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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57화 (57/57)

〈 57화 〉 성녀와 마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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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옛날. 인간들의 국가가 제국의 깃발 아래 하나로 통합되기도 이전에 있었던 일.

대륙에는 마왕이 강림했고, 용사와 동료들은 그에 맞서 싸웠다. 결국, 마왕을 쓰러트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사악한 힘은 완전히 소멸시키는 게 불가능해서 결국 봉인해야 했다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이곳. 살을 베는 칼바람이 몰아치고, 주변에는 온통 눈 덮인 산밖에 없는, 대륙의 북쪽 끝. 북쪽 산맥 어딘가에는 마왕의 혼이 봉인되어 있다고 한다.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마왕의 혼 같은 물건을 비옥한 땅에 둘 수도 없었을 테니. 이런 장소로 옮겨둔 건 당연한 결정이었을 거다.

비록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 이지만 이곳에도 적게나마, 사람들이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사냥꾼이며, 상점조차 없는 조그마한 마을.

난 이곳에 파견된 성녀 카밀라다.

혹여나 마왕의 봉인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주민들이 타락하진 않았을까. 감시하는 것이 본디 내 임무지만.

막상 이곳에 와서 주로 하는 일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다.

퍽! 퍽! 퍽!

"휴우... 힘들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건, 성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커다란 양손 도끼.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조차, 왕복하는데, 꼬박 며칠이 걸린다. 주기적으로 생필품을 보급하러 다녀오긴 해도, 장작과 같이 부피가 큰 소모품은 이렇게 직접 자급자족을 해야만 한다.

수녀원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성녀가 되었을 땐. 나도 제도에 있는 화려한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꿈꿨지만, 이런 변두리 중의 변두리로 발령받게 되었다.

성녀씩이나 돼서 직접 장작을 팬다는 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긴 해도. 이젠 꽤나 익숙해져서 버틸 만 하다. 이것이 이곳의 생활방식이니까, 살아남기 위해선 적응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제도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지만.'

사실 이런 외딴곳에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마을 주민들이 나를 덮쳐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당장 교회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장소에서 강간이라도 당한다면. 저항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사냥꾼들은 다들 품행이 거칠긴 해도,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고.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니까.

"성녀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못 보던 얼굴이네요?"

갑자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냥꾼처럼 보이지는 않는 깔끔한 외형의 젊은 청년. 도시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이런 장소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사냥꾼들에게 모피를 사러 왔어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 성녀님을 뵙게 될 줄 몰랐네요."

"그러신가요..."

그 순간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성녀님. 실례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어... 뭐죠?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텐데요..."

"사실은 고해성사하고 싶습니다."

"고해성사요? 그런 거라면... 물론 가능하죠."

"감사합니다. 그럼 이런 장소에서는 조금 그렇고... 밤 즈음에 찾아오겠습니다."

"네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고해성사를 받는 건 교단의 의무니까요. 교회라고 부르기에도 초라한 건물이지만..."

난데없이 그는 내게 고해성사를 받아달라고 요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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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어둠이 짙게 깔리고, 종종 늑대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밤이 되었다. 나는 난로 곁에 앉아, 밤 즈음에 찾아오겠다던 청년을 기다렸다.

'고해성사라니, 대체 무슨 일일까?'

고해성사.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신께 용서를 구하는 의식.

보통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고해 하나하나에 대게 별다른 마음을 쓰지 않는다.

죄인을 용서해 하는 것은 성직자가 아니라 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이유는. 일일이 모든 고해를 자신의 일 처럼 공감해 주었다간, 감당할 수도 없고 너무나도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는, 신자의 죄가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고. 듣고 난 직후에 대게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되는 고해성사이기도 하고. 청년이 내게 부탁이라고 말할 정도로, 꺼내기 어려웠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하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마구 피어오른다.

똑똑똑...

"성녀님 저 왔습니다."

"아 들어오세요. 시설이 많이 누추하죠? 원래는 칸막이를 두고 그 너머에서 진행해야 하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성녀님의 얼굴을 보며 할 수 있어서 더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시작할까요? 고해성사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누설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이야기해 주세요."

"성녀님... 저는..."

그는 잠시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에 앞선 사람들의 평범한 반응이니.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마족입니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신자의 말을 듣고서 깜짝 놀라거나, 소스라쳐서는 안 돼지만.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네???????"

혹여나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만약 마족이라고 하는 그의 말이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퇴치 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마족에게 고해성사를 듣는 다는 건. 당연히 지금껏 겪어본 적도 없었고, 그러한 기록을 본 적도 없다.

"마족이라곤 해도... 간단한 흑마술조차 할 수 없는 하찮은 최하급 마족이죠. 그런 제가 어째서, 차원의 경계를 넘어 이곳에 나타나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 그런…. 가요..."

그의 말은 농담이나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가 최하급 마족이 아니었더라면, 몸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운을 신성력으로 감지해 낼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나를 속이고자 했다면. 굳이 스스로 정체를 고백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기습한다거나, 약 같은걸 먹일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제게 그런 말을 왜 하시는 거죠? 교단과 마족은 서로 적인데요."

"교단에서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딱히 별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싸우고 싶은 생각 따윈 없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낯선 곳에 떨어져서, 꽤 오랜 시간을 눈 속에서 헤맸습니다. 그래서 이미 제 몸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정기를 흡수하지 못하면 곧 죽게 될 거예요."

"...."

"겨우 이 마을을 발견했을 땐,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정기를 흡수할 수 있는 대상이 없더군요. 성녀님. 당신만 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게 정기를 흡수하고 싶다는 이야기인가요? 그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도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몸 상태로는,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교단의 성녀에게, 그런 협박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마족이 죽든 말든 제가..."

"협박이 아닙니다. 그저 거절당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인지라... 단지 생존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간절해 보였다. 나도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면서. 생존이라는 말이 가지는 무거운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부탁인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큐버스들 처럼 누군가를 유혹해 타락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런 것에 관심도 없어요."

"그... 그러니까..."

"사악한 힘을 다룰 수 없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존재. 그러나 종족은 마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그저 태어났을 뿐이지요."

그의 이야기에선 절절한 진심이 전해졌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의문들이 떠올랐다. 내게 감히 신성한 교리를 제멋대로 해석할 권한은 없겠지만...

사악한 힘을 다룰 수 없다면, 평범한 인간과 마족은 무엇이 다른가? 마족이라고 해서 모두 사악한 존재인가?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데, 그게 마족에게도 적용될까?

하는 의문들.

"그래도 정 안 되겠다고 하시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남은 힘을 쥐어짜네, 부디 죽기 전에 도시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한편으로는, 견습 시절에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던 타락한 성직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수녀와 신자들에게 추근덕대던 쓰레기들.

심지어 막 수녀원에 들어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들에게. '축복을 내린다'라는 명분으로, 몸에 손을 대기까지 했지.

돌이켜 보면 내가 성녀가 되자마자 이런 곳에 발령받게 된 것은, 그때 완강히 저항해서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는 비록 마족이지만, 최소한 입으로는 신을 섬기라고 말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던 성직자들보다 훨씬 인격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길바닥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건, 너무나도 측은하게 느껴진다.

"그...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제게 몸을 맡겨 주세요. 드레인을 할 수 없어서, 가장 근원적인 방식으로 정기를 흡수하긴 해야 합니다만..."

"그럼 제가, 이 몸으로. 당신의 죄를 사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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