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여기사와 오크 2부(1)
* * *
똑똑똑...
“레아나 님 제국 군수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들어와.”
부관이 화려하게 장식된 편지지 한 장을 손에 들고 들어온다. 집무실 책상 앞 까지의 걸음걸이는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양새다. 우두커니 서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뜸을 들이고 있다.
“왜 그러고 있지?”
“그... 그것이..., 서신의 내용이 조금...”
그는 한껏 긴장한 모양새이다. 명백하게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평소에 개인적인 일로 화가 난다고 해서 주변인에게 화풀이하는 성격은 아니였어서, 이런 그의 반응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편지지에 쓰여있을 내용에 대해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읽어보도록.”
“아... 알겠습니다.
군수부는 최근 제도에 퍼지고 있는 불미스러운 소문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하는바 이다. 이에 정확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현재 오크 토벌 작전에 임하고 있는 부대는 가까운 시일 내로 중대한 작전상의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정식으로 철군 명령을 하달받게 될 것이며...”
“후우...”
그는 내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몸을 경련시켰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신을 이어서 읽어 내려간다.
“그리고 여기사 레아나는, 제국의 명예를 더럽힌 죄로. 귀환한 후에 정식으로 재판과 징계 절차를 밟게 될 예정이므로...”
“음… 그래, 그 정도면 됐다. 이제 그만 나가봐.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
“네…. 넵...!”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부관은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쏜살같이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예상하지 못했던건 아니었지만, 결국에는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일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갑작스럽게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었다가. 적진 한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오크의 정액을 온몸에 한껏 뒤집어쓴 채. 헤벌레한 표정을 지은 꼴불견인 모습으로 말이다.
전투는 우리 쪽 피해가 거의 없는, 너무나도 손쉬운 승리였고, 나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병사들에게 구조되었으나. 패배한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패배한 것 이상으로 우리 쪽 진영은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수많은 부하들이 분통을 터트리고, 내게 실망했다. 지금껏 쌓아왔던 고결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으며, 그렇기에 더더욱 배신감을 느꼈을 터이다.
나를 둘러싼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소문들이 생겨났고. 이내 날개 돋친 듯 퍼져나갔다. 결국에는 그게 제국 군수부의 높으신 분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된 모양이다.
그러나.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라는 이상한 장소에 갇히게 되었고. 그 장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라고, 있는 그대로 반박, 아니 변명해 봤자. 그 누가 믿어줄까.
그 장소가, 누군가가 나를 악의적으로 모함하기 위해 만든 함정이라는 증거도 찾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자괴감이 치밀어 올라 차마 긍정할 수 없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분명히 나는. 처음에는 몰라도, 어느샌가 오크와의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기사의 본분을 잊고 육욕에 빠져버린 스스로가 누구보다 실망스러워서. 부하들에게 달리 할 말이 없다.
결국 나는 그런 무성한 소문에 단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침묵하면서 모든 비난을 겸허히 감내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후우....”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 본들, 변하는 건 없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지.
‘역시... 내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큰 공을 세우는 것밖엔 없어.’
어찌 됐건 전장에서 벌어진 일. 불명예는 승리로 씻으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정식으로 철군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는다는 것.
작전상의 문제로 철군 명령을 따를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면, 어느 정도 연기받을 수 있겠으나. 하필이면 우리들의 적이 오크라는데 문제가 있다.
***
단언컨대. 제국에 적대하는 수많은 이종족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적인 적을 꼽으라면. 오크는 분명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오크들은 한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며 착실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약탈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다.
모든 종족원들을 아우르는 통합된 우두머리도 없으며, 토벌대가 나타나서 한 부족을 격파해도, 다른 녀석들은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버린다.
차라리 강력하게 방어진을 치고, 우리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적이라면. 전 병력을 동원해서 총공격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겠으나, 이렇게 도망쳐 버린 녀석들에게는 방법이 없다. 우리가 무작정 산속을 헤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명예로운 종족이니 뭐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곤 하지. 비열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무언가... 오크들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줄 방법이 어디 없을까? 급습해서 유력 부족장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 이 순간에도, 오크들은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우리들을 조롱하며, 다음에 약탈할 마을을 물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피해액만 따져도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지. 하다못해, 빼앗긴 물자라도 되찾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집무실 책상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머릿속에서 번뜩! 하고, 기가 막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잠깐..., 오크들이 서로 약탈해온 물자를 교환하는 현장을 노리면 되지 않을까?’
분명 오크 부족들 사이에서는 교류가 있을 것이다. 약탈물자는 고정적인 수입원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 필요한 것을 서로 간에 교환하기 위한 장소도 존재할 테고.
그 장소와 시간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탓이었을까. 순간적으로 눈앞이 새하얘졌다.
균형을 잃고 옆으로 풀썩하고 쓰러졌으나, 간혹가다 한 번씩 있는 일이라서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보다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
...?
그러나 새하얘진 시야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음에도 도통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아니 잠깐 이건...
시야가 이상해진 게 아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그 사실을 깨달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사방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익숙한 공기.
쿵... 쿵... 쿵...
미칠 듯이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소리가 울려 퍼진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는 그보다 더 크게 이 그다지 넓지 않은 장소를 가득 메운다.
뒤늦게나마, 이곳이 한번 온 적 있었던 장소.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일전에 있었던 일, 애써 잊으려 했던.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며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 아아...”
앞으로 당하게 될 일에 대한 기대감에, 온몸이 한껏 달아오른다.
파도처럼 밀려들어 오는 자괴감. 그러나 그보다 훨씬 커져 버린 열락.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덕분에 일어났던 흥분이. 또 다른 흥분과 만나 섞여, 용솟음친다.
젖꼭지는 팽팽하게 곤두서서 옷 위에서도 발기되었다는 게 확연히 눈에 띄는 모습이었고, 아랫쪽은 즙이 흥건하게 새어나와 하반신을 축축히 적신다.
이 음란한 신체는, 나를 둘러싸고 파다하게 퍼진 온갖 모욕적인 소문들이. 전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 저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휙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그때 그 오크가 있었다. 오히려 나보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히... 히익...! 그...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는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서….”
나를 어려운 처지로 만든 게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잔뜩 쫄아있는 표정을 바라보니 신기하게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한 게 전혀 없음에도 눈치를 살피던 부관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 보이기도 했다.
“미... 믿어줘... 나는... 그...,. 정말... 진짜로..., 이 장소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이런 걸 만들어낼 능력도..., 전혀 없는... 그냥 평범한 오크일 뿐인데...”
피식, 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버벅대는 그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짓거 용서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에도 여기서 나갈 방법이 달리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오크라곤 해도,
내통자 역할 정도는 해낼 수 있겠지.
내 미소를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공포에 질려 안색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는 그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좋아. 그때 있었던 일은 용서해줄게. 그리고 이번에도 내 몸을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 대신 조건이 있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