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36화 (36/57)

〈 36화 〉 온천여행과 오타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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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는... 실망스럽네. 내가 너무 많이 기대를 했나...’

일본에 대한 환상을 잔뜩 품고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비를 모아서 출발하게 된 일본 여행. 워낙에 관광으로 유명한 나라 인지라, 한국어 메뉴얼이 굉장히 잘 구비되어 있어 일본어를 못 하는 나라도 혼자서 여행하는 데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가는 곳 마다 일본인보다 관광객들을 훨씬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일본 특유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있을 즈음이면, 어디선가 시끄럽게 떠드는 중국어와 한국어가 귓가를 때려서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역사 유적지나 박물관은 내가 원래부터 그런 쪽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 그다지 감흥이 없었고.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캐릭터 상품은 상상 이상으로 비싸서 선뜻 지갑을 열기에 망설여졌다.

실제로 가봤던 메이드 카페는 너무 오글거려서 후다닥 나와버렸고, 신사의 무녀는 죄다 할머니 아니면 아줌마였다.

“후아... 그래도 이건 좋네...”

그래도 온천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예약해 놨었던 료칸은 확실히 비싼 값을 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다다미방과 뭐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맛있었던 일본식 정찬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숙소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온천. 그것도 그냥 따듯한 물을 끌어온 게 아니라 진짜배기 온천수가 샘솟는 노천탕. 이런 건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실외의 차가운 바람과 탕에서 올라오는 모락모락한 수증기가 번갈아 가면서 몸을 감싼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마치고 온천수에 몸을 담그니, 열심히 돌아다닌 탓에 피곤했던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행복한 기분에 잠긴다.

“하아... 후우...”

늦은 시간대 인지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겠다. 양팔을 쭉 펴고 탕에 반쯤 기대어 앉아서 위를 올려다보니, 공기는 깨끗하고 밤하늘은 맑다.

아직 한밤중이 아닌데도, 드문드문 별도 보이는 것 같다. 이제서야 이게 일본 여행이지~ 하는 분위기에 취하는 것 같다. 그 순간, 이상한 실루엣이 갑자기 나타나 내 시야를 가린다. 순간적으로 초점이 안 맞아서 눈을 찌푸리고 제대로 쳐다보았다. 그것의 정체는...

가슴이다. 옷이나 수건으로 가려지지 않은 여자의 생가슴. 그것도 상당한 사이즈에 탱글탱글해 보인다.

노출이 심한 수영복이나 여름옷은 윗가슴을 훤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서 종종 몸매 좋은 여자의 가슴을 내려다볼 기회는 있었지만, 이렇게 아래에서 위로 가슴을 쳐다보게 된 건 처음이었다. 물론 핑크색 유두도 전혀 가려지지 않고 훤히 드러나 있다.

“헤에... 잠깐... 뭐야?”

비현실적인 가슴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서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겨우 정신을 차렸다. 뭐지? 여자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녀는 왜 나를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거야?

어려운 한자도 제대로 못 읽기는 하지만, 그래도 들어오면서 자가 없는 것 정도는 똑똑히 확인했다.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내가 오타쿠라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머리에서 떠오른 건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종종 등장하던 시츄에이션 이었다.

그건 바로 시간대에 따라서 남탕, 여탕이 뒤바뀌는 시스템의 온천. 요즘 애니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비교적 서비스신에 관대했던 옛날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던 장면 중 하나다.

“あなたここに一人でましたか? ”

그녀는 당황하고 있는 나에게 대뜸 말을 걸어왔다. 이게 무슨 뜻이었더라?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기는 한데, 정확히 떠오르지는 않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버... 어버버버....”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하고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뛰쳐나갈까? 자신의 처지가 꼴사납고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꺄악?! 무... 무슨 일이야? 나는 분명 조금 전 까지 온천에 있었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 다시 눈을 떴다. 응? 그러고 보니까 이건 분명 한국어인데...?

다시 눈을 뜨자, 사방이 흰색 벽으로 가로막힌 이상한 공간에 나와 그녀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 나는 분명 예전에 이 장소에 온 적이 있다. 여긴 분명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었지.

그리고 일본어를 못 하는 나와, 게임 속 일본 캐릭터였던 그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국어로 들린 건 그 덕분일 것이다.

‘호오... 이건 상당히 좋은 풍경이네.’

수증기 없이 탁 트인 시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방금 전 나의 모습이 딱 저랬을까.

일본인 특유의 고양이상 얼굴과 행동거지는 귀엽기 그지없었지만 몸매는 정반대였다. 포니테일로 묶어 허리까지 내려오는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신체의 곡선은 매혹적이다.

특히 대단한 건 조금 전에 바라봤을 때도 어렴풋이 느꼈지만, 동양인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사이즈의 폭유. 심지어 젖꼭지는 선명한 분홍색. 이런 점이 뭔가 언밸런스하기도 하지만, 아무렴 좋다.

“저기.... 혹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계신가요? 여기는 대체...”

“글쎄요... 저도 이 장소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게…. 있네요.”

나는 방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침대에 앉아, 그 옆에 놓여있던 문구를 들어서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역시 이번에도 그 내용은 틀림없다.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이다.

아차차. 그녀에게는 낯선 장소일 텐데. 내가 너무 능숙하게 행동해 버렸나? 이러면 내가 그녀를 이런 수상한 장소에 끌고 온 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을 텐데...

“뭐야., 그런 거였나요. 마침 잘 됐네요.”

“예?”

나는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서 걱정이 몰려왔지만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이라는게 일본 19금 만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라서 그런가? 나를 경계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마침 잘 됐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사실은... 당신이 혼탕에 혼자서 있는 모습을 보고... 제 방으로 데려가고 싶었거든요...”

아하. 그녀가 혼자 있는 나에게 대뜸 나타나서 말을 걸어왔던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아무리 평소에 눈치가 없다는 말을 종종 듣는 나라고 할지라도, 혼자 온 남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고 싶다는 말의 의미는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화를 좀 더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척을 이어나갔다.

“저를... 방으로 데려가서... 어떻게 하실 생각... 이었는데요...?”

“그게... 저도 혼자 여행을 온 거였거든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좋은 곳에서 기분전환을 하면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셨군요.”

“저…. 그... 혹시 혼자가 아니셨나요...? 일행이 있으셨던 거라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도 비슷한 처지입니다.”

“비슷한 처지라뇨? 설마 당신도...?”

“얼마 전 저의 그녀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이곳으로 여행을 왔습니다.”

뭐 떠나간 그녀는 실제 사람이 아니긴 했지만, 어쨌든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고. 그녀와의 만남과 이별이 이번 일본 여행을 계획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럼... 우리 서로를 위로해주는 건 어때요?”

“그럴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차 버렸다니, 상상하기 힘드네요.”

“당신도... 이렇게 훌륭한 물건을 지니고 계시는데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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