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소꿉친구와 패션모델(1)
* * *
퀴퀴한 먼지로 가득한 창고. 원래 창고라는 곳이 당장은 쓰지 않을 물건들을 처박아 놓는 곳이지만, 때때로 창고도 정리해 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새 물건을 넣을 공간이 생기니까.
아마 앞으로도 평생을 쓰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을 가지다 버리기 위해 열심히 분류하던 와중에. 낡고 투박한 라디오 하나를 발견했다.
그 라디오를 본 순간, 나는 추억에 잠겨 어릴 적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부나 하라면서 부모님이 TV를 마음껏 보게 해 주지 않아서, 밖에서 놀거나, 방에서 이 라디오를 듣곤 했지.
거의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물건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에 놀랐고.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에 처박혀 있었을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혹시 지금도 작동이 되려나?”
딱히 이 라디오가 고장 났던 기억은 없지만, 워낙 오랫동안 방치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고장 났더라도 전혀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라디오는 워낙에 단순한 전자기기이기 때문에. 어쩌면 혹시 여전히 작동될지도 몰랐다.
작동될지도, 안될지도 모르는 오래된 물건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호기심. 갑작스럽게 생겨난 이 호기심은 너무나 강렬해서, 평소에 운전할 때 조차 라디오를 듣지 않는 내게. 이 낡아빠진 라디오의 먼지를 털어내고, 남는 콘센트를 찾아 헤매는 귀찮음을 기꺼이 감수하게끔 해 주었다.
ㅡ치직, 치직, 치지직.
손톱으로 안테나를 길게 잡아 빼고, 코드를 연결한 그 순간, 거칠고 투박한 기계음이 스피커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이 라디오를 조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더라...
자세히 살펴보면, 라디오에는 버튼 하나 없이, 두 개의 다이얼만 존재했다. 하나는 볼륨을 조절하고, 하나는 채널을 조절하는 다이얼.
곰곰이 기억을 되살려 보면, 옛날 라디오는 다 이런 식 이었다. 편하게 TV처럼 자동으로 채널을 잡아주지 않고, 직접 수동으로 채널을 찾아서 맞춰야 했지. 그러나 라디오를 안 본 지 한참 되었기 때문에, 어디에 맞춰야 방송국 채널이 나오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 끝의 감각을 이용해서 다이얼을 살살 돌려대며 미세하게 바뀌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미련한 짓을 할 필요 없이 주머니 속 스마트 폰을 꺼내서 채널 주파수라고 검색해 보면, 금방 찾을 수 있긴 했다. 그러나 왠지 오래된 물건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일까, 최신문물의 도움 따위를 받기는 싫었다.
치칙., 치직., 치지지직.
“흠... 아... 됐다...!”
“청취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XXX의 생생인터뷰 시간입니다. 오늘의 게스트로는 얼마 전, 제XX 회 서울 패션위크에서 우승한 김현주 씨를 모셔봤습니다. 반갑습니다. 김현주씨.”
“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패션모델 김현주입니닷~”
라디오에서는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의 인터뷰어와 게스트의 발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게 아직도 켜지네? 하는 흥분감은 빠르게 식었다.
그도 그럴 게, 딱히 오래된 라디오라고 해서 나오는 방송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라디오가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면, 평소에도 자주 들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특별할 것 없는 내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래도 코드를 빼서 [갖다 버릴 것] 이라는 상자에 라디오를 던져넣기 전에. 기왕 듣기 시작했으니까, 지금 듣고 있던 건 마저 다 들어보자. 하는 생각으로 청취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말이에요. 현주 씨는 어떻게 패션모델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아! 그게 말이죠, 제가 어렸을 때는 정~말 내성적이고 소심한 그런 아이였는데요.”
“지금...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네요.”
“네, 그래서 언제나 놀이터에 나가긴 했는데 같이 놀 친구가 없었어요. 쓸쓸하게 해가 질 때까지 혼자 남아서 외로웠는데...”
그녀는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말이죠! 어느 날 갑자기, 한 남자아이가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준 거예요!”
“오... 그 남자아이가 뭐라고 이야기했나요?”
“그... 크흐흐흐흐흡. 그게 지금 다시 생각해도 부끄럽긴 한데, 왜 여기서 혼자서 이러고 있냐고 하니깐, 친구가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 그다음에는요?”
침착한 목소리를 유지하던 사회자도, 어느샌가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넌 예쁘니까, 자신감 있게 스스로를 당당히 드러내면 친구도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만들 수 있다고 해줬어요. 푸흐흐흐흐., 흐흡., 흡.,흐흐흐흐...”
“지금 시청자 여러분들에겐 안 보이시겠지만, 현주씨 얼굴이 완전 새빨갛게 변해있어요. 혹시 현주씨의 첫사랑 이었나요?”
“뭐... 연애 감정이라던가 그런 건 전혀 모르던, 어릴 적 소꿉친구와의 이야기긴 한데...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까, 고백멘트나 다름없기는 하네요.”
“그래서 그 남자아이가 패션모델이 되는 것에 도움이 된 건가요?”
“네. 그때 이후로, 옷 입는 것도 신경 쓰기 시작하고. 많은 사람에게 내가 주목받을 때의 기쁨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패션모델이라는 꿈을 가지게 된 거죠!”
“그럼... 그 아이와는 이후로 어떻게 되었나요?”
“아... 그게 말이죠. 사실은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부모님의 직장 일 때문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아...”
사회자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뒷이야기를 괜히 물어봤나 하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서로의 부모님끼리 친분이 있었던 관계도 아니었고, 각자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던 시기도 아니었으니까요. 얼굴만 어렴풋이 기억이 날 뿐, 이름도 모르니. 이젠 연락할 방법이 없죠."
“하긴... 그렇겠네요.”
“지금도 종종 그 아이를 떠올리곤 해요, 네가 있었던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건데. 이젠 커서 어른이 됐을 그는 어디에서 뭘 하면서 살아갈까 하고 말이죠.”
“그런... 현실적인 이유로 헤어진 게 참 안타깝네요.”
“아! 어쩌면, 이 방송을 우연히 듣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요?”
“오... 그렇게 된다면 정말 운명적인 재회인데요? 하지만 솔직히, 우리 방송이 그다지 인기가 높지 않은 라디오 방송이라서. 그럴 가능성은 낮을 거에요. 하지만 현주 씨가 앞으로도 패션모델로서 계속해서 승승장구해서 더 잘나가는 다른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명해지게 된다면...”
“그렇겠죠? 어떻게든 꼭 다시 만나고 싶네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패션모델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되겠어요. 국내 최고... 아니, 세계 1등 모델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닷!”
“오호호, 포부가 대단하시네요. 그 목표도 꼭 이루고, 자신의 삶을 바꿔준 그와 재회할 수 있기를 제가 응원할게요.”
...
어느샌가 인터뷰를 끝까지 전부 듣게 된 나는,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아 맞은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이거... 내가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이잖아...?’
당혹감. 혼란스러움. 반가움. 그런 감정들이 교차했다. 물론 그중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던 감정은 놀라움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낡은 라디오를 버리기 전에, 호기심 때문에 한 번 켜볼까 실험을 해 봤고, 작동을 확인하려고 다이얼을 돌려서 틀어본 아무 채널에서, 마침 그녀가 인터뷰하고 있었고.
그 사연의 주인공이 나다.
심지어, 그녀의 인터뷰에 따르면, 내가 그녀의 삶을 바꿔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우연이 겹쳐서 일어날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얼마나 까마득할지.
낡은 라디오가, 이젠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옛 인연을 다시 이어준 것이다. 그녀는 패션모델로 성공해서, 어디 패션쇼에서 우승까지 했다고 하니까. 검색하면 정보도 얻을 수 있을 테고, 개인적으로 연락할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녀에게 반갑다고 연락을 해도 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녀를 거의 잊고 있었는데.
나를 종종 떠올리며 어떻게 살아갈까 궁금해했던 그녀와 달리, 그녀는 내게 있어서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어릴 적 소꿉친구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헤어지게 된 이후로도, 그저 언젠가부터 안 보이네? 싶었고. 기억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딱히 근황이 궁금하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아니 애당초, 어린 시절에 놀이터 한쪽에서 쓸쓸해 보이던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 주었던 별 의미 없었던 호의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았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해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겠지. 낡은 라디오가, 추억을 생생하게 재생 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떠올릴 일이 없었을 것이고.
이런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녀와 나는 살면서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남남에 불과했을 텐데. 그렇다고 사실 나도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방법이 없었다고 뻔뻔하게 거짓말할 자신도 없다.
“후우... 어떻게 해야 하나.”
심란한 기분으로 라디오의 안테나를 접고, 콘센트를 뽑았다. [갖다 버릴 것]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바라보면서, 추억은 그립긴 하지만. 그래 봐야 이제는 결국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 뭐 굳이 다시 만나봤자,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추억은 추억 속에 담아 놓는 게 좋을거야.”
추억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킨 순간. 내가 지금 있는 장소가, 어둡고 퀴퀴한 회색 먼지로 뒤덮여 있는 낡은 창고가 아니라. 먼지 한 톨 없는 순백색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상한 공간이었다는걸 알아챘다.
그리고 화장, 옷, 헤어스타일. 모든 게 어릴 적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한 그녀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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