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40화. 옐로우 게이트.(10)
* * *
보랏빛 전등의 의지해 지친 몸을 뉘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훈련생들이었다.
옐로우 게이트에서 맞이하는 첫날 밤.
이따금 들려오는 귀곡성 같은 소리를 내는 바람과 불안감에 쉽사리 잠에 빠져들지 못하고 있다.
달달달달.
다리를 떠는소리가 들려온다.
심각한 얼굴로 엄지를 물어뜯으며 다리를 떨고 있는 이진하.
"........."
"....아, 씹... 정신 사나우니까, 다리 좀 그만 떨어라."
표지안이 표정을 와락 구기며 이진하에게 핀잔을 줬다.
"........."
표지안의 핀잔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이진하였다.
"너도 레드문 녀석들 닮아가냐?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순간, 레드문 아카데미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말을 맛있게 씹어대던 두 연놈들이 생각난 표지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아...답도 없는 새끼네, 이거... 왜? 아까 저 뱀 눈깔 새끼한테 한소리 들어서 그래? 마음의 상처라도 받았어? 내가 가서 확 밟아줘?"
작은 한숨을 내쉰 표지안이 짐짓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밟을 수는 있고..?"
낮은 목소리의 이진하.
"..야, 씨발...너 지금 나 무시하냐..?"
표지안의 성대에서 그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하...농담 한 거야. 근데...신경쓰이기는 한 가봐? 너 원래, 이런 농담 받으면 잘 흘려넘기더니…."
이진하의 말에 표지안의 어깨가 살짝 흠칫 거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홱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도 농담 한 거야. 새끼야...불알 친구라는 새끼가 그것도 몰라. 병~신."
표지안이 콧등을 긁으며 말하는 모습에 굳어있던 이진하의 얼굴이 조금 펴지며 작은 미소를 띄웠다.
표지안은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할 때마다, 자신의 콧등을 살살 긁는 버릇이 있었는데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안이 녀석이 저렇게 신경 쓰고 있는 것만 봐도 보통 예삿놈은 아니란 말이지....
이진하는 표지안이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 중 하나인, 【야생의 감】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야생의 감】이란 평상시에는 상대방의 전투력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 같은 역할도 하고 있었고, 전투 중에는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지, 상대방의 약점이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아주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이 【야생의 감】이란 고유 능력을 십분 발휘해 골드문 아카데미의 서열 1위를 차지했다.
뭐, 이 【야생의 감】이란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표지안 그녀는 근접전투의 달인이자 천재였고, 다른 능력들 또한 매우 뛰어났기에 굳이 【야생의 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골드문의 서열 1위를 차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이진하였다.
그때.
저벅저벅.
호랑이도...아니, 뱀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정해진 시간 동안 불침번을 서고 있던 사이비가 천천히 이진하와 표지안이 앉아있는 방향으로 걸어왔다.
"........"
그리고는 이진하의 앞에 서서 이진하를 내려다보았다.
"....교대했으니까, 들어가 본다."
피곤함이 깃든 목소리에 이진하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 어...수고했어. 고맙다. 제일 피곤한 말 번 초 전에 들어가 줘서.."
"...뭘."
짧게 대답을 마치곤 그대로 걸어나가려던 사이비와 표지안의 시선이 부딪힌다.
그러자 표지안이 미간을 좁히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묻는다.
"......뭘 봐?"
"....너."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사이비.
"...하? 지금 개그하냐? 그냥 꺼져라. 좋은 말로 할 때... 왜 사람을 내려다보고 지랄이야...기분 좆같게..."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결코 들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표지안의 꽤나 공격적인 노빠꾸 언어선택에 옆에 앉아있던 이진하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표지안을 만류했다.
"야, 야...!! 너, 왜 그래... 안 그래도 불침번 서고 와서 피곤한 얘한테..."
혹시라도 둘 사이에서 트러블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표지안을 말리던 그때.
털썩.
한쪽 무릎을 꿇고서 표지안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사이비.
"....네가 불편하다니까, 자세를 고쳐앉아 줄게."
당황한 표정의 표지안과 이진하.
"....뭐? 야, 너 지금 뭐하자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표지안의 말을 사이비가 잘라낸다.
"...근데.. 원래 그런 성격이야? 아니면, 남성혐오 뭐, 그런 거야?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
사이비의 말에 둘이 시선이 교차하며 서로를 말없이 바라본다.
그리고는 몇 초 정도가 흘렀을까, 표지안의 어깨가 심하게 부들거리며 악귀와도 같은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이...씨발 새끼가.....뭐, 뭐?"
하지만 그런 표지안의 모습에도 멈추지 않는 사이비였다.
"......으음? 이 녀석이랑 불알친구인 것 보면...남성혐오는 아닌 것 같은데...설마..낯을 많이 가리나? 남자에게 숙맥이라던가..."
그 순간.
터억.
사이비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이진하.
".....야, 네가 오늘 고생한 건 알겠는데…. 그쯤해 둬. 마지막 경고야."
상황이 변했다.
악귀 같은 얼굴이었던, 표지안은 어느새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고, 눈치를 보고 있던 이진하가 악귀와 같은 얼굴로 점점 변해가며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차...나도 모르게 역린을 건드려 버렸나..? 난감하네...그냥 조금 놀려주려던 것뿐인데.
너무나 따가운 둘의 반응에 뒷머리를 살짝 긁어내던 사이비가 입을 열었다.
"....왠지, 미안. 시비를 걸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
결국엔, 공략해야 할 히로인들 중 한 명이었기에, 내 나름대로 정보를 얻어볼까해서 말을 나눈 게, 오히려 독이 된 것 같았다.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기에, 조금 놀려주려던 것이 화근이었다.
....쯧....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속으로 `그냥 지나칠걸.` 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곤히 잠든 한시아의 곁으로 다가가, 그 옆에 자리를 잡아 한시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 모르겠다. 우선 자둬야지. 조금 있으면 아침이 될 테니까.
물론, 미로인지, 미궁인지 모를 이 장소에는 해가 뜨지 않아 아침과 밤에 구분이 어려웠지만, 다행히 손목에 찬 팔찌에서 시간이 표시되었다.
한시아의 얇은 허리를 꼭 끌어안고서 토실토실한 엉덩이에 나의 그곳을 갖다 대니, 기분 좋은 감각이 몸을 감싸며 곧 의식이 멀어져갔다.
몇 시간 정도가 흐르고 모든 훈련생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상을 한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얼굴을 대충 씻어내고는 이진하의 목소리에 맞춰 대열을 정비한다.
그전과 바뀐 점은 단 하나였다.
3조의 열외.
공격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3조가 올데스의 시험으로 인해, 공격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공격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올데스의 말은 이곳에서 절대적이었다.
올데스의 말을 무시하고서 공격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훈련생들을 너무나 간단하게 쳐 죽이던 녀석이었기에, 그 말에 더욱 신뢰가 갔다.
그리하여, 3조는 맨 후미로 이동해 4조의 뒤에 자리를 잡았고, 그 외에는 똑같았다.
물론, 지난 전투로 인해 27명이 사망해 312명이었던 훈련생들이 285명으로 줄어든 것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내게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내가 1조에 투입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전투에서 나의 꼬리들을 이용해 몬스터들을 학살하던 모습이 녀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는지, 이진하, 표지안, 한설화는 만장일치로 나를 1조에 투입시키는 걸 찬성했다.
그로 인해, 한시아가 그 크고 예쁜 눈을 부라리며 절대 반대라고 소리치며 세 명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나는 1조에 투입이 되었다.
【...히, 히잉...사이비님...저, 저 너무 무서워요....혹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마치, 죽음이 예정된 전쟁터에 남편을 보내는 것만 같은 여인이라도 된 듯이, 한시아의 목소리에는 울음기와 비통함이 한껏 어려있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1조와 2조가 뚫리면 모두가 전멸이야. 그럴 바에 차라리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그, 그치만!! 1, 1조는....초, 총알받이.....】
【...그만. 네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아. 내가 바보야? 내 목숨을 그냥 갖다버리게? 상황이 불리하면 적당히 뒤로 뺄 거니까, 기다려.】
【...네...부, 부디 몸...조심하세요.】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어차피, 1조와 2조가 뚫리면 전멸을 당연했다.
내가 1조에 투입됨으로써, 나의 활약을 지켜본 1조 녀석들의 사기가 조금 올라간 상태였다.
그런데 1조의 사기를 조금이라도 올린 내가 먼저 등을 보이고 도망친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1조와 2조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든 대열을 이탈해 대열을 탈주할 게 뻔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뚫지 못하거나, 막지 못하면 죽음밖에 없어.
올데스의 제약으로 인해 【독충 강림】마저 사용하지 못하게 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육탄전밖에 없었다.
잠시후, 척후대가 비장한 표정과 함께 대열의 맨 앞에 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285명의 훈련생이 무거운 발걸음을 이어갔다.
나 역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 저기....아, 안녕..."
옆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넌?"
"....아! 나, 나는...그 네가 대신 이름을 말해줘서 살아남을 수 있던..."
"어, 알고 있어. 그래서 용무가 뭐냐고."
쌀쌀맞은 나의 대답에 두 손을 팔랑팔랑 움직이며 당황하는 녀석.
"아...다른 게 아니라...다시 한 번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피식.
싱거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170은 되어 보일까 싶은 작은 키, 하얀 피부, 남자치고는 조금 긴 검은색의 머리, 헬창들이 본다면 놀려댈 것만 같은 야리야리한 몸과 앳된 얼굴까지 과연, 1조에 속한 라이칸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제도 말했지? 진짜 고마우면, 한심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으, 으응? 아! 그, 그랬지...어제 네가 해준 말을 밤새 생각해봤어…. 날 지켜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그 말이...너무 가슴속에 와닿았거든...그래서 더는 한심한 내가 되지 않으려고..."
녀석의 앳된 얼굴에서 조금은 박수를 쳐줄 만한 기백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꽤 마음에 들었다.
어제 오줌을 질질 흘려가며 눈물을 짜고 있을 때만 해도, 이 녀석은 오래가지 않아 죽을 녀석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니 내 생각보다는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것 같았다.
씨익.
"너 이름이 뭐냐?"
"어? 아! 나는 오소리야. 레드문 아카데미의 1학년 B 클래스."
같은 아카데미란 소리에 조금은 '내 자신이 정말 주변에 관심이 없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오소리....?"
"...으, 응...이, 이상한 이름이지..?"
"..아니? 나는 사이비인데... 뭐, 너나 나나 또이또이 아니겠냐."
나의 대답에 쭈뼛쭈뼛거리던 녀석이 활짝 치아를 만개하며 밝게 웃었다.
그렇게 녀석과 시간을 때울 겸, 긴장도 풀 겸 해서 얼마 정도를 걸었을까.
"전투준비!!!!"
척후대에 속한 한 훈련생의 커다란 외침이 울려 퍼졌다.
"...........!!!"
"버, 벌써...?"
"히, 히이익!! 어, 어떡해..."
마법의 사용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전투에 긴장된 훈련생들에게서 불안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명령이다!!! 모두 전투준비!!!"
이진하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그 뒤를 이어 울려 퍼지자, 훈련생들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선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1조!!! 2조!!! 모두 형태변화를 시작한다!!!"
또다시 들려온 명령.
나는 딱히 할 형태변화라고는 없었기에, 천천히 심호흡하며 주변에 있는 라이칸들을 바라보았고,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오소리의 형태변화를 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린 그 순간.
" 그르르르르륵...."
낯선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형태변화를 한 오소리를 보고선, 나도 모르게 "풉!"하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오소리, 녀석의 크리쳐는 벌꿀 오소리, 즉, 라텔(ratel)이었다.
"이래서...이름 지을 때는 신중하게 지어야 하는구나...진짜 오소리가 진짜 오소리였네..."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를 "뀨?"를 말하는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오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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