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엘프여왕의 항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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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크하하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쟁터에서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났다는 것만큼이나 좋은 소식이 또 있을까. 그것도 우리들의 완전한 승리로 말이다.
엘프 여왕 알리시아가 보내온 서신은 고급 양피지에 쓰여있고. 글자 하나하나에서 기품이 느껴져서, 엘프의 글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신비로운 고대의 문서나 주술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잡아 온 포로를 통해서 통역시킨 내용에 따르면 그 내용은 간단했다. 마침내 끈질기게 제국군에게 저항하던 엘프족들이 항복 조건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엘프의 항복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태생적으로 긴 수명과 마법적인 소양을 타고나며, 모든 엘프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게 아름다운 외모와 건방진 성격까지 지니고 있어. 인간들이 번성하기 이전에는 대륙의 지배자 위치에 있던 종족. 자신들이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종족이라고 여기며 다른 종족을 깔보던 오만한 녀석들을 마침내 굴복시켰다.
이제는 대륙의 인간 패권에 도전할만한 종족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으며, 그 중심에는 우리 제국이 있다. 그리고 나 3군사령관 알렉스는 마침내 그 업적을 달성한 장군으로서 역사서에 이름이 남겠지.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그리고... 좋은 볼거리가 생겼군. 기대되는데.’
...
탁탁탁탁....,
밖 복도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 문을 두드린다.
“알렉스 사령관님. 저 수인 부대 지휘관 토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무슨 용건이지?”
조심스럽게 집무실로 들어온 그녀의 표정에서는 수많은 감정이 느껴진다. 그녀의 출신과 과거를 생각해 볼때, 어째서 나를 찾아왔는지 쉽게 예상 할 수 있다.
“저어... 엘프 여왕이 항복 조건에 동의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래. 사실일세. 나도 방금 보고를 받았어.”
“그렇다면 그 항복 내용은...”
“자네도 진작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네에 그렇죠... 하지만 그건... 조금... 너무하지 않습니까.”
“너무해? 항복 조건은 진작부터 엘프들에게 전달되었고. 그 내용에 동의한 건 다름 아닌 알리시아 본인이란 말일세. 이미 그쪽에서도 각오를 굳혔을 텐데. 적에게 동정심을 가지는 건가?”
“그건 그렇지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제국에게 저항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그대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읏...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네. 나가보게.”
“알겠…. 습니다.”
그녀가 제국의 적들과 열심히 싸워 왔다는 것은 사령관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가 유독 엘프에게만 동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뻔하다.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기 때문이겠지.
고양이 수인족은 항복 없이 끝끝내 저항하다가 종족 전체가 노예로 굴러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 그녀는 한동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노예로 있다가 그 활약을 인정받아 제국군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고양이 수인족들은 여전히 노예 상태.
한때 저항했던 제국의 군인이 되었으니. 스스로는 상당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 그녀가 자신의 종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다.
...
그리고 제국에게 항복을 택한 종족은 4등 시민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비록 엘프들의 재산, 영토, 자원은 수탈당하고 종족원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와 창녀로 전락하기는 하겠으나...
어찌 됐든 4등 시민이라도 제국민은 제국민. 아예 인간이 아니라 물건 취급을 받는 노예에 비해서는 처지가 훨씬 낫다. 엘프 여왕은 스스로를 희생해서 종족을 지키기 위해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 항복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종족의 여왕이나 왕비가 황도로 압송되어 전문 조교사들에게 성적인 조교를 받고. 수만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대낮의 광장 한가운데서, 자신이 천박한 암퇘지로 전락했음을. 인간들에게 완전히 굴종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무슨 변태적인 의식인가 하겠지만, 내가 그녀의 천박한 모습이 보고 싶어서 제안한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제국이 처음 이종족들을 정복하며 확장을 나설 때부터 이어 내려져 오는 유서 깊은 항복의 의식이다.
그리고 그 효과가 매우 뛰어남이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제국에게 흡수된 종족들은 반란을 일으키며 자신들의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 든다. 그리고 멸망한 왕가가 그 반란의 구심점이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굴종 선언을 함으로써, 제국민들은 물론 반란분자들 사이에서도 왕가는 경멸받게 된다. 구심점을 잃고 내분하기 시작한 반란 세력들은 지리멸렬해서 토벌하기에 손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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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끝이냐?”
한켠에는 칼, 창, 활, 마도서 등등. 엘프들의 무기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인간들의 투박한 무기와는 달리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는 무기들. 전쟁이 불리해 지면 자연스럽게 물자도 부족해질 텐데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 싸움에는 필요 없는 쓸데없는 치장질이나 하고 앉아있다는 게 참으로 엘프 놈들 스럽다.
“네... 남은 무기의 전부입니다.”
침울한 분위기와 무거운 공기가 엘프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개중에서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분노와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들어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엘프들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내가 무장해제 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지? 병사들아! 혹시나 숨겨놓은 무기가 있지는 않은지. 엘프 놈들의 집을 낱낱이 수색해라!”
“예!”
병사들은 우령차게 대답한 뒤 기쁜 마음으로 수색을 하러 달려 나간다. 물론 진짜 무기만 있는지 검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몰래 귀중품을 스리슬쩍 훔쳐 가도 아무런 저항조차 할 수 없겠지. 오랜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에게 내리는 포상이다.
“자... 잠깐만요! 항복했다고 한다면 우리들도 이제 제국의 일원. 당신에게 그럴 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뭐야? 너 죽고 싶은 거냐. 엘프 여왕이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정식으로 굴종 선언을 하기 전에는 아직 전쟁 중이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내 말이 곧 법이지.”
“큭...!"
"어쩔 수 없습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호오... 드디어 나타나셨나.”
백옥같은 피부와 도도한 눈빛. 달빛을 머금은 것 같은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 틀림없는 엘프 여왕 알리시아다.
그러나 전장에서 마주쳤을 때는, 언제나 육중한 갑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는데. 오늘은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엘프 사제들이 즐겨 입는 비단으로 된 원피스 하나만을 입고 나타났다.
“알렉스 님 부탁드립니다.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말아 주세요.”
...
‘하하하하하하... 나를 그렇게도 증오하던 년이. 나보고 알렉스 님 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굴종 선언이 어떤 것인지 엘프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내심 항복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었어도 그녀의 면전 앞에서 "종족을 위해서 희생해서 굴종 선언을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는 놈은 없겠지.
그 오만한 엘프족들이 항복을 받아들이게 된 건, 그녀가 스스로 희생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끌고 가면 별로 재미가 없지...
“그래? 그럼 네년이 하는 걸 봐서. 뭐 하고 있나? 벗어라. 포로에게 옷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 예. 알겠습니다.”
“알리시아님...!”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 하였으나, 이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옷을 벗는다. 물론 내 말이 겉옷만 의미하는걸 아니라는 것 즈음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속옷까지 전부 벗어 던지고 내 앞에 알몸을 훤히 드러낸다.
“다 벗었습니다.”
재미없는 반응이다. 앞으로 당하게 될 치욕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이기는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니.
“괜찮은 빨통을 가지고 있었구먼. 언제나 갑옷에 눌려서 전혀 안 보였는데 말이야.”
“..윽...!”
나는 그녀의 한쪽 가슴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 그다지 촉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를 모욕하기 위함이다. 손을 뗀 자리에는 장갑의 모양을 따라서 선명하게 붉은 자국이 생겨났다.
“아차. 깜빡할 뻔 했군. 네년은 이걸 차고 황도행 마차를 타러 간다.”
그제야 그녀의 표정에서 동요가 느껴진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그녀의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철 덩어리들. 노예 목걸이, 수갑 그리고 사슬.
양손을 뒤로 빼서 사슬로 고정하고, 목에는 노예 목걸이를 채운다. 그리고 사슬을 목걸이 앞부분에 걸어 개 목줄처럼 길게 늘어뜨린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 엘프 동지 여러분들. 저는 비록 이렇게 여러분들을 내버려 두고 떠나게 되었지만, 엘프라는 종족이 멸망하지는 않았으니. 부디 긍지를 잃지 마세요. 저는 제 부족함으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러 가보겠습니다.”
“이야... 눈물겹구먼. 그럼 이제 가자!”
감동적인 순간 따위를 줄 이유는 없었다. 사실 황도행 마차를 여기까지 불러오는 건 일도 아니지만, 일부러 우리 진영에 내버려 두고 왔다. 그녀는 이대로 나에게 직접 질질 끌려 한참을 걸어, 마차에 타는 그 순간까지 조롱과 모욕을 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익숙해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