 불안한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핀다.
같은 성씨를 가지고 있는 한강진과 한진우는 평소에도 아주 가깝게 지내며 수많은 몬스터들을 죽이고 게이트를 봉인하고 다니는 동료 사이였다.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강한 자는 강한 자에게 끌린다고 했던가.
나이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둘의 사이를 강력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입장 제한 조건이 뭐지?"
여전히 블루 게이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묻는 한강진.
그러자 한진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한된 입장 인원은 두 명, 각각 남녀 한 명씩이며, 입장 가능한 나이는 30세부터 40세까지입니다. 또한, 두 명의 입장자는 얼음 속성이나, 물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진우의 말에 한강진 쉴 새 없이 떨리는 눈동자를 하늘로 향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인지, 당장에라도 몬스터브레이크가 시작될 것만 같은 저 블루 게이트에 딱 맞는 입장 조건을 가진 두 명이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기에.
그제야 한강진은 왜 한진우가 그 입장 제한을 설명하는 걸 머뭇거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33살의 나이, 남성, 보유한 속성은 얼음.
31살의 나이, 여성, 보유한 속성은 물.
아주 딱 들어맞는 입장 조건을 가진 두 사람.
한진우와 이하연.
두 사람은 아주 소문난 잉꼬부부였고, 그 실력 또한 출중해 자신과 움직이는 팀원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아직 초등학생도 되지 못한, 딸 하나가 있었는데 목숨을 걸고 게이트를 봉인하고 다니는 일을 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딸이 있기 때문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한강진은 애써 모른척하며 그 둘을 향해 물었다.
"헌터 협회에서는? 뭐라 그랬지? 조건에 맞는 사람을 보내준다고 말은 안 해?"
한강진 본인이 물어본 질문이었지만, 참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블루 게이트에 들어가는 임무였다.
조건을 맞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찾았다고 해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10분 안에 게이트에 입장하는 것은 무리였다.
또한, 조건에 딱 맞고 시간 안에 게이트에 입장할 수 있다고 해도, "제가 조건에 맞는 입장자입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헌터가 과연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강진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거냐...
어느새 게이트 위에 떠 있는 숫자는 57로 변해있었다.
56.
55.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진다.
근처에 있는 몇몇 헌터들은 이미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을 가버린 상황이었고, 이 블루 게이트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한강진, 한시아, 한진우, 이하연이 전부였다.
50.
49.
그때.
한진우가 숨이 막히는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열었다.
"....저, 저희가 가겠습니다. 선배님."
정말 듣고 싶지 않았지만, 내심 스스로 뱉어내 주길 바랬던 말이 귓가를 울린다.
말려야 했다.
아니, 가슴은 말려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로 냉정한 머릿속은 자신의 품에 안긴 한시아와 저 두 사람의 중요도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으, 흐흑...흑흑..."
너무나도 절망적인 상황에 여태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버린 이하연이 서글픈 울음소리를 내었다.
"하, 하연아...울지 마...다, 다시 돌아오면 되지.. 왜 울고 그래..마음 아프게..."
한진우는 애써 밝게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심하게 떨리는 그의 손은 그 또한 이하연과 같은 마음일 거라고 추측이 가능하게 했다.
띡.
22,
21.
울고 있는 이하연의 손을 잡아끌고서 게이트 앞으로 향하는 한진우.
18.
17.
그 거대한 게이트를 보며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일까, 어떤 미래를 상상하는 것일까.
한강진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12.
11.
그때.
한진우가 휙 돌아보며 한강진을 부른다.
"서, 선배님...혹시...만약에...만약에 저희가 돌아오지 못한다면....설화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크흐윽.."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하고, 묵직한 흐느낌을 토해내고 마는 한진우였고.
"잘 부탁드려요. 선배...흐으윽. 님..."
이하연이 그 말을 마저 이어가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 끝에가서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5.
"가자, 하연아.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지켜줄 거니까."
싱긋.
한진우의 환한 미소에 이하연이 눈물을 닦아내고서 그를 따라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응..! 오빠."
2.
한진우와 이하연이 그 시퍼런 아가리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고, 곧 완전히 게이트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1.
0.
두 사람을 삼켜버린 푸른색의 게이트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는 듯,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버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강진은 털썩 무릎을 꿇고서 오열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한강진을 따라서, 품에 안긴 한시아가 따라서 울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는 그 병원에는 처절한 한강진의 울음소리와 가냘픈 한시아의 울음소리만 메아리친다.
그렇게 몬스터브레이크를 일으킬뻔한 블루 게이트는 사라졌고, 한진우가 부탁했던 일을 잊지 않은 한강진이 한설화를 찾게 됨으로써 한설화는 한시아의 언니이자 가족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설화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성인이 된 기념으로 한설화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그녀들이 살고 있는 집에 도착한 한강진은 한설화가 한시아의 눈을 상처입히는 충격적인 만행을 보게 된다.
자기 여동생의 눈을 망가뜨리고서 냉정하게 발길을 돌려 집을 떠나가는 한설화를 한강진은 붙잡지 못했다.
여전히 그의 기억 속에서 그날의 있었던 일들은 심각한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안겨주었기에.
그렇게 한설화가 그 자리를 벗어나자, 한강진은 부리나케 달려가 한시아를 둘러업고서, 아카데미에 있는 치료실에 데려가 눈의 치료를 받게 한다.
하지만, 워낙 몸이 약했던 한시아였기에, 재생력이 치료 마법을 따라오지 못했다.
결국, 외형은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한시아의 왼쪽 눈은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의 기억을 모두 읽은 나는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굵은 눈물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아..하아...하...."
타인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
그 사실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던 난 벌을 받은 것이다.
【차가운 피와 심장】으로 인해 정신은 멀쩡했지만, 자꾸만 복받쳐 오르는 여러 가지 죄책감과 슬픔, 무력함, 허탈함, 자신에 대한 혐오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 차원에 떨어져, 이 【사이코메트리】를 이용해서 수많은 위기를 넘겨왔지만, 오늘 처음으로 이 【사이코메트리】를 얻게 된 걸 후회하게 된 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