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34화 (34/57)

〈 34화 〉 공무원과 하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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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결제하실 분량의 문서들입니다”

시종은 또 산더미 같은 양의 서류를 가져다 놓는다. 말투는 평소와 같이 나긋나긋했지만, 일거리가 늘어났다는 이야기는 내 가슴에는 비수가 되어 박히는 듯 고통스럽다. 이 많은 서류를 대체 다 언제 처리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막막하다.

평소라고 해서 안 바쁜 건 아니지만, 이 기간에는 특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래도 서류를 대충 볼 수는 없다.

“후우... 어디보자... 멸종 위기종... 하피... 보존비용...? 이건 뭐지?”

어느 부서나 자신들이 사용하는 예산은 반드시 꼭 필요한 예산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예산을 깎으려 들면 절대 안 된다면서 죽기 살기로 반대한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이고, 나는 제국의 재정감독관으로서 언제나 돈이 바람직하게 쓰이는지 감시할 의무가 있다. 쓸데없는 곳에 쓰여질 예산을 아껴서 더 나은 곳에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이 언제부터 그렇게 이 종족들을 신경 써 줬다고... 이건... 기각.’

붉은색 잉크를 묻힌 붓으로 예산 요구서의 제목 위에 덧칠함으로써, 기각되었다는 표시를 한다. 그 순간, 서류 위로 잉크가 아닌 또 다른 붉은색 액체가 톡­ 하면서 떨어진다.

윽... 코피가...

“너무 무리 하신 것 아니에요? 조금 쉬었다 하시는 게...”

“난 괜찮아... 그래도 기한 안에 이렇게 처리해야 할 서류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 오래 쉴 수가 없어. 잠시 숨만 돌리고 올게.”

...

옥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느낌이다. 다행히 몸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진 것은 아니었는지, 코피도 금방 멎었다.

날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화창하고, 길거리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다. 이렇게 좋은 날에, 서류 더미 사이에 갇혀서 빼곡한 글자만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후우...”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 맞은편에는 무언가 이상한 것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꽤 커다래 보이는데... 열기구는 아니고... 새...? 하지만 새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이상해 보인다.

‘설마…. 저게... 히피인가...?’

이름은 들어 봤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사람의 얼굴과 몸에, 새의 날개와 깃털을 가진 아인족. 그러고 보니까 멸종 위기라고 했었나....

하피가 멸종위기라고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피를 보존하는데 그만한 양의 예산을 쓸 가치가 있는 것을 내게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제국민들의 세금을 그런 곳에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다.

만약 하피족을 제국 군대의 정찰병으로 쓸 수 있다면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막대한 양의 예산을 써서. 멸종 위기종을 보존하고, 어떻게든 특별한 훈련과정과 전용 장비까지 제작해서 안겨준다면. 훌륭한 정찰병으로 양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만든 하피 정찰병이 열기구 정찰로는 얻을 수 없는 엄청난 가치의 정보를 가져다줄 수 있을 거로 생각되진 않는다.

가뜩이나 제국 군대에는 뿌리 깊게 종족차별 의식까지 남아있어 적응하기도 쉽지 않겠지.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제국군에 이 종족 출신은 콜로세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서 채용된 검투사 출신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이렇게 한 종족을 멸종시키느냐 보존하느냐 하는 것을 그저 나라에 이득이 되는가 안되는가 하는 것 만으로 저울질 하는 모습을 누군가 바라본다면. 나를 잔인하다고 매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쩔수 없다. 나는 원래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

‘어어...? 저거 왜... 점점... 가까이 오는 것 같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서 까만 점처럼 보이던 하피는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지근거리까지 날아와 있었다. 덕분에 자세히 하피의 몸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황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얼굴과 아담한 크기의 가슴. 그리고 배까지는 평범한 인간 여성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어깨와 팔을 따라서 펼쳐져 있는 날개는 깃털이 결을 따라 촘촘히 박혀 있었고, 다리의 발톱은 굉장히 날카로워 보인다.

“읏...! 자... 잠깐...! 어째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적지 방향에 우연히 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샌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빠른 속도로 비행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설마...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건가? 도... 도망쳐야 하는데....’

그러나 공포심에 압도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내 그녀의 발톱은 옥상 난간에 콱하는 소리를 내며 맞물리며 올라탄다.

설마... 그녀가 내가 하피 보존 예산을 기각 했다는 것을 알고서 보복을 하려는 건가? 하피가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어이... 거기 당신...!

“모... 목숨만은... 사... 살려...”

숨이 턱 막히고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살려달라고 하는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죽음을 직감한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당신...., 나랑 교미해주지 않을래?”

“살려..., 응...? 잠깐, 뭐라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그녀는 나의 물음에 커다란 덩치 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교미를 해서... 알을 낳고... 번식해야 하는데..., 마땅한 상대를 구하지 못해서...,”

“교미... 번식 ...? 같은 하피가 아니라 나랑...? 아.... 그래서...”

나는 털썩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하긴, 하피가 인간을 잡아먹을 리도 없고.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 리도 없지. 만약 그랬더라면... 이렇게 평범하게 멸종위기종까지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평범한 인간 남자인데요...”

“그게... 너무 오랫동안 교미를 못 했더니... 자궁이 욱씬욱씬거려서...”

“미안하지만... 저는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바빠서 당신과 어울려줄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아가 보세요.”

실망스러움이 그녀의 얼굴 표정에서 훤히 드러난다. 그녀가 싫어서 거절한 건 아니다. 오히려 얼굴은 꽤나 귀여운 편이고, 몸매도 탄탄하다. 인간의 신체와 비슷한 부분에서 나오는 여성스러움은 웬만한 여자들 이상이다.

그러나 나는 진짜로 바빠서 그녀를 상대해줄 시간이 없다. 최근 제국 곳곳에는 아이족 창관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나는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아인족을 좋아하는 남자가 그만큼 많다는 증거이니만큼, 그녀는 금방 다른 상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인간이랑 하피랑 섹스를 하면... 인간의 정액으로 암컷 하피는 임신이 가능한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뭐 그다지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의문일 뿐. 나중에 만약 생물학자와 만나게 될 일이 있다면 그때 물어보면 되겠지.

‘그럼 다시... 지긋지긋한 일을 하러 가볼까...’

그녀를 뒤로하고, 계단으로 내려가던 그 순간. 시야가 암전된다. 바로 앞에 한껏 긴장했던 탓일까. 갑작스럽게 어지럼증이 느껴진다.

곧이어 기울어지는 게 느껴진다.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가 없다. 낡은 계단에는 손잡이로 삼을 만한 것도 없다.

아아. 좀 더 쉬어가면서 일 해야 했는데. 히피에게 잡아 먹히는 것 만큼은 아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계단에서 굴러떨어져서 죽는 건가.

...

“핫...! 허억……. 허억... 뭐지...? 나는... 계단에서.. 분명...”

의식을 되찾고 눈을 뜬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새하얀 벽으로 막혀있는 이상한 공간.

“나는... 죽은…. 건가...? 그럼... 여긴.... 사후세계...?”

“앗...! 드디어 눈을 떴구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아까 전에는 그렇게나 무서워했던 상대였는데. 지금은 정말 반갑기 그지없다.

“저를... 살려 주신 겁니까...?”

“아니... 나도 네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날개를 펴고 달려가던 그때,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이곳에 와 있었어.”

“이상한 일이라뇨? 그럼 당신이 저를 구해준 게 아니란 말입니까? 그럼... 대체 여긴 어디죠...?”

“나도 모르겠어... 당신은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방금 전까지 기절해 있다가 눈을 뜬 거야. 그리고 이런 게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나를 구해준 건 아닌 듯 했다. 그럼 대체 이 이상한 장소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장소의 유일한 단서로 보이는, 그녀가 건네준 문구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어... 그러니까...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이게 대체 무슨 뜻이야? 섹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섹스는.... 그게... 인간들이... 교미하는 것을 부르는 다른 명칭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그럼 마침 잘 됐네! 빨리 교미하자 교미!”

“하아... 이게 무슨... 어쩔 수 없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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