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45화 (45/57)

〈 45화 〉 여기사와 오크 2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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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 부스럭.

깊은 산속. 제대로 된 길이라곤 없는 억센 풀숲을 헤치며 나가 한참을 걸으면 나타나는 공터. 당연히 그는 지각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일찍 약속했던 장소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서로 볼꼴 못 볼 꼴을 다 본 사이였지만. 실제로는 기껏해야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먼저 와 있었네? 그럼 바로 시작하자. 준비됐지?”

이런 장소에 그를 불러내서 병사들 몰래 혼자 만나러 왔다. 물론 몰래 관계를 즐기려는 건 당연히 아니고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오크들 소굴에 무사히 잠입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준비.

그도 이번에는 작전을 위해서 지금까지의 허름한 모습과는 달리, 나름대로 옷이라 부를만한 것들을 챙겨입고 왔다. 그래 봐야 덩치 큰 양아치 건달 같은 느낌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옷을 벗었다. 이미 그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것 따위는 전혀 부끄럽지 않게 되어버렸으니 그냥 훌렁훌렁 빠르게 탈의했다.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건지 모르겠는데...”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절대 들키지 않을 거야. 아마 꿈에도 생각 못 할걸.”

“그래도...”

“괜찮아. 잘못되면 내가 책임질게. 내 실력을 못 믿는 거야? 최악의 경우에는 너만이라도 무사히 도망칠 수 있게 해줄 테니 믿어봐.”

“아... 알겠어. 그럼 시작할게.”

그는 펜을 꺼내서 내 알몸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아름다운 그림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림. 자지와 보지를 본뜬 형상들, 각종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그림들이 삐뚤빼뚤하게 대충 그려지고 있었다.

평범한 도형인 동그라미는 유방의 굴곡을 따라서, 하트는 자궁이 위치할 아랫배에 그려지면서. 천박하고 저열한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그 모습은 희고 깨끗한 나의 피부와 어처구니없는 대비를 이룬다.

슥... 스윽... 슥슥... 슥...

아랫배와 허벅지에는 무언가 이상한 글자도 적힌다. 그러나 오크어를 전혀 모르는데도, 이 글자가 대충 무슨 내용일지 예상이 간다. 분명히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문구일 게 뻔하지.

그렇게 온몸이 빼곡하게 사춘기 남자아이가 낙서하고 간 담벼락처럼 이용되었으나, 물론 이것으로 끝인 건 아니다.

“그럼 다음으로는... 묶을게.”

그는 이번에는 붉은색 밧줄을 꺼냈다. 나는 팔을 뒤로 모아서 손목을 묶으라는 의미로 내밀었으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뭔가 이상하게 묶기 시작했다.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밧줄은 몸을 크게 한 바퀴 둘러 X자 모양으로 두 번 교차하여 매듭을 짓는다. 어차피 어떤 방식으로 묶든 간에 마음만 먹으면 이런 밧줄 따위 아주 쉽게 풀어버릴 수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크들이 어째서 이런 구속법을 선호하는지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이 방식은, 신체가 매우 도드라져 보인다.

마치, 노출해도 되는 부위는 가려놓고, 오히려 가려야 할 곳을 뚫어놓아서 중요 부위에 시선을 집중시키게끔 만든 창부용 복장 같은 느낌. 당연히 그냥 알몸과 비교할 수도 없이 부끄럽다.

또한, 인간을 ‘포박’한다는 느낌보다도, 줄을 이용해서 상품이나 물건처럼 ‘포장’ 한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마지막 매듭은 사타구니 굴곡과 엉덩이골 사이를 지나 뒤에서 묶인다.

방금 붉은 밧줄과는 별개로 양팔에는 구속구가 씌워지고 목에는 가죽으로 된 개목걸이 같은 목줄이 채워진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내 품위와 존엄성은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스스로 이러한 꼴을 자처한 이유는 슬슬 눈치챘겠지만, 성노예로 위장하기 위함이다. 그는 나를 팔기 위해 나온 노예상인 역할을 연기해 줄 것이다.

고도의 환각 마법을 쓰거나 전문적인 특수 분장사를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된 내 모습을 보고서, 내가 토벌대 사령관이자 제국의 여기사인 레아나 본인 일 거라고는 전혀 의심할 수 없을 터다.

“으흠... 이 모습도 꽤나... 보기 좋네...”

“그걸 지금 칭찬이라고 하는 거야? 너 보라고 이런 모습을 한 게 아닌 거거든. 이걸로 준비는 다 된 거겠지?"

솔직히 이 작전은 그가 내게 ‘성노예 선언'을 하라고 한 데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을 해 봐도, 의심받지 않고 잠입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물론 내가 변태가 아니라 상식인이었다면... 머릿속에서 이런 작전이 떠올랐어도 감히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만은...’

“뭔가 허전한데... 무언가를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이...”

“뭐? 이 정도면 된 거 아니야? 대체 뭐가 더 필요하지?”

“그게... 노예들의 복장이... 아! 맞다. 입마개, 입마개를 깜빡할 뻔했어.”

“잠깐, 입마개를 쓰면 말을 못 하게 되잖아?”

“그렇지만... 노예가 소리를 질러서 도움을 요청하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반드시 입마개를 착용시키게 하는데...”

“그런가... 그러면 어쩔 수 없네. 근데 입마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준비해오지 않았는데. 도대체 입마개를 어디서 구해야 하지? 뭔가 대용품으로 쓸만한 거라도 있나?”

“흠... 대용품이라... 잠깐, 이거면 됐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바지를 내리더니, 허리춤에 묶여있던 천을 풀어서 내게 내밀었다. 잠깐 저건, 설마...

덜렁­

팬티 대용으로 쓰던 천 쪼가리. 이걸 지금 나보고 입마개 대용으로 쓰라는…. 건가...?

“도대체 뭘 들이미는 거야, 이걸 나보고 입에 물라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나는 웬만해서는 화를 잘 내는 편이 아니었다. 그와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에서 만났을 때, 건방진 태도를 취하거나. 난폭한 섹스를 할 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말로 기가 차서,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포박을 풀어버리고 명치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은데, 여분의 구속 구도 없으니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노예들은 다 입마개를 차고 있는 와중에 혼자만 입마개를 차고 있지 않다면... 분명 의심을 받게 될 텐데...”

그의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놀리거나 골탕 먹이기 위한 제안이 아니라, 진심으로 입마개를 대용할만한 물품이 이것밖에 없다고 여긴 모양이다. 잠깐... 진짜...?

뭔가... 주변에 입마개로 쓸만한 다른 물건은 없나? 아무리 그래도 진짜 팬티를 입마개 대용으로 쓰는 것 만큼은 절대로 하기 싫은데...

구속된 상태로 아등바등 몸을 돌려대 가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온통 풀. 나무. 돌. 전혀 쓸모없는 것들뿐. 하필이면 내가 입고 온 옷도, 하늘하늘하고 고급스러운 원단이라 입마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확실히... 노예용 입마개라고 하면... 저런 거칠고 꼬질꼬질한 게 딱 어울리기는 하는데...’

그래. 이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몸이다. 무엇을 못 하랴. 여기까지 와서 고작 이런 이유로 작전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 진짜... 알았어, 차면 될 거 아니야...”

나는 깊은 탄식을 내쉬며 그의 팬티를 입마개로 쓰는 것에 동의했다. 온몸이 구속된 상태로 목을 삐죽 내밀고 입을 크게 벌려 그가 입마개를 채워주는 것을 기다리는 모습이, 어미 새가 먹이를 넣어주기를 기다리는 아기 새 같았다.

“...윽…! 흡...! 컥!... 허업.., 흡.., 읍...”

입마개를 베어 문 순간, 농축되어 있던 지독한 냄새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냄새는 입안 가득히 퍼지고, 수직으로 타고 올라와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했다.

다른 요소는 전혀 없이. 오직 냄새만으로 혼절할뻔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럴 일은 없겠지. 그러나 정말 가까스로,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텨냈다. 이 충격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끊임없이 반복된다.

“읍! 읍읍! 읍!”

입마개를 차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고,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팬티를 갈아입지 않고 입어왔던 거야! 라고 일갈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 노예야.”

그는 건방진 말투를 툭 던지고서는, 갑작스럽게 목줄을 휙 잡아끌었다. 또다시 튀어나왔다. 저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갑작스럽게 돌변하는 태도.

괘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이러한 건방진 태도가 꼭 필요했다. 이제부터는 언제 어디서 오크가 튀어나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영역.

어색한 연기로 인해서 노예상인과 노예인 척 위장하고 잠입하려고 한다는 게 들켜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런 그의 태도는 지극히 타당했다.

그렇지만 어째... 연기라기보다는...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내게 굳이 '성노예 선언' 따위를 시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런 게 그의 취향인가 보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도 이제부터 노예 상인에게 팔리기 위해서 끌려가는 성노예의 연기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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