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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여기사와 오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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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주량 이상으로 마신 다음 날 아침처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기억은 흐릿했다.
그러나 분명 어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니, 마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곳은 전쟁터니까.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장소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주변은 온통, 새하얀 벽으로 둘러쌓인 커다란 방. 그리고 그 방 한 가운데는 오직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건...
얼굴에서 풍겨오는 매혹적인 분위기. 은은한 금빛 생머리, 연분홍색 입술, 가느다란 턱선.
풍만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마치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폭력적인 가슴과 골반의 굴곡.
여기사 레아나. 왜 그녀가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일단 침착하게, 어제의 기억을 곱씹어 보기로 했다.
우리 오크 병사들은 인간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서 우리 쪽 진영으로 도망쳐 올 수 있었다.
패배하고 도망친 자의 변명이긴 하다만. 그날 상대한 인간 군대는 평소의 허약해 빠졌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달라진 것은 단 한 명, 오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그녀ㅡ 여기사 레아나가 지휘관으로 왔다는 것 뿐이다.
그녀의 명성은 평소에 인간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나도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녀가 이곳에 온다는 이야기들 들었어도, 그까짓 인간 암컷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어. 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건 오만이었다. 일사분란한 지휘, 스스로 앞장서서 돌격하던 용기, 그에 떨어지지 않는 스스로의 무력까지. 그 모습을 본 인간 병사들은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고, 우리 오크군은 속수무책으로 패퇴했다.
먼저 쳐들어 간건 우리쪽 이니까 그녀를 책망할수는 없다.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우리쪽이 잘못 한 거겠지. 그러나 그녀가 동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던 모습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전장에서 겁에 질렸다는 건 크나큰 수치다. 명예와 긍지를 숭상하는 오크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친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적이고 종족도 다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려움과 함께 경외심이 생겨나기에 충분한 상대였다.
...
어찌되었건. 나는 무사히 도망쳐 왔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오크냐!”
라고 일갈하던 대장의 호통도 기억난다.
“겁쟁이들은 전장에 나갈 자격이 없다! 허드렛일이나 해라!”
라면서, 다른 오크들은 하기 싫어하는 작업을 부여받은 것도 똑똑히 기억난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장소로 끌려온 기억은 없다.
그래서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분명히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임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설마 인간 놈들의 감옥인 걸까.
내가 무사히 도망쳐 왔다는 게 사실은 기절한 동안 꿈을 꾸었던 것 일수도 있고. 무사히 도망쳐 온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자고있는 동안 우리 진영은 야습을 당해 나도모르게 포로로 잡혀 온 것일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니 설령 이상하게 생긴 감옥이 맞다고 해도 의문점은 남아있다. 이렇게 손발을 묶지도 않고. 깨끗하고 커다란 방에, 푹신한 침대를 놔 두다니.
인간 측에서 포로를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확실히 일개 병사 포로 대우라기엔 이상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점은. 나와 함께 그 침대에서, 레아나가 잠들어 있다는 점이겠지.
그러나 역시. 이곳이 감옥이 아니라면. 내가 그녀와 함께 있을 이유가 뭔지, 도저히 추론할 수가 없다.
“꿀꺽...”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많은 오크들이 인간이나 엘프족 마을을 약탈하고 그들의 암컷을 범한다. 암컷 오크는 같은 오크들이 보기에도 못생겨서, 외모가 아름다운 종족으로 성욕을 해소하는걸 즐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인간 암컷을 범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약탈을 나가는 동료들의 지원을 했을 뿐, 직접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종 인간 암컷들을 산 채로 잡아 오기도 했지만, 그러면 얼마 안 있어 인간 놈들이 분노에 가득 차서 구하러 오기 때문에 습격에 참여도 하지 않은 내게까지 순번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것도 결국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그저 겁쟁이라서, 인간 암컷을 범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임신 시킬 수도 없는 이 종족을 그저 성욕처리 용으로만 사용하는 건 야만적이다. 라고 오크답지 않은 정신승리를 해 봤자 부질없다.
나도 결국은 성욕에 지배당하는 평범한 오크. 인간 암컷이 꼴리지 않을리 없다.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도, 머리속에서는 온갖 야한 망상이 멈추지 않고, 자지는 폭발할 듯이 팽창해 있다.
그렇다. 어쩌면 처음으로 인간 암컷을 마음대로 범할 수 있는 찬스.
단순히 아름다운 암컷이 아닌. 오크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자 인간들에게는 찬사의 대상인 레아나를 범할 수도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다. 그리고 무방비하다. 동료들을 무참히 학살하던 거대한 대검도,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가리고 몸을 지켜주던 단단한 강철갑옷도 없다.
결국에는 일개 인간 암컷. 오크와는 타고난 체급과 근력의 차이가 있다. 맨몸대 맨몸이라면 아무리 여기사 레아나 라고 해도. 내가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수 있을 것이다.
...
후... 침착하자.
오크들이 야만적 이라는 건 편견이다. 나는 지성인. 아무리 옆에 아름다운 암컷이 무방비하게 있다고 해도. 본능에 못 이겨 다짜고짜 덮치거나 하지 않는다.
일단 그녀보다 지금 이 장소가 무엇인지, 나갈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알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지성인이다... 나는 지성인이다... 나는 지성인이다...
그녀의 몸을 바라보고 있으니 야한 생각만 끊임없이 떠올라 침대를 등지고 돌아섰다. 그 순간ㅡ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나 반응할 찰나도 없이,
쿵!
나는 강제로 바닥에 무릎이 꿇려지고 뒷덜미를 붙잡혔다.
쾅!
“허튼수작 마라.”
그 상태로 머리를 세게 쳐 박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조차 안 되는 순간이었다.
“크헉!”
“거짓없이 말해라. 더러운 종족아, 이곳은 대체 어디냐.”
“자...자ㅁ..끄..므한...”
당연히 숨도 제대로 쉬기에 어려운 상태로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아무렇게나 팔다리를 휘둘렀다.
“쓸대없는 저항을...”
퍽!
...
“흠... 이곳은 대체...”
나는 다시금 겨우 눈을 떳다. 잠깐동안 기절해 있었던 것 같다. 무기도 갑옷도 없는 상태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내가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체격차이를 상회하는 압도적인 실력차이가 있었다.
기습 한 번으로 무력화되었고, 발버둥 치다 한대 더 맞고 기절해 버리다니. 정말 꼴사납다.
“깨어났나? 무언가 묶어둘 것이 없어서 그대로 두긴 하겠지만, 괜히 덤벼봐야 상대도 안된다는 걸 깨달았겠지.”
내 까짓것은 위협조차 안된다며 가소롭게 여기는 말에 나는 다시금 전장에서 느꼇던 공포심이 되살아 났다. 겁먹은 목소리로 나지막히 말했다.
“네... 살려만 주십시오.”
사방의 새하얀 벽에는 온통 금이 가 있었다. 맨 손으로 주먹질을 해서 벽에 금이 갈 정도로 때려 부쉈다는게 믿겨지지 않아 경악했다. 그러나, 그렇게 까지 했음에도 그녀또한 이 장소의 출구는 찾을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 여긴 어디지? 무슨 술수를 써서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왔지? 혹시 흑마술이냐?”
아아.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내가 등 지고 있는 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ㅡ
쾅!
“대가리가 깨지고 싶지 않다면, 사실대로 말 하는 게 좋을 거야.”
“히이익!”
그러나 나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생명에 위협을 느껴 온몸을 벌벌 떨면서, 진짜라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겨우 내 진심이 전해졌던 것일까. 그녀는 나를 위협하는 걸 멈추고,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뒤돌아서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모습이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나를 전혀 경계하지 않고 있는 그녀를 기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기습해 봤자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ㅡ 천장에서 의문의 팻말이 날아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이게뭐지? 흐음...하아아아?”
그녀는 팻말을 보고 얼굴이 새빨게 지더니 그것을 들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대체 왜 또 저렇게 화가 난 걸까.
"이 개자식이!"
“커헉!”
그리고는 나에게 힘껏 던졌다.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고 멀쩡했다. 나는 고통을 참아가며 일단 팻말에 써 있는 글자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