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0화. 조짐.
* * *
【그, 그렇지…. 본의 아니게 자매덮....아, 아니, 상황이 그렇게....】
나는 말을 마치고서 이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한시아의 심판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왠지모르게 파렴치한 놈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시아와 영원을 약속하기 위해선 겪어야 할 당연한 일이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잠깐.. 나는 그냥 퀘스트의 내용을 말해준 것뿐인.....
【좋아요. 이해했어요.】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나 차분하게 대답하는 한시아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싱숭생숭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 괜찮아...? 내가 막 다른 여자랑 자 버려도?】
왠지모르게 괜히 못된 심보가 발동된 나는 일부러 짓궂게 한시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한시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확고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 물론 싫어요....그치만 사이비님이 없는 세상은 더 싫으니까.... 참아볼게요...】
【고마워. 그래도 최대한 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할 테니까.....】
원하던 대답을 얻어내자, 기분이 좋았던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들려온 말은 나의 두 귀를 의심케 만들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결연한 눈빛으로 말을 하는 한시아에게서 어떻게든 나를 이곳에 붙잡아두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도와준다니? 뭐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모르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한시아와 여러 가지 얘기들을 좀 더 나누던 나는 하품을 하는 그녀를 기숙사로 보내버린 뒤, 피곤함 몸을 이끌고 방에 도착한 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내 눈앞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아영이 나에게 물어왔다.
"..하아..하아...어떻게 이런 일이...."
온종일 김아영에게 휘둘리며 바닥을 굴러다니던 어제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패도적인 공격과 그 어떤 공격도 허용하지 않겠단 듯 엄청난 방어능력을 보여주던 김아영은 나로서는 절대 뚫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젯밤 새로운 기연을 얻게 되면서 가히 사기적인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스펙업을 하게 된 나는 오늘 그녀를 상대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단해....
고작, 단 하루 만에 그녀와 동수를 이루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어제의 그녀처럼 내가 일방적으로 김아영을 몰아붙이는 상황은 안 나왔지만, 2학년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강한 그녀와 동수를 이룬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강함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다.
"저, 정말 대단해요..!! 주인님!"
김아영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나에 성취에 대해 매우 기쁜 얼굴로 축하를 해주었다.
"....고마워요. 선배. 좀 더 전력으로 와주세요."
가볍게 그녀의 축하에 화답을 해준 뒤, 나는 팔짱을 끼고서 그녀에게 말했다.
"하아....네. 주인님. 전력으로 사랑해드릴게요!"
달그닥 달그닥.
김아영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거대한 대검을 나에게 휘둘렀다.
그에 맞춰 나는 일미를 이용해 그녀의 대검을 맞받아쳤고, 이미를 이용해 그녀의 4개의 다리를 노림과 동시에 삼미를 이용해 그녀의 명치를 공격해 들어갔다.
콰아아앙!
일미와 대검이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바닥을 힘차게 밟으며 이미의 공격을 피해낸 그녀가 두 손으로 들고 있던 대검을 오른쪽 손으로 잡더니 왼손으로 노란빛의 방패를 소환해 삼미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아앗 ♡ 이 묵직함...!!! 저, 정말 대단해요, 주인님!"
참 여러모로 대단한 그녀였다.
지금 하고 있는 훈련은 나의 꼬리들을 전투 병기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 어떠한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서, 꼬리만으로 상대를 짓밟기 위한 전투방법.
이 꼬리를 이용해 신체강화를 사용하는 라이칸들과 비등비등하게 싸울 수만 있다면, 마법이라는 특성을 가진 훈련생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인 근접전에서도 크게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꼬리를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해내는 공방 일체의 전투법과 상대가 꼬리에 정신이 팔린 틈을 비집고 날아드는 나의 마법.
만약,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완벽한 공방 일체를 이루는 전투형 마법사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법 훈련을 게을리 하면 안 되겠지.
아침부터 오후 6시까지는 김아영과 꼬리들을 전투 병기로 만들기 위한 훈련을 진행하고, 그 뒤로는 중급 마법을 훈련하기로 결심했다.
근접전에 뛰어난 라이칸과 원거리전에 능통한 수인의 장점을 가지게 될 헌터가 될 상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떻게 보면, 신체강화와 마법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김아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라이칸은 신체강화= 근접전, 수인은 마법= 원거리전이니, 수라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레드문 아카데미의 신입생들이 선배들과의 일대일 맞춤훈련을 진행한 지, 14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대망의 게이트 실습 훈련의 시간이 찾아왔고, 훈련생들의 안전과 무운을 빌기 위해서 모든 신입생들과 수많은 교수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휴우.....드, 드디어 시작이네요.】
내 옆에서 제법 많이 긴장한듯한 한시아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걱정 마. 내 옆에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김아영과의 2주간 진행된 훈련으로 인해, 수많은 실전 싸움을 반복했고 게이트 안에서 주의할 점이나 알아두면 좋은 정보들을 터득했기에 이런 게이트 실습쯤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실제로 나의 수준을 직접 몸으로 겪어본 김아영은 "이정도면 게이트 실습은 아주 간단하게 만점을 받을 실 거에요. 주인님."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불안한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청심환을 꺼내서 먹고 있는 한시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
".....어, 아, 안녕?"
"....늦어서 미안해..."
왠 남 훈련생 두 명이 나와 한시아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희의 조원 분들이신가 봐요!】
【그러게...】
일대일 맞춤훈련이 일주일 정도 진행되었을 때, 교수님들이 고민하고 고민하며 신중하게 밸런스 조절을 한 뒤, 짜여진 조를 훈련생들에게 알려주었다.
.......김현석, 최훈.... 맞네.
나는 녀석들의 제복에 선명하게 보이는 이름을 스윽 보고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다."
"어, 어? 바, 반가워."
녀석들은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어버버거리며 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나서 녀석들은 한시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려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던 내가 팔을 뻗어서 제지했다.
"악수는 됐고, 적당히 눈인사로 해."
앞으로는 적당히 유하게 생활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것에 누군가가 손을 대는 것은 별개였다.
그런 나의 모습에 한시아가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고, 두 녀석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눈인사를 보냈다.
【......너무 행복해요. 사이비님.. 헤헤. 조금 더 질투해주세요오오..힛】
【......시끄러.】
뒤에서 나의 허리를 붙잡는 한시아였다.
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한시아를 꼬리로 이용해 부드럽게 감싼 나는 어느 한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으음? 한설화?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한설화가 나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감시하는 건가? 내가 한시아를 잘 꼬시고 있는지...?
이전에 한설화가 나에게 내린 명령을 떠올린 나는 꼬리를 이용해 좀 더 세게 한시아를 꼬옥 감쌌다.
그리고는 한설화에게서 시선을 거두었고, 단상에 올라서서 뭐라 뭐라 말하는 한강진을 바라보았다.
희고 고운 그 손을 꽉 쥐며 부르르 떨고 있는 한설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 희생한 이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자, 그럼 모두의 안전과 무운을 빌며 다 같이 묵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대한민국의 헌터협회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헌터협회의 특수 게이트 감지반.
그곳은 수많은 CCTV의 화면이 24시간 내내 돌아가며, 그 화면을 지켜보는 특수 게이트 감지반의 헌터가 상시 대기하고 있는 곳이었다.
수백 명이 넘어가는 감지반 소속의 헌터들이 수많은 화면을 보며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특수 게이트 감지반의 주요 업무는 특수 게이트가 생겨날 때 발생하는 마력 폭주를 빠르게 탐지해내 게이트 반경에 있는 일반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매년 게이트로 인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이 세계인만큼 각 나라에서는 특수 게이트 감지반의 소속된 헌터들에게 억소리가 나오는 연봉을 주며 그들에게 엄청난 복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세계에는 이능력을 가진 헌터들보다,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특정 장소에 게이트가 생기면, 헌터들이 게이트로 진입해 게이트의 핵을 부수고 귀환하면 되는 노말 게이트와는 다르게 특수 게이트는 매번 발생할 때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그랬기에, 각 나라에서는 특수 게이트 감지반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으며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특수 게이트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의 특수 게이트 감지반에서 근무한 지, 한 달이 조금 안 된 이진욱은 신입답게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수많은 화면들을 훑어보며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는데, 피곤한 눈을 잠시 풀어주기 위해 모니터링을 멈추고선 두 눈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아으....눈이야...."
벌써, 8시간 동안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이진욱은 앓는 소리를 내며 두 눈을 꾹꾹 눌러주었다.
눈이 피곤한 것도 피곤한 거지만, 사실, 가장 힘든 것은 근 한 달간 똑같은 화면을 비추고 있는 화면을 계속해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루해.....재미없다...`
처음 2주간은 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생각으로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근무를 시작했지만, 뭐든지 쉽게 질리고 쉽게 포기하는 `요즘 애들`이라는 부류에 속한 이진욱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나른한 일상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아, 그냥 그만둘까? 나 정도면 웬만한 길드에서 받아 줄 것 같은데......아, 아니다. 그래도 돈은 잘버니까....내일은 비번이니까, 혜영이나 불러서.....`
그때.
위이이이이요오오옹!!
듣기만 해도 심장이 덜렁거리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나른함과 나태로 가득 차 있던 특수 게이트 감지반에서, 경악이 가득 담긴 외침과 터질 것 같은 긴잠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트, 특수 게이트의 마력 폭주가 감지되었습니다!!!"
그 한마디의 여파는 컸다.
"시, 실제 상황이다!!! 모두 침착하게 메뉴얼대로 대응해!! 야, 너, 너는 얼른 협회장님에게....아, 아니다. 보고는 내가 직접 할 테니. 이팀장!! 빨리 애들 이끌고서 출현 장소와 게이트 종류 알아내고 나한테 바로 연락해!"
"부, 부장님!!!"
특수 게이트 감지반의 총 책임을 맡고 있는 박신수는 이 긴급한 상황에 뜬금없이 자신을 부르는 이팀장을 바라보며 거칠게 소리를 내질렀다.
"뭐야!!!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한시라도 빨리..."
"게, 게이트의 출현 장소와 조, 종류를 알아냈습니다…!!"
"뭐...뭐어? 벌써?!!!"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제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 상황을 전파하면 끝이었다.
".....후우.....그곳이 어딘데?"
박신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고, 그의 말을 들은 이팀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아, 아카랜드입니다.....게이트는.... 옐로우 게이트입니다.."
이팀장의 말에 박신수는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끄응....지금 당장 아카랜드에 있는 모든 아카데미에 연락해. 대피하.....쯧...섬이라서 대피를 할 수도 없겠구만...우선, 연락부터 빨리 돌려!!"
한 달 전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로 나는 박신수였다.
....우선 협회장님께 보고부터 드려야....
그는 운동부족으로 인해 축 늘어진 뱃살을 이끌며 협회장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