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64화. 옐로우 게이트.(34)
* * *
"...허억...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황급히 벽면에서 손을 떼었다.
내가 본 장면들은 악몽 그 자체였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굴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훈련생들을 덮친 건 커스로치들이었다.
몸통은 녹색, 머리는 검붉은색을 가진 동쪽의 커스로치가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기습에 많은 인원이 상처를 입었고, 적지 않은 인원이 생명을 잃었다.
지금 내 발밑을 나뒹구는 녀석들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상처를 입어 전투력을 잃은 훈련생들은 하나둘씩 커스로치에 강인한 턱에 잡혀 구멍 속으로 사라졌고, 그 인원들 중에는 오소리도 있었다.
아니, 거의 모든 인원들이 녀석들에게 끌려갔다.
폐쇄된 공간, 어두운 시야, 순간적인 기습으로 인한 부상, 공포의 전염, 패닉, 광범위 마법을 사용하기 부적절한 장소 등등 수많은 요소가 악재가 되어 너무나도 손쉽게 무너져버린 훈련생들이었다.
"후우...뭐가 됐든, 아직 살아있다는 거지?"
한숨을 뱉어내듯이, 토해낸 말에 표지안이 나의 벽을 더듬으며 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어쩔 생각이야?"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표지안.
"뭘, 어쩌긴 어째. 당연히 구하러 가야지."
고조가 없는 목소리로 대답을 해준 뒤, 걸음을 옮겨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뚫린 구멍을 향해 몸을 들이민다.
그러자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털며 잠시 머뭇거리던 표지안 또한 짧은 욕지기를 내뱉고는 일미를 꼬옥 붙잡고서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고, 【사이코메트리】의 파편을 따라 빛이 아닌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
B 구역에 합류하게 된 한시아는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B2 구역을 탐사 중이었다.
이곳은 D 구역과는 달리, 위험하지도, 무섭지도, 배고프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실력이 출중한 블루문의 2, 3학년들이 교수님들의 지시 아래 탐사를 해나가며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었고, 위험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교수님들이 그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 모습은 마치, 게이트 실습에 나온 것만 같은 아주 정석적인 모습이었다.
희망도 빛도 없는 멸망한 세계와 같던 D 구역과는 아주 다르게 말이다.
이렇게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는 B 구역의 훈련생들이었기에, 그들은 생존이라는 아주 확실한 목표가 아닌, 보장된 안정과 반복되는 지루함에 유희 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예쁜 여자와 오글거리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슬쩍슬쩍 말은 건다던가, 출현하는 몬스터를 최대한 천천히 잔인하게 죽이며 시간을 보낸다던가.
D 구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만연했다.
B 구역을 탐사하는 블루문과 합류한 지 일 며칠이 지난 현재.
한시아에게 은근슬쩍 다가와 추파를 던지는 남 훈련생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귀여우면서도 묘하게 색기가 흐르는 외모와 신선함을 더해주는 한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 모든 여성들의 워너비이자, 남자들의 눈이 돌아갈 만한 풍만하면서도 잘빠진 몸매까지.
사이비가 곁에 없는 지금, 매우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그녀를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는 남자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남 훈련생이 한시아에게로 다가온다.
그의 이름은 블루문 아카데미의 2학년 훈련생 신영진이었다.
한시아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모든 남 훈련생들을 철저히 무시하며 눈길 한번 안 주었기에, 그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신영진은 한시아에게 몇 번이고 찾아와 추파를 던지고 있는 상태였다.
"안녕? 밥은 좀 먹었어?"
싱긋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신영진.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한시아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분명, 어릴 때부터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했지?`
B 구역에 합류한 또 다른 레드문 아카데미 훈련생에게 들은 정보를 떠올린 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대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어.`
왠지 모를 자신감이 치솟는 신영진이다.
신영진은 지금 한시아에게 홀딱 반해있는 상태였다.
항상 꿈꿔왔던 완벽해도 너무나 완벽한 자신의 이상형이었고 안전지역 하르멜에서 우연히 그녀를 보게 되었을 때, 머리를 둔기로 강하게 얻어맞는 충격에 휩싸였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어쩜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는 거지? 황홀하다 못해 정신이 나갈 정도야.`
슬픔에 가득 찬 한시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신영진은 이내 표정을 굳힌다.
`....너의 가장 큰 오점은 바로....그 놈이야.`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한 명의....아니, 한 새끼의 얼굴이 있었다.
윤기 나는 새하얀 백발에 새빨간 파충류의 눈을 가지고 있는 보기만 해도 재수가 없는 그 얼굴이.
`사...이비라고 했던가...?`
안전지역 하르멜에서 한시아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하르멜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항상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던 기분 나쁜 뱀 새끼.
한시아와 사이비는 누가 봐도 연인 사이였고, 서로를 향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품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꼬일 대로 꼬이고 질투와 시기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종의 일로 멍청한 그 뱀 새끼가 스스로 그녀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주니, 이만큼 좋은 상황도 없었다.
`멍청한 새끼....나였으면 절대로 안 떠나. 골키퍼가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냐고….`
그 둘이 얼마나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말던, 알바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 그녀의 곁에는 그 뱀 새끼가 아니라,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고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얼마든지 한시아를 꼬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그녀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해주며 경계심을 풀도록 유도해야 해.`
그러기 위해선, 있지도 않은 가상의 여자친구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하르멜을 떠나던 그 날, 생이별을 하게 된 가상의 여자친구를 말이다.
".....여전히 대답이 없네. 아니, 대답하지 않아도 돼. 그냥 듣기만 해줘."
여전히 묵묵부답이 그녀를 힐끗 쳐다본 신영진은 감정을 끌어올리며 말을 이어나간다.
"사실은 나도 너랑 똑같거든. 하르멜을 떠나던 그 날...내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수현이와 생이별을...."
눈물을 글썽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펼치며, 슬쩍 그녀의 반응을 살펴본다.
.......!!!
돌아봤다.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일체 주지 않았던 완벽한 이상형이 그 슬픈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고, 기뻤지만 신영진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고서 그대로 말을 이어나간다.
"수현이와 내가 처음 만난 건....."
※
울퉁불퉁한 땅굴을 걸으며 앞으로 걸어간다.
정신이 산만해질 정도로 이리저리 꺾이며 어지럽게 길이 나 있는 땅굴에 길을 잃을 법도 했지만, 【사이코메트리】로 인해 내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야, 야...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지?】
끝이 날 기미가 안 보이는 긴 땅굴에 표지안이 약간의 불신이 담긴 목소리로 묻는다.
【내 능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아, 알아!! 알고 있다고!! 근데....뭔가 느낌이 이상하다고!!】
버럭 짜증을 내듯이 말하는 표지안.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야생의 감】이라는 능력이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고, 곧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았으나 커스로치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정해.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내 【사이코메트리】에 의하면 이쪽으로 가는 게 맞아.】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지안은 아직도 불안한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곧 그녀는 수긍을 하는 것인지 작게 "씨발놈 잘난 척은…." 이라고 중얼거리며 뒤를 따라온다.
.....거의 다 왔어. 이제 300m 정도만 더 걸어가면….
그런 생각이 들 때 쯤.
퍼석.
딱딱한 흙을 밟는 소리가 아닌, 흡사 부드러운 모래를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발이 모래에 지면 속으로 푹 빠져들어 간다.
그리고는.
"허어업..!!!"
"꺄아아아아아악!!!"
나와 표지안의 몸이 사정없이 밑으로 수직 하강을 하기 시작한다.
"이, 이 씨발놈아!!! 내가 이상하다고 그랬잖아!!!!"
그렇게 표지안의 원망 어린 절규와 함께 밑으로 계속 떨어지던 나의 발에 딱딱한 무언가가 밟혔고, 나의 무게와 속도를 이기지 못한 지면이 부숴져 내라며 비교적 신선한 공기가 느껴진다.
콰아아앙!
부서진 잔해와 함께 꽤나 높은 높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나의 몸 위로 표지안이 떨어져 내린다.
퍼억.
쿨럭.!!
자연스럽게 나의 몸을 깔고 떨어진 덕분에 표지안에게는 별다른 충격이 없어 보였지만, 내 몸에서 아니, 정확히는 나의 그곳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표지안의 그 탄탄한 엉덩이와 가랑이 사이가 나의 그곳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치, 섹스를 할 때 여성이 남성의 위에 올라타는 여성 상위 자세가 되어버린 우리였다.
"으으....씨...발... 무릎 다 까졌겠네.....그러니까, 내가 이상하다고 말했...."
눈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던 표지안은 자신의 그곳에 묵직한 무언가가 툭 하고 닿자 몸을 흠칫 떨고는 말을 멈춘다.
그리고는...
"야 이, 이 개새끼야!!!! 뒤져!! 이 병신새끼야!!! 이, 이 발정난 개새끼야!!!"
퍼억! 퍽! 퍽!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냅다 나의 몸을 지근지근 밝기 시작하는 표지안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곳의 통증으로 인해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1분간 이어지던 폭행이 멈추고,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았을 때.
상황을 파악하게 된 표지안이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홱 돌린다.
".....왜 하, 하필 떨어져서 맞닿은 부분이 그, 그곳이냐고...씨발."
"........그러게. 왜 하필 그곳일까? 난 원한 적도 없는데..."
"흐, 흠...!! 어, 어쨌든 그...뭐냐....흠흠...바, 발기가 되어있어서 나도 모르게 오해한 것 같다. 미, 미안하다."
부끄러운 듯, 눈도 못 마주치며 말하는 표지안은 특히나 "발기"라는 말을 꺼낼 때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왔다.
".....아니라고."
".....으, 음? 뭐라고? 나, 남자 새끼가 쪼잔하게....미, 미안하다고 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까 그거, 발기한 거 아니라고. 그냥 평소 사이즈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어, 어? 그, 그게...? 아, 알았어. 오해한 거 취, 취소..."
어쩐지 더욱 당황하는 것 같은 표지안이었다.
여전히 고개를 홱 돌린 채, 혼자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표지안을 내버려 두고서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포커스를 맞췄다.
......으음? 뭐지, 이 비릿한 냄새는?
이 비릿한 냄새의 종류는 피 냄새와 같은 비릿함이 아니라, 정액이나, 콧물과 같은 냄새에 약간의 꼬린내가 섞인 비릿한 냄새와 가까웠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딱히 특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선을 돌려 다시 표지안을 바라보려던 찰나.
............!!!!
내 눈에 절로 눈이 찌푸려질 만한 그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씨발....저건 또 뭐야."
낮게 으르렁거리듯이 절로 욕설이 튀어나온다.
내 눈에 보인 그것들. 그것들은 바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동쪽 커스로치들의 알주머니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