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29화. 진심.(2)
* * *
덥석.
울고 있는 그녀를 부서져라. 꽉 껴안았다.
그리고는 오늘 밤 그녀에게 나의 모든 걸 밝히겠다는 다짐을 했다.
【나도 사랑해, 시아야.】
당장에 떠오르는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한시아의 턱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포개었고, 혀를 그녀의 입속에 집어넣었다.
츄웁...쪼오옥.
키스를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는 눈물 덕에 그녀와의 키스에서 짭조름한 눈물 맛이 느껴졌다.
평생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고 살아왔던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한시아의 대한 나의 감정에 사랑이라는 낯선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다.
설령, 이 감정이 나의 착각이거나, 실수라고 해도 무를 생각은 없었다.
한시아는 이제 나의 연인이었고, 나의 여왕이자, 나의 세상이 될 것이다.
【사랑해....시아야.】
쪼오옥. 쭈웁.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애써 그 불안함을 잊어내기 위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꽉 조이며 안았다.
【...으음....사, 사이비님......쪼오옵. 저, 저도 사랑해요오...우음...】
그러자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싸며 몸을 밀착시키는 한시아였다.
달달한 복숭아향을 가진 한시아의 체취가 코끝으로 스며들자 오늘만 해도 4발을 뺐던 나의 자지가 지치지도 않는지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아...이 펑펑 울고 난 뒤, 통통하게 부어있는 이 얼굴은 못 참겠는데?
어느새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그녀의 오른쪽 눈이 언제 자신이 눈물을 흘렸냐는 듯, 뜨겁고 끈적이는 욕망을 가득 담은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새빨갛게 물든 눈가와 그 작고 앙증맞은 코를 하고서 말이다.
하아.
나는 낮은 한숨을 내뱉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한시아의 부드러운 육체를 어루만지며 그 속을 나로 꽉 채우고 싶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시아야.】
【....네?】
갑작스러운 나의 진중한 목소리에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한시아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야 해.】
【........】
【사실 나는.....】
나는 내가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됐는지부터 한시아, 그녀를 강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이병찬과 이병찬을 사랑할 운명이었던 그녀들에 대한 얘기 등등을 그녀에게 전부 토해내었다.
물론, 조금의 거짓말을 교묘하게 섞어서 말이다.
어느 정도는 그녀가 나에게 꼬치꼬치 캐물으며 의심을 할 거란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한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고, 때로는 화난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나의 입에서 거짓과 진실이 섞인 이야기가 흘러나온 지 30분 정도가 되었을 때.
한시아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나를 꽉 끌어안았다.
참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쓸데없는 정이 많은 그녀였다.
물론, 그 쓸데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정이 싫지는 않았지만.
【...흐으윽...! 끅..! 도,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신거에요....끅..!】
【뭘, 이 정도로..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끄윽...! 그, 그치만.....후에에엥....】
나의 일을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대신해서 울어주고 화를 내는 그녀를 보니 어째서 내가 그녀에게 이끌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이런 무른 듯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씨는 나의 첫 여자친구였던 하린이와 굉장히 많이 닮아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나의 가슴에 파묻혀서 울고 있는 한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어느 정도 진정이 된듯한 그녀가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고, 나는 내가 뱉어낸 말들을 차분히 떠올리며 그 어떠한 설정오류도 잡히지 않게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 그럼 사이비님은 이곳의 사람이 아닌, 어떻게 보면... 이계인이겠네요...】
【....뭐, 그렇지. 확실한 건 내가 기존의 세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거니까. 그 빌어먹을 이병찬과 신이란 작자 때문에.】
【.....그럼....언젠가 다시 돌아가시는 건가요? 사, 사이비님이....살고계시던 차원으로....】
한시아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였고 나의 눈을 피해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라.......생각만 해도 지루하네. 크크큭.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가 없던 나는 피식 한 번 웃고는 한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몰라. 신이란 놈이 이병찬 그 새끼를 대신해서 차원 이동을 해야 한다고 했지.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말을 안 해줬거든.】
거짓말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분명, 신이란 놈이 이병찬은 이곳에서 해피엔딩을 맞이하며 여럿의 히로인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건 이병찬의 운명이었고, 살인으로 인해 이병찬의 운명을 빼앗은 나는 그와는 다르게 모든 게 반대였다.
사람들의 호감도도, 용의 운명이 아닌 뱀의 운명을 받은 것도, 한시아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던 이병찬과 달리 아주 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도 모든 게 달랐다.
그러니, 한시아에게 무책임한 말로 확신을 줄 수 없었다.
나의 이세계 엔딩은 아직 정해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렇다고 해서 움츠려있을 필요는 없지. 이병찬의 운명을 빼앗은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나의 운명이야.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거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투명한 나의 바램과 확고한 의지를 담은 결심을 되뇌던 그 순간.
【진실된 강력한 의지가 인과율에 간섭을 시작합니다.】
【......강력한 의지로 인해 운명이 흐름이 크게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예정되어있던 결말을 수정합니다.】
【예정되어 있던 결말을 수정함으로써, 죽음을 피하게 됩니다.】
【죽음을 피해낸 보상으로 【고유 능력: 죽음 회피】가 주어집니다.】
【뱀의 운명이 이무기의 운명으로 변화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바뀐 운명으로 인해, 메인 퀘스트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가 주어집니다.】
【메인 퀘스트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의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머릿속을 멍하게 만들 정도로 수많은 알림음들이 들려왔다.
........미, 미친....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건 나의 운명이 대격변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침울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시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녀를 위로해주며 달래주는 것보다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확실하게 확인을 해봐야 했다.
`상태창.`
【이름: 사이비】
【나이: 20】
【크리쳐: 뱀 (이무기)】
【특성: 마법】
【속성: 독】
【힘: B】 【민첩: B】 【체력: B】
【마력: A】 【도력: A】
【고유 능력: 도력, 차가운 피와 심장, 쾌락액, 뱀의 머리, 길라잡이, 뱀의 심안, 텔레파시, 탐(?), 사이코메트리, 죽음 회피】
【운명】: 【기본 능력치 상승률: 10%】 【현재 추가 능력치 상승률: 1%】
김아영에게 주필리아(Zoophilia)의 성욕을 쏟아부어 스펙업을 한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그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스펙업이 찾아왔다.
무려, 모든 능력치가 한 단계씩 올라가 버린 상황이었다.
잘은 몰라도 이 정도 능력치면 A 클래스에 있는 훈련생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절대 꿀리지는 않으리.
또한 크리쳐 항목에 이무기라는 단어가 적혀있었고, 【죽음 회피】라는 고유 능력이 추가되었다.
...미친....이게 도대체.....이, 일단 능력부터 확인해보자.
나는 너무나도 놀란 탓에 덜덜 떨리는 손을 허공을 향해 들어 올린 뒤, 【죽음 회피】라는 고유 능력에 대해 살펴보았다.
【죽음 회피】
한 달에 한 번,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단, 영혼이 몸을 떠난 시간이 10분이 넘은 사람은 살릴 수 없으며, 자신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
...허어...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0분이라는 제한시간이 있었지만, 죽어있는 사람을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니, 내 기준에선 이런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신이란 녀석들밖에 없었다.
.....후우.....진정하자.....그 다음 확인할 게....메인 퀘스트....?
나는 상태창을 띄울 때와 똑같이 마음속으로 메인 퀘스트를 떠올렸고, 곧 나의 눈앞으로 당연하단 듯이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메인 퀘스트】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이병찬을 사랑할 운명이었던 그녀들을 미워하지 말자. 대신, 그녀들을 공략해 나의 여자, 또는 암캐로 만들자.】
【보상】: 모든 능력치 상승, 차원 선택권.
【현재 공략에 성공한 대상】: 김아영.
메인 퀘스트를 확인하자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이병찬을 사랑할 운명인 그녀들이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그녀들을 비하하며 나 혼자서 섀도 복싱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들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망나니였던 이병찬이 온갖 주인공 버프를 받으며 그녀들의 눈앞에서 화려한 업적들을 세우며 영웅이 될 운명이었는데….
강한 남성에게 이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객관적으로 외모까지 제법 뛰어난 이병찬이었으니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
나는 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그 말에 복잡한 기분이 들어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사, 사이비님?】
한시아가 나의 손을 꼭 붙잡으며 걱정스럽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왜?】
【아, 아뇨...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길래....】
【아, 미안. 좋은 소식이 들려와서 말이야. 아까 내가 얘기했던 길라잡이라는 시스템 기억나?】
【...네...기억나요. 이곳의 생활에 잘 적응하게 도와줬다는 그...인공지능 시스템이요?】
씨익.
나는 환하게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고 흔들었다.
【맞아. 아! 그리고...아까 언젠가 다시 내가 살던 차원으로 돌아갈 거냐고 물었지?】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자, 한시아는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있어.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는 방법이....】
나는 한시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고, 내 말을 들은 한시아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선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저, 정말요...?!!! 꺄, 꺄아아아!! 저, 정말 다행이에요.... 저, 저는...우리 아이들을 아빠 없이 키우면 어쩌나하고...히잉...】
.....아, 아빠?.....내가....?
이미 나와의 노후계획까지 세워놓으려는 듯, "애는 여섯이 좋겠어요. 아들 셋, 딸 셋으로요!"라고 중얼거리는 한시아였다.
【어, 어....그래...노, 노력해볼게....후우....근데 그 방법이....조금....네가 싫어할 만한...】
【......그 방법이 뭔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의 미래를 설계하던 그녀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 그러니까....아까 말했던, 이병찬의 그녀들을 전부 공략해야 한달까, 섹스를 해야 한달까…….】
꿀꺽.
나도 모르게 나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며 크게 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아주 조용하면서도 낮은 한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설화 언니도 포함되겠네요……?】
그녀의 말에 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렇지…. 본의 아니게 자매덮....아, 아니, 상황이 그렇게....】
나는 말을 마치고서 이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는 한시아의 심판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