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2화. 옐로우 게이트.(2)
* * *
【좀 이따 봐.】
나의 허리를 꽉 붙잡고 있는 한시아에게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나를 감쌌다.
나와 한시아를 감싼 꼬리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의 파동과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사라졌다.
.........게이트 내부로 들어왔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주변에서 수많은 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긴장감에 절여진 훈련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기가 게이트 내부야...?"
"....대박.....진짜 크다..."
"그, 그러게...게이트 내부라기보다는……. 무슨 고대 유적지 같은데...?"
마지막에 들려온 훈련생의 말을 곱씹던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짐승의 형상을 한 동상들과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신들의 사원과 비슷하게 생긴 구조물이 있었다.
나를 비롯한 모든 훈련생들은 그 사원의 입구 앞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여기로 들어가라는 건가...? 게이트 내부에 있는 사원이라니....도대체..
왠지 저 사원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알아서 판단하시겠지.
교수님들의 지시를 기다리며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뭔가 이상했다.
......사람이 줄어들었다..?
그 순간.
"...교, 교수님과 조, 조교들이 모두 사라졌어!!!"
나와 마찬가지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누군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이 찢어져라.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불안함과 동요가 전염병이 퍼지듯이 훈련생들 사이로 빠르게 전염되었다.
"씨, 씨발!!! 다, 다 어디로 간 거야!!!"
"교, 교수님!!!! 저, 저희 여기 있어요!!!"
"아....망했어.....우, 우린 다 죽을 거야....."
애초에 처음 게이트 내부로 소환되기 전부터 교수님들과 선배들을 믿고 들어온 이들이었기에, 1학년 훈련생들만 모여있는 이 상황에 더욱 큰 절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녀석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자신들을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교수님들과 선배들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리고서, 1학년 훈련생들끼리 방치된 상황이었으니 멘탈이 나갈만했다.
하지만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넋을 놓아버린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심한 새끼들.
당연한 말이지만, 나도 겁이 났고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한심한 녀석들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소리만 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맨날 D 등급이니, 뭐니, 하면서 열등생이라며 놀려대던 B, C 클래스의 녀석들이 가장 주접을 떨고 있었다.
【사, 사이비님...저기...】
한시아가 내게 말을 걸어오며 어느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 알고 있어. 저기도 대충 상황 파악은 끝난듯하네.】
선배, 교수님들과 떨어져 이곳에 소환되었다는 사실은 깨달은 직후, 한심한 녀석들이 주접을 싸는 광경을 바라보던 중 알아챈 사실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레드문 아카데미의 신입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보면 거의 구별이 안 갈 정도로 비슷한 제복을 입은 또래의 녀석들이 눈에 보였다.
.........이 아카랜드를 결계가 전부 감쌌다고 했으니까, 블루문이나 골드문 녀석들도 이 게이트로 휩쓸렸겠지.
정답이었다.
두 무리로 갈라져 레드문 아카데미로 앞으로 걸어오던 녀석들의 제복 상의를 보니, 그곳에는 푸른 달과 황금빛 달의 자수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자수 옆에는 똑같은 색깔을 가진 작은 별 한 개가 있었다.
블루문 아카데미, 골드문 아카데미의 신입생이자, 1학년 훈련생들이었다.
저벅저벅.
가벼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두 아카데미의 훈련생들이었다.
그중 가장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는 녀석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블루문 아카데미 무리를 이끄는 것처럼 보이는 녀석은 시원시원하고 남자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고, 골드문 아카데미를 이끄는 녀석은 그 얇은 목까지 똑 떨어지는 검은 단발의 머리를 하고 있었고, 육상선수와 같이 탄탄한 몸매를 지닌 아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시크한 육상부 소속의 히로인 같은 이미지의 여 훈련생이었다.
또한, 그녀의 표정에는 호승심과 투쟁심이 가득 차 있었고, 이 상황이 매우 재밌다는 듯 호기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봤지만, 상당히 호전적이며 거친 성격일 거란 생각이 절로 드는 모습이었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서 두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름: 이진하】
【나이: 20】
【크리쳐: 송골매】
【특성: 마법】
【속성: 바람, 전기】
【힘: B】 【민첩: A】
【마력: A】 【체력: B】
【고유 능력: 날개 부여, 증폭, 제 3의 눈】
【이름: 표지안】
【나이: 20】
【크리쳐: 흑표범】
【특성: 신체강화】
【속성: 물】
【힘: A】 【민첩: A】
【마력: B】 【체력: A】
【고유 능력: 자동반격, 야생의 감, 약자 혐오, 재생】
【정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의 목표 대상입니다.
......퀘스트의 목표 대상이라고...?
이진하의 상태창과는 다르게 표지안의 상태창 맨 밑에 적혀있는 낯선 문구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 말은…. 원래대로라면 표지안이 이병찬의 그녀들 중 한 명이라는 소리였다.
저런 짐승 같은 여자를 깔아뭉개다니……. 아주 조금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한시아에게 저 여자도 목표 중 한 명이라고 말을 해둬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안녕? 난 블루문 아카데미의 이진하다."
시원스러운 인상을 쏙 빼닮은 호쾌한 목소리를 흘리며 이진하가 인사를 건네왔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인사는 레드문 아카데미의 누군가에게 건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소개할 뿐인 일방적인 인사였으니.
"............"
"아, 그리고 이쪽은 골드문 아카데미의 표지안, 내 라이벌이자 소꿉친구이기도 해."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진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가만히 있는 표지안의 소개까지 직접 해왔다.
"........"
"하하하! 참 조용한 친구들이네. 안 그래, 지안아?"
어찌나 철판이 두꺼운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모습이 나름 신선해 보였지만, 나는 작게 혀를 차고는 미간을 좁혔다.
녀석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친절을 가장한 비웃음이 담겨있었다.
애초에 녀석은 레드문 아카데미 훈련생들의 대답을 들을 생각조차 없을 테니까.
....이 새끼 봐라? 은연중에 우리를 지들 밑으로 깔고 가려고 하네?
제법 괜찮은 패기였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밥맛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도 사람들을 내 밑으로 깔아두는 성향이 있었기에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물론, 나를 재끼려고 한다면 얘기는 틀려지지만.
그때.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레드문 아카데미 훈련생들을 바라보던 표지안의 입에서 허스키한 목소리와 함께 약간의 어그로가 담긴 말이 흘러나왔다.
"너희 중에서 가장 쎈 놈이 누구냐?"
표지안이 커다랗고도 탱탱한 자신의 가슴 밑으로 팔짱을 끼며 물었다.
....저거 웃긴 년이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표지안은 말을 그렇게 했지만,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보고있었고, 레드문 아카데미의 훈련생들도 표지안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수백 개의 시선이 한설화에게로 쏟아졌다.
씨익.
표지안의 입가가 가로로 시원하게 찢어지며 악동 같은 미소가 맺혔다.
"너구나?"
"........."
한설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표지안을 슬쩍 쳐다보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단 듯, 휙 고개를 돌려 사원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우드드득.
"아.....사람이 말을 했으면, 쳐다보기라도 해야 하는거 아냐?"
살짝 살짝 표지안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경쾌한 뼈관절 소리가 울리며 이곳의 공기를 빡빡하게 긴장시켰다.
저벅저벅.
표지안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한설화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드득...빠득.
쉴 새 없이 뼈관절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지만, 그 소리는 표지안이 한설화의 눈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표지안이 거의 코앞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자, 한설화의 고개가 돌아가며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각 아카데미의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여성이 서로를 마주 보며 묘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
먼저 입을 연 건, 표지안 그녀였다.
"네가 한설화 맞지? 나를 제치고서 골드문 수석으로 입학할 예정이었던?"
"............"
"하아..귀라도 먹은 거야? 아니면 혀라도 잘렸나? 사람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말을 걸어주면 대답이라도 해라. 이 썅년아."
퉤엣.
표지안이 한껏 조소를 머금고는 이죽이며 한설화의 발 앞에다가 맑고 끈적이는 침을 뱉었다.
"........."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표지안의 침을 잠깐 내려다보던 한설화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그녀였다.
콰득.
표지안의 입안에서 무언가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야. 씨발..존나 성깔있네? 크큭...존나 맘에 들어. 내 취향이야.......안 되겠다, 너 내꺼 해야겠다."
".........."
"내가 우리 아카데미의 여 훈련생은 다 먹어봤거든?"
표지안이 골드문 아카데미 무리의 섞여 있는 훈련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골드문 아카데미의 여 훈련생들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뜨거운 눈빛으로 표지안을 바라보았고 표지안은 그녀들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주고선 다시 고개를 돌려 한설화를 바라보았다.
"과연 넌 어떤 맛일지 궁금하네? 그 비싼 목소리로 내 밑에 깔려있을 땐 어떤 소리를 낼지 정말 기대가 돼. 크크큭..."
표지안은 욕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한설화의 전신을 감상하며 그 새빨간 혀로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는 입술을 훑었다.
.......뭐, 뭐야? 레즈였어...? 아니, 이병찬 이 새끼는 도대체 어떻게.....저런 짐승 같은 년을...
질렸다.
질릴 정도로 기가 센 여자였고,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 쪽에 가까운 듯 보였다.
그때.
한설화와 표지안이 그 육감적인 몸매로 서로를 물고 빠는 상상을 하며 "나름 괜찮을지도……." 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무언가가 보였다.
부들부들....
......으음? 분명...저 새끼는.....
먹이사슬 정립을 하던 날, 나와 한 따까리 했던 한설화의 호위대 중 한 명이었던 녀석이 얼굴이 붉어진 채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고 있었다.
.....분명....이름이 김민철이었던가?
쉽게 말해, 한설화에게 `너는 침대에서 어떤 소리를 낼까?`라고 물은 표지안의 말에 분노를 한 듯 보였다.
참, 충실한 개였다.
저 성욕 덩어리 새끼는 그냥 누군가가 한설화의 이름을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설화 모욕죄` 로 사람을 처형시킬 만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번 상황은 명백히 표지안이 선을 넘은 드립을 던진 것이었다.
그 순간.
저번에 나 때와 마찬가지로, 불타는 충성심을 이기지 못하고 김민철이 검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채앵!!
"이, 이런 씨발!!! 사람 같지도 않은....이 발정난 짐승 같은 년이!!!"
근데 이번은 저번과 상황이 좀 달랐다.
어떻게 보면, 골드문 아카데미가 레드문 아카데미 자체를 얕보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고, 레드문 아카데미의 1위인 한설화를 욕보였으니, 레드문 아카데미의 훈련생들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검을 뽑아든 김민철의 뒤로, 다른 호위대 녀석들도 마력을 끌어올리며 표지안을 노려보았고, 레드문 아카데미의 모든 훈련생들 또한 그들의 뒤로 길게 늘어선 채 적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 골드문 아카데미의 모든 훈련생들 또한 표지안의 뒤로 길게 늘어선 채 레드문 아카데미를 바라보며 적의를 뿜어내었다.
하아...
....이 새끼들 대가리가 전부 비어있나…?
이 옐로우 게이트에서 협동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를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올리다니….
【...저, 저...사이비님?】
나는 왠지 모르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대답했다.
【으음..? 왜...?】
【...그, 그게...저, 저기에서 저희를 엄청 노려보는데요....】
나는 한시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고, 그곳에는 레드문 아카데미의 모든 훈련생들이 나와 한시아를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레드문과 골드문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던 나와 한시아는 그들의 중간에 딱 끼인 채, 서 있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들을 중재하는 중재자거나, 그들의 세력싸움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중립자로 보였으리라.
......하아... 도대체 뭔짓거리들을 하는 거냐...
내적 한숨과 함께 한시아의 손을 잡고서 레드문 아카데미쪽으로 걸어가려던 찰나.
"...호오...!! 대박인걸? 저렇게 예쁜 애가 어떻게 지금까지 안보였던 거지....?"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지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눈은 나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한시아를 바라보고 있었고, 혀로 입술을 훑고 있었다.
.....이런 씨발년이... 감히 누굴...
쉬이이이익!!!
나의 입에서 매우 거친 뱀의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가 내 퀘스트의 목표 대상이든, 같은 여자나 따먹고 다니는 정신병자든, 상관없었다.
이 좆같은 기분을 그대로 그녀에게 돌려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아..... 이 씨발 좆맛도 모르는 년이....넌 진짜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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