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31화. 옐로우 게이트.
* * *
"......... 희생한 이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자, 그럼 모두의 안전과 무운을 빌며 다 같이 묵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강진 그의 말 한마디에 장내에 엄숙한 분위기가 짙게 깔리기 시작했고, 곧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을 감고서 묵념을 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한강진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벌렁거리던 심장이, 어제 한시아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선 그녀를 완전하게 받아들이자 불편함과 긴장감보다는 낯섦과 조심스러운 감정이 느껴졌다.
...한시아의 할아버지란 말이지…. 이제부터라도 행동을 똑바로 해야겠어.
처음 한강진과 마주쳤을 때는 한시아에게 코를 꿰였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그를 향한 거부감과 불편함이 전부였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진 지금은 어딜 봐도 한강진의 존재는 나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절대 실이 될 순 없었다.
레드문 아카데미의 이사장이자, 나의 정실인 한시아의 친할아버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헌터 중 한명이었으니...
생각해보니, 한시아를 만난 건 나에게 있어서 축복이 아닐까 싶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는 기본이고, 어디에 내놔도 꿇리지 않는 가문의 힘, 사랑스럽고 상냥한 마음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심지어 그녀를 만나, 여태 내가 억지로 잡고 있었던 못난 마음으로 가득 찼던 이유 없는 미움과 증오까지도 그녀로 인해 상당 부분을 놓아버렸고, 그 일로 새로운 운명을 맞아 예정되어 있던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됐다.
그녀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내게 있어 한시아는 나의 목숨을 살린 은인이었고, 잘못된 길이 아닌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진정한 길라잡이와 같았다.
물론, 그전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섹시한 나의 여자였지만.
나는 두 눈을 꼭 감고서 진지하게 묵념을 하고 있는 한시아를 바라보고선,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한시아는 몸을 잠깐 떨고는 곧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묵념을 하기 시작했다.
한시아의 귀여운 미소에 절로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않은 채, 그녀를 따라 묵념을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려던 찰나.
타타타닷.
매우 급해 보이는 발소리가 침묵으로 가득한 이곳을 울렸다.
그리고는 어느 한 교수님이 발에 불이라도 붙은 듯 헐레벌떡 달려와 아직도 묵념을 하고 있는 한강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닥였고, 그 뒤를 이어 몇 명의 교수님이 다급하게 달려오더니, 주변에 있는 교수님들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갑작스레 들려온 다급한 발소리에 하나둘씩 실눈을 뜨며 상황을 지켜보던 훈련생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의 대화를 나누는 교수님들을 보며 웅성거리기 시작 할 때 쯤.
마력이 실린 한강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지금 이 시간부로 송골매 하나를 발령한다! 모든 훈련생들은 전투태세를 갖춰라!!"
안 그래도 웅성거림이 멈추질 않던 이곳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고, 훈련생들뿐만이 아니라, 조교들과 몇몇 교수님도 표정관리를 전혀 못 한 채,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한강진이 모두에게 뱉어낸 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한강진이 꺼낸 `송골매 하나` 란 레드문 아카데미뿐만이 아니라, 이 아카랜드에 있는 3대 아카데미가 공용적으로 사용하는 전투준비 태세 경보 중 가장 높고 위험한 등급을 가지고 있었다.
크게 송골매 하나가 발생하는 경우는 확인되지 않은 외부의 세력이 아카데미에 침입해 살인, 납치, 테러 등등 아카데미의 훈련생들과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이뤄질 경우나, 특정 세력이 아카데미에 전쟁을 선포하거나, 테러를 선언하거나 할 때 발령이 됐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이 아카랜드에 존재하는 3개의 아카데미에 직접적으로 전쟁이나 테러를 선포한 정신 나간 세력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이중삼중으로 펼쳐져 있는 마력결계와 이 아카랜드, 3대 아카데미를 수호하는 백호길드가 외부세력의 침입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고, 그 평화는 50년이 넘어가도록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근데 그 50년이 넘는 평화가 깨지다니?
나는 수업시간에 얼핏 들은 적이 있던 `송골매 하나` 에 대한 생각을 마치고선, 한시아의 손을 잡았다.
【....내 옆에 붙어있어.】
【네, 네..! 소, 송골매 하나라니...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 상황이 매우 불안한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잘근 깨물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테러인가? 테러라면, 훨씬 전부터 백호길드의 사람들이 연락을 줬을 텐데?】
【...서, 설마 간단한 연락조차 못 할 정도로....강한 적들이 침투한 건....】
꽤나 그럴듯한 생각이었다.
이 아카랜드에 정해진 인원을 파견 보내 아카랜드와 3대 아카데미의 훈련생들을 보호하는 백호길드였지만, 자신들의 주전력인 정예병력을 이곳에 투자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곳에 파견된 길드원보다 훨씬 더 강한 적들이 침투하게 됐을시, 충분히 그럴만할 가능성이 있었다.
비단, 이런 생각은 나와 한시아의 생각만으로 끝나는 게 아닌지,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모든 훈련생들이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씨...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적어도 무슨 이유인지는 말해줘야 할 거...
" 조요오오오옹!!!!"
속으로 불만을 터트리며 한시아의 손을 꼭 잡고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나의 귓가로 찌릿찌릿한 마력이 가득 담긴 한강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딸꾹.!"
주말 시장에서나 볼 법한 시끌벅적한 시장통과 다름없던 이곳에 아주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흠흠..!! 여태 아카랜드 설립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 생겨 당황스럽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드디어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모든 훈련생들이 한강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선, 안심해라! 이 세상에 이 아카랜드를 상대로 테러나 전쟁을 걸어올 멍청한 녀석은 없다!!"
송골매 하나란 상황인 만큼 전쟁과 테러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훈련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면....그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니, 더 안 좋은 상황이 발생했다."
안도의 웃음을 짓고 있던 훈련생들의 입꼬리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현재, 아카랜드를 중심으로 그 반경 10km가 마력폭주 결계에 갇힌 상태다."
".........!!!"
그 순간, 나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나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특수 게이트..... 그것도 옐로우....?"
".......허, 허어억!!! 예, 옐로우 게이트?!!!"
내 옆에서 나의 혼잣말을 들은 한 훈련생이 호들갑을 떨며 크게 소리치자, 그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호들갑과 두려움이 산불처럼 훈련생들 사이로 번지기 시작했다.
"예, 옐로우 게이트라니...."
".....도, 도망가야 해...씨, 씨발!! 우리는 아직 훈련생 신분이라고!!!"
훈련생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두려움에 떨게 하는 옐로우 게이트는 넓은 반경을 마력폭주 결계로 둘러싸 그 결계 반경만큼을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그리고는 그 반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강제로 게이트 내부로 끌어들였다.
일반인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그런 건 전혀 상관없었다.
옐로우 게이트의 마력폭주 결계 반경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가 공평하게 게이트 내부로 소환되었고, 당연하게도 특수 게이트 중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내는 아주 악질적인 특수 게이트였다.
이 옐로우 게이트가 아주 악질적인 특수 게이트라고 불리는 이유는 죄 없는 일반시민들의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는 것도 있었지만, 옐로우 게이트의 닫는 방법이 아주 까다로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옐로우 게이트를 닫는 방법은 게이트 내부로 소환된 사람들이 직접 보스를 찾아내 죽이던가, 게이트 내부에 존재하는 정령지기의 모든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보스를 찾아내서 죽여야 하는 경우는 어떤 보스냐에 따라서 난이도가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었지만, 정령지기의 시험은 말 그대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며, 인간 그 자체를 시험하는 아주 악독한 시험들이었다.
덜덜덜덜...
한시아의 손을 잡고 있는 왼손에서 제법 강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괜찮아...심호흡 하고 있어.】
확실하게 그녀에게 믿음을 주며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내 성격상 절대 빈말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몬스터를 직접 봤던 적도 한 번도 없었고, 몬스터와의 가상 전투를 체험할 수 있는 가상전투 훈련실을 이용해 본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오로지, 김아영과 몸을 부딪치며 근접전을 연습했고, 남는 시간에 마법과 마력을 훈련했다.
......쯧.... 선배 말만 믿고 가상전투 훈련실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다니..... 낭패다.
나 정도면 무조건 게이트 실습 훈련은 만점이란 김아영의 말에 어떤 몬스터가 나와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몬스터들의 전투 방법을 알 수 있는 가상전투 훈련실을 한 번도 이용하지 않은 채, 훈련을 해왔다.
아니, 사실 그건 전부 핑계였다.
내가 하고 싶은 훈련만 쏙 골라 편식하듯이 훈련을 한 게 팩트였다.
그 놈의 귀차니즘......쯧....멍청한 놈.
원래대로였다면, 그런 가상전투 훈련 따위는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상황이 변했다.
평범한 노말 게이트가 아닌, 무려 특수 게이트 중에서도 아주 악독한 게이트로 잘 알려진 옐로우 게이트였으니, 너무나 재수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상황이야. 계속해서 자책만 하고 있을 순 없지. 또 혹시 모르잖아....몬스터녀석들이 생각보다 별거 없을지도....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붙잡고 있는 한시아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 아카랜드를 중심으로 반경 10km에는 민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말은 이번 옐로우 게이트는 일반시민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각성자인 만큼 일반인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없다. 즉, 자신의 목숨만 잘 챙기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가뜩이나 몬스터들과 전투 경험이 적은 훈련생들에게는......
게다가, 지금 이 아카랜드에는 현직 헌터와 비슷한 전투력을 가진 3학년 선배들도 있었고, 그 뒤를 바짝 쫓는 2학년 선배들과 수많은 교수님들이 있었다.
옐로우 게이트가 이곳에서 출현하게 된 건, 어찌 보면 국가나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 일 수도 있었다.
물론, 당사자인 아카데미의 훈련생들은 좆같겠지만...
그때.
".....씨발...그래!! 어차피 교수님들과 선배님들도 다 같이 있는데...무슨 일 있겠어!!"
"......그, 그렇지? 교, 교수님들의 지시만 잘 따르면...."
이 상황을 강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훈련생들이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나름대로 파이팅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순간.
내가 밟아선 지면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아주 거대하고 흉포한 마력이 아카랜드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한강진의 현실을 일깨워 주는 날카로운 말이 폭주하는 마력을 뚫고서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으으으으......어, 엄마...."
"...하, 하나님....제발....도와주세요......"
곧 있으면 강제로 게이트 내부로 소환될 운명에 처한 훈련생들이 저마다 두 손을 꼭 모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
아무리 전국에서 날고기는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아카데미의 훈련생이라지만, 결국 크나큰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는 일반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파파파파팟!!
어느새 공기와 마력이 충돌하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나는 한시아를 내 품에 꼭 안고서 꼬리들을 이용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녀와 나를 감쌌다.
【....사, 사이비님...!!】
【...걱정마. 그냥 놀이기구 탄다고 생각해. 내 얼굴만 보면서.】
나는 말을 마치며 한시아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씨익.
놀이기구라 말은 했지만, 내 꼬리를 두들기는 강력한 마력의 파동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좀 이따 봐.】
나의 허리를 꽉 붙잡고 있는 한시아에게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나를 감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