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3화. 옐로우 게이트.(23)
* * *
하르멜에서 맞이하는 2일 차 아침.
어젯밤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한시아와 동시에 눈을 뜬다.
서로를 향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장난을 치다가, 슬슬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쉬워하는 한시아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나 또한 내가 배정받은 호실로 들어선다.
혹시나 방 안에 있는 룸메이트들이 아직도 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던 내게 그런 나의 생각은 전혀 불필요하다는 듯, 세 사람이 모두 눈을 멀뚱히 멀뚱히 뜨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왔어? 대장?"
재빨리 자신의 침대에서 살짝 일어나며 아침 인사를 건네오는 오소리.
"...어, 어. 아직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어나 있었네?"
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소리가 아닌 지현우에게서 들려온다.
"그야...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모두가 예민해진 상태잖아."
.....아, 참...이 녀석도 C 클래스였지?
C 클래스인 지현우도 어젯밤 신지헌이 생각하는 계획에서 우선순위의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생각이 많은 밤을 겪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하위 클래스의 처지인 지현우와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오소리에게 묻는다.
"하긴...그것도 그렇지. 아직 교수님들이 따로 내린 지시사항 같은 건 없었고?"
"응. 지금까지는 뭐...아무 말도....없으셨어."
"..그래? 그럼 나 좀 씻고 올게."
빠르게 대화를 끊어내고서, 아직도 내 몸에 밴 어젯밤의 흔적들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실로 들어간다.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며 깨끗하게 몸을 닦아낸 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샤워실에서 빠져나오던 그 순간.
"전 훈련생!!! 모두 옥상으로 집합한다!!! 지금 즉시 훈련생들은 옥상으로 모여라!!"
마력을 가득 담은 어느 교수님의 목소리가 2층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나의 귓가로 들려온다.
"........??"
"으음? 옥상..?"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세 녀석과 나.
영문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우선은 교수님의 말대로 옥상으로 올라가 봐야 상황을 알 수 있으리라.
....근데...교수님의 목소리가 좋지 않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고개를 갸웃거리고선, 빠르게 제복을 탁탁 털며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런 집합명령은 레드문 뿐만이 아니었다.
3층의 블루문과 4층의 골드문의 훈련생들 모두가 길게 늘어진 대열에 맞춰 옥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훈련생들을 지켜보는 각 아카데미의 교수님들 표정이 썩 좋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터졌나 보네.
얼어붙어 있는 공기와 조용한 침묵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 때 즘.
내 얼굴에 맞닿는 시원한 바람과 밝은 햇빛을 느끼며 옥상에 도착했다.
탁 트인 시야와 내 눈앞으로 펼쳐지는 하르멜의 아름다운 풍경이 절로 감탄이 나오게끔 만들었다.
파스텔톤의 예쁜 건물들과 하르멜의 중심에서 고고하게 흐르고 있는 맑은 냇가, 보기만 해도 상쾌해지는 많은 나무들과 물을 뿜어대며 영롱한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분수대, 그 옆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시계탑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힐링이 되는 풍경에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10.
10이라는 숫자가 아주 커다랗게 적혀 있는 시계탑이 보인다.
.....10…? 분명 시계탑은 구역 이동 희망자의 숫자가 적힌다고…….
처음엔 모두가 나와 같이 주변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다가 어느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
아마, 녀석들도 시계탑에 적힌 10이란 숫자를 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것이리라.
그 순간.
"으아아아!!! 씨발!!!! 저, 저거 뭔데!!!"
"와...씨발…. 벌써부터 이렇게 개인주의로 나오시겠다…?"
"누구냐...존나 양심 없네...소시오패스인가...씨발새끼들..."
순식간에 옥상에 모인 훈련생들에게서 욕설과 웅성거림이 터져 나온다.
정확히는 D 구역의 생존자들에게서 그러한 소리들이 나왔다.
각 아카데미의 교수님들은 그런 D 구역의 생존자들을 아주 면밀하게 바라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눈초리를 받고 있다는 생각은 1도 하지 못하고, 주변의 녀석들을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녀석들이다.
모두가 자신은 억울하다는 듯, 험한 욕설은 내뱉으며 주변의 훈련생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람들 틈사이에서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으니, 누가 연기를 하는지, 누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씨발....이런 양아치 같은 새끼들...분명, D 구역의 생존자 중에서 10명이 일을 저질렀어. 그렇다면....그 10명을 봐줬던 절반의 사람이 있다는 건데...
모든 게 의심투성이이었다.
신지헌과 김현철이 협심해서 자신들의 상위 클래스 훈련생들을 미리 빼돌렸을 수도 있고, 다른 무언가의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 대상이 누구건, 방법이 어떻건, 확실한 건 이미 라이프 게임은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이렇게 협의도 없이 이동 희망자가 나온 상황은 서로 간의 의심을 불러일으켜 무한 이기주의를 만들어 낼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일일이 한 명씩 찾아가서 【뱀의 심안】을 이용해 속내를 다 들여다보기에는 인원이 너무나 많았고, 사람들에게 【뱀의 심안】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뱀의 심안】 이나 【사이코메트리】 를 이용해 양심 없는 범인들을 색출해낸다고 해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 녀석들은 증거가 있냐며 나에게 따질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내 밑천을 모두 드러내야 했기에 나만 손해를 보는 느낌이다.
중요한 건, 범인을 색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방비를 하는 것.
어젯밤 신지헌이 내뱉은 파격적인 계획에 하위 클래스의 훈련생들이 불안에 떨었으니, 안 봐도 이 10명은 하위 클래스의 훈련생들일 게 뻔했다.
.....도대체 이 10명이 어떻게 생존자의 절반이 523명의 앞에서 구역 이동을 선언했지...? 도대체 누가...
일단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했기에, 【사이코메트리】의 사용은 불가피할 것 같았다.
.....다들 서로를 의심하느라 바쁘니까, 지금이 적기야.
일미의 머리를 옥상 지면에 갖다 대고서 정신을 집중한다.
파아아앗.
검은색 화면이 떠오르더니, 어제 회의가 끝났을 시간이었던 저녁 8시 정도로 시간을 맞췄다.
그러자 옥상 문을 열고 옥상으로 진입하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인상을 와락 구기며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을 한참 내뱉더니, 곧 커다란 한숨과 함께 옥상을 내려간다.
.......이 녀석들은 아닌 것 같은데...
그 후로도 각 아카데미의 2학년 훈련생, 신입생, 교수님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옥상에 들렀지만, 딱히 수상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비밀스러운 일을 벌이기에는 이 옥상만 한 데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못 짚었나?
2층은 레드문, 3층은 블루문, 4층은 레드문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사람들이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
1층은 각 아카데미의 몇몇 교수님들이 불침번을 서듯이, 1층을 지키고 있었기에 1층은 제외의 장소였다.
그렇게 빨리 감기를 하듯이 옥상에 담긴 기억의 파편을 읽어가던 도중, 새벽 5시 정도가 되었을까.
눈치를 보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옥상으로 올라오는 무리가 보인다.
.....저 녀석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그 녀석은 바로...지현우.
나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지현우가 그 쭉 찢어진 눈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옥상에 올라왔다.
그 숫자는 정확히 10명.
.......이 새끼들이....너희가 범인이었구나.
모두가 D 구역의 생존자였으며, 각 아카데미의 하위 클래스에 속한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은 상쾌한 새벽공기를 느낄 틈도 없이 가장 구석으로 가 최대한 몸을 숨기기 바빴다.
잠시 후.
마치, 미리 완벽하게 계획을 짜놓기라도 한 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은밀하게 옥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바로 각 아카데미의 2, 3학년 선배들.
.......뭐야.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이 녀석들을 도와주는 거지?
그런 의아함이 스쳐 지나갈 때, 난 10명의 신입생과 각 아카데미의 수많은 선배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수많은 선배들은 모두 2, 3학년의 C, D 클래스에 속한 선배들이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같은 하위 클래스라는 동질감과 이 옐로우 게이트에서 가장 먼저 팽을 당하는 게 하위 클래스의 훈련생들이란 사실.
상위 클래스에 대한 열등감과 더욱 많은 하위 클래스의 훈련생들끼리 뭉쳐 발언권의 힘을 높이려는 목적, 등등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안전하게 구역을 이동할 수 있어서 좋고, 하위 클래스의 선배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자신들의 편을 미리 만들어 좋은 상황.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기도 했고, 같은 하위 클래스의 훈련생이 그저 다른 훈련생보다 약하고 재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짐짝처럼 버려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으리라.
그렇게 10명의 신입생들이 수많은 선배들 앞에서 "재설정"이라고 외쳤고, 시계탑에 10이란 숫자가 생겨났다.
일을 마친 그들은 일정한 시간을 두어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옥상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옥상은 텅텅 비었다.
.....이렇게 된 거였군...
이대로만 지속된다면, 나와 한시아에게도 하위 클래스의 선배들이 접촉을 해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접촉이 언제일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고, 이렇게 날마다 이동 희망자의 숫자가 올라간다면, 상위 클래스의 신입생들이나 아직 접촉을 하지 못한 하위 클래스의 신입생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고를 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사장님께 말씀을 드려야겠어.
한강진, 그는 적어도 나보다 발언권이 강했으며, 가지고 있는 무력의 질도 달랐다.
어떻게 해서라도 신지헌의 우선순위 계획은 막고 싶은 한강진 일 테니, 여기선 한강진을 밀어줘야 했다.
【저...이사장님.】
무거운 나의 목소리가 한강진에게로 전해진다.
【...허허..또 그 신기한 잔재주구먼. 무슨 일인가?】
살짝 고개를 돌린 채 나를 바라보는 한강진.
나의 밑천을 드러내는 게 조금 꺼림칙했지만, 한시아의 친할아버지이니 그나마 덜했다.
난 내가 【사이코메트리】를 이용해 보았던 어젯밤의 일들을 한강진에게 털어놓았고, 처음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묵묵히 듣기만 하던 한강진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그가 어제 자기 전 이석훈과 술을 마시던 일과 술의 이름까지 콕 집어 말을 하자, 놀란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자네, 보통내기가 아니였구만? 정신계열의 능력은 상당히 희귀한 타입이건만...허허.】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대로라면 모든 훈련생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자칫 모두가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개죽음이라....그럴수도 있지....그래서 내가 그 개죽음을 막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뒀네만…. 들어볼텐가?】
어느 정도 한강진이 이러한 말을 내뱉을 거라 예상은 했다.
어젯밤의 한강진의 기억을 읽었을 때, 이석훈과 계속해서 방법을 모색하던 한강진이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사이에서 가장 많이 오고 간 말은 바로...
【.....랜덤 뽑기... 말입니까...?】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한강진.
【역시...알고 있었나 보군.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공평하고 투명한 방법이라 생각한다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확실히 가장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제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아니, 하루도 아닌 시간 단위로 시시각각 훈련생들의 생각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마구 흔들리며 하루에도 몇 번씩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무단 이동 희망자가 속출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 차라리...어르신 말씀대로 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몰라.
인생은 운칠기삼(?七?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건 운이다.
말도 안 되는 우선순위로 팽을 당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자신의 운이 안 좋았다며 푸념하는 쪽이 훨씬 보기도 좋았고 받아들이기도 편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랜덤 뽑기라는 방법에 도달한 것은 자신의 훈련생들을 신지헌처럼 냉정하게 버릴 수 없는 선한 한강진의 심성 때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차마 자신의 손가락을 자신이 직접 잘라낼 수가 없었기에, 이 잔인한 상황을 하늘에 맡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만약에 자네가 선택받지 못한다고 한다면...자네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겠는가?】
한강진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물어온다.
어렵다.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받아들여야겠지. 그리고는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살아남을거야.
【...네. 그럼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어르신은 만약에 시아가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그 결과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나 역시, 한강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두 눈이 쉴 새 없이 떨리는 한강진.
그는 랜덤 뽑기라는 공평한 룰을 입 밖으로 꺼냈지만, 막상 자신의 손녀인 한시아가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 결과를 깨끗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네. 이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는 그를 보며 말한다.
【....그럼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절대....】
만약, 한시아가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나의 이동권을 줄 생각이었고, 나조차도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이동권을 구해 한시아 먼저 이동시킬 계획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둘 다 선택을 받는다는 최상의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었기에 단단한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내 눈빛에 담긴 굳건한 의지를 알아차렸을까, 한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낸다.
곧 한강진은 고개를 돌려,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시키며 서로를 의심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이대로는 안 되네. 모두 내 의견을 한 번 들어보는 게 어떤가?"
마력이 실린 한강진의 목소리에 소란스럽던 옥상이 차츰 조용해지며 수많은 시선이 한강진에게로 꽂힌다.
"흠흠..!! 모두들 랜덤 뽑기라고 아는가? 그걸 한 번 해보지."
운빨좆망겜...아니, 운빨좆망생의 시작을 알리는 한강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