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54화. 옐로우 게이트.(24)
* * *
"흠흠..!! 모두들 랜덤 뽑기라고 아는가? 그걸 한 번 해보지."
한강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모두가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래, 랜덤 뽑기....?"
"....실화냐....사람 목숨을 랜덤 뽑기에 맡긴다고?"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이봐. 강진이.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얘기인가?"
신지헌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다.
안 그래도 10명의 무단 이동 희망자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신지헌이었기에,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딱 예상했던 반응이네.
나도 처음 한강진의 기억을 읽었을 때 처음 들었던 랜덤 뽑기라는 계획은 형편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애초에 라이프 게임은 절대로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방법이 나올 수가 없는 구조의 게임이었다.
결국, 100명의 인원은 D 구역을 탐사해야 했기에.
"물론, 제정신이라네. 아니, 오히려 서로를 의심하며 불화를 만들어내는 이 상황을 보니 내 계획에 대한 확신이 더욱 들고 있다네."
"허!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사람의 목숨을 고작 이런 허술한 방법에 맡긴다니...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콧방귀를 뀌며 한강진의 의견을 묵살하려는 신지헌.
뻔한 속내였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던 사람들이...특히나, 그중에서 각 아카데미의 하위 클래스에 속한 D 구역의 생존자들이 천천히 수긍을 하는 반응을 보이자, 재빨리 판을 덮으려고 하는 상황.
........그렇게는 안 되지….
더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을 하며 재빠르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신지헌의 말을 자르고서 입을 열었다.
"글쎄요... 다른 구역의 생존자분들에게는 모르겠으나, D 구역의 생존자인 저에게는 굉장히 솔깃한 얘기로 들리는데요?"
씨익.
말을 마치며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꿈틀...
신지헌의 두 눈썹이 격하게 꿈틀거리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사이비라고 했던가..? 하룻강아지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또다시 신지헌과 대립을 하게 된 상황.
여기서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지금은 8일이란 시간이 남아있으니, 다행이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을 경우 이 늙은 꼰대들이 무력을 행사해 어떤 상황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다.
....적어도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는 지금 끝내야 해.
"버려진 유기견이 되어 이곳을 떠돌다 죽을 바에야,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의 우선순위 계획을 비꼬며 나의 소신을 가득 담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서로를 의심하기 바빴던 하위 클래스의 훈련생들이 슬금슬금 내 뒤로 모여들며 신지헌을 적대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바라본다.
다시 한 번 하위 클래스의 공통된 적이 누구인지를 심어주려는 나의 의도는 정확하게 먹혀들었고,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내 뒤로는 수많은 훈련생들이 늘어서며 나의 뒤를 지키고 있다.
"....그 간악한 세 치 혀....아니, 뱀의 혀를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네. 진심일세. 난 내가 한 말은 꼭 지키니까 말일세."
슬쩍 기세를 끌어올리며 나를 압박하는 신지헌이다.
어젯밤 신지헌이 쏘아내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내 조금은 상했던 속이 다시 한 번 찌릿한 고통에 휩싸였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참을만했다.
........이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치료를 해야겠어.
"....으읏. 세 치 혀니, 뱀의 혀니, 마음대로 부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방금 이사장님께서 자신의 혀는 진실된 혀라고 말씀하셨으니, 믿겠습니다. 자신이 하신 말씀을 꼭 지키시는 분일 테니까요."
나의 말에 신지헌은 잠깐 눈동자를 떨어대더니, 곧 당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누른다.
.....저 요망한 녀석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러한 말을 내뱉었으니, 앞으로 자신이 내뱉는 모든 말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곳에 있는 인원들만으로도 꽤나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이 상황은 지금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송출되고 있었기에 그게 더욱 골치가 아팠다.
대한민국 아카데미의 정점인 골드문의 이사장이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은 너무도 뻔했다.
.....나답지 않게 너무 흥분을 했구만. 고작 저런 애송이를 상대로....
어젯밤부터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 자신의 말을 끊고서 훼방을 놓는 녀석이 생각보다 더욱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이곳에 있는 인원들 중에서 가장 오합지졸이라 불릴만한, 하위 클래스의 신입생들을 한데로 묶어버린 녀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뱀이 아무리 용의 머리를 차지하려고 한들, 뱀은 뱀일 뿐이다.
적당히 기세를 피워올려 겁을 준 뒤, 이 상황을 유야무야 넘기면 될 일이었다.
일단은, 이 상황을 벗어나야만 했다.
"....흠흠..!! 일단 모두 머리를 식힐 겸, 아침 식사부터 하도록...."
"이봐. 지헌이. 지금 아침이 중요한가? 사람 목숨이 걸린 마당에?"
한강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자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네. 요즘 애들은 예전과는 다르다네. 아주 똑똑하고 영리하지. 또한, 자신을 위한 이기심도 많고, 불합리한 대우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일세. 그만 받아들이게나. 지금 자네가 하는 행동은 꼰대 그 이상 그 이하 아무것도 아니란 말일세."
한강진의 말에 신지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뭐라 반론을 펼치고 싶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적대심을 뿜어내는 수많은 훈련생들의 눈빛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 눈빛에는 한강진의 말대로 "꼰대"라는 단어가 가득 담겨있었다.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입맛대로 상황을 조종하려 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고리타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나무라는 꼰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지헌이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좀 더 재능이 있고 뛰어난 인원이 생존을 해야 해. 난 틀리지 않았어.
평생을 이런 마음으로 살아온 신지헌이었다.
쓸데없는 정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오로지 실력과 재능을 우선시하여 아카데미를 창립했고 그 결과, 골드문 아카데미는 대한민국 최고의 아카데미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잠시동안 자신의 생각을 접어줄 때라고 생각이 드는 그였다.
귀중한 인재들을 지키는 것도 좋았지만, 더는 추태를 부렸다간 골드문 아카데미의 이미지가 추락해 수많은 새로운 인재들을 놓칠 수가 있었다.
결국, 이 옐로우 게이트를 빠져나가 고서의 뒷일까지 생각을 마친 신지헌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좋네. 대신, 랜덤 뽑기를 찬반여부도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네.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됐다. 드디어...
드디어 재능 지상주의에 찌들은 꼬장꼬장한 신지헌의 입에서 불편한 수긍의 말이 흘러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어르신.】
마지막 K.O 펀치를 날린 한강진을 향해 전음을 보냈고.
【허허허...다 자네와 뒤에 있는 훈련생들 덕이네.】
"물론이네. 그럼 바로 투표를 하도록 하지."
한강진의 말에 하위 클래스의 훈련생들은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고 살짝 미소를 지었고, 반대로 상위 클래스의 훈련생들은 뒷머리나 볼을 긁으며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여기 서 있는 나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랜덤 뽑기에 찬성한다. 왼쪽은 반대한다. 정하겠네. 자, 그럼 모두 움직이세나."
고민할 것도 없이, 오른쪽으로 걸어갔고 그런 내 뒤를 따라서 수많은 훈련생들이 따라온다.
신입생들을 둘러싸며 팔짱을 낀 채, 상황을 지켜보던 선배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교수님들 또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상위 클래스의 D 구역 생존자들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며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은 상관없이, 이미 투표의 결과는 나온 것 같았다.
신지헌의 우선순위 계획에 대해 거부반응이 조금씩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른쪽으로 걸어왔다.
사람의 목숨에 가치를 매겨 운명을 정한다는 게, 다들 말은 하지 않아도 내키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운에 맡긴다면...어쩔 수 없었다고 말을 할 수 있었고, 실질적으로 왼쪽에 가서 반대한다는 입장을 드러낸다면, 살인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공범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이 게이트를 나가서 살인자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으니,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이니라.
100명도 안 되는 왼쪽과 수많은 인원이 몰려 있는 오른쪽.
"......이건 뭐, 끝났네요."
"어떤가? 지헌이? 랜덤 뽑기로 진행을 해도...."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는 한강진이었지만, 신지헌은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내더니 옥상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지헌과 몇몇 교수님들이 모습을 감추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일이라네. 하루에 17명씩 추첨을 하도록 하겠네. 오늘은 2일 차이니, 이따 저녁에 24명을 추첨하도록 하지. 무단 희망자가 10명이 있으니."
한강진의 입에서 랜덤 뽑기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하루에 17명씩 뽑아서 10일 동안 총 170명의 희망자를 뽑는다.
한 번에 170명을 모두 뽑아버린다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고,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여러 번에 걸쳐서 뽑아야 "다음에는 걸리겠지……." 라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잠시 후, "해산"이라는 말과 "아침 맛있게 먹도록." 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이 옥상을 빠져나가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걸로 어느 정도 라이프 게임에 대한 룰이 정해졌고, 오늘 같은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모든 게 깔끔했다.
그러기 위해선...
"선배님."
오소리를 대동한 채, 한 선배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 너는..."
"어제 새벽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나의 말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가늘게 눈동자를 떨어대는 선배였다.
"그날 모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주세요. 다시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고....이미 몇몇 교수님들도 알고 있는 낌새입니다. 그리고...랜덤 뽑기를 진행하기로 한 이상, 그건 반칙이잖아요? 그 10명 또한 신상을 교수님들께 밝히도록 하세요. 괜히 랜덤 뽑기에서 선택받으면 그림 이상해지잖아요?"
씨익.
쉬이이이익!!!
싱긋 웃음을 짓는 동시에 일미부터 삼미까지 쇳소리를 내며 그 선배를 노려본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선배였기에, 잘 알아먹었을 거라 생각한 난 아침 식사를 마치고서 간단하게 내상을 치료하고서 내가 배정받은 방으로 돌아왔다.
※
그날 저녁.
아주 공평하고 투명한 랜덤 뽑기가 진행이 되었고, 처음으로 구역 이동을 선택받은 훈련생들이 생겨났다.
【2일 차 하르멜에서의 구역 이동 희망자 명단.】
【레드문: 정인해, 김진수, 이하나, 박이훈...........】
【블루문: 김진우, 황천성, 김백연, 김수민..........】
【골드문: 이승현, 신현진, 이혜지, 강진아.........】
【총 인원: 34명.】
2일 차 저녁.
나와 한시아는 선택받지 못했다.
괜찮았다.
아직 8번의 추첨이 더 남아있었고, 270명 중 불운한 100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아니, 그래야만 했다.
물론, 그건 모두가 같은 마음이겠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