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설들로 들어갈 수 있다 (1화) (310) (310/310)

〈 310화 〉 히어로 앤 빌런

* * *

서울 중심부.

그것도 가장 사람이 많을 피크 타임에 벌어질 뻔한 참사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와 장혁의 일은 예상보다 큰 화제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빌런의 위협에 대해 다른 나라보다 취약한 한국은 새로운 유망주의 탄생을 반겨했다.

녀석과 나 모두, 각각의 방향으로 외모가 눈에 띄었다는 것도 한몫했고.

길거리만 나가도 나를 알아보는 눈치의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는데,

히어로 협회인 CSTO도 우리를 좌시할 수는 없었다.

“특례 입학이라… 일이 술술 풀리네.”

“…정말로 우리만 편하게 입학을 해도 되는 걸까? 영웅 학교 설립 역사상 처음 아니야?…”

“걱정도 많아라. 그건 영웅 학교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거고. 편하게 생각해. 당장 일반 대학들은 특례 입학 사례가 수두룩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자격이 없는 일반인이 멋대로 나선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우리를 법률대로 처벌하겠다며 총대를 메고 나서는 인물은 없었다.

수많은 생명을 구한 시민 영웅에게 불이익을 주는 건, 악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선행이라 보기엔 힘들었으니까.

이런 특수한 사회적 배경 덕에 나와 장혁은 이득만을 취할 수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명예훈장이고,

둘째가 꽤 실리적인 영웅 학교에 특례 입학 자격이었다.

나와 장혁은 유일하게 입학시험을 치루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다.

원작 소설 속 장혁은 남들과 같이 입학시험을 치루게 된다.

그곳에서 안면을 튼 인물도 생기고, 그 사건을 시발점으로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던 그에게 동료가 여럿 생긴다.

그렇기에 내게는 더 없는 호재였다.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혁에게 정말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은 내가 유일해야 하니까.

‘원래는 입학시험에서 다른 놈들이랑 친해지지 않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는데… 할 일이 줄었어.’

삼도천 소속으로 추정되는 괴인을 발견하는 등 변수도 좀 있었지만,

이 정도면 원작의 내용을 완전히 뒤튼 것 치곤 출발이 좋다.

충분히 합격선 안쪽이다.

오늘 장혁과 함께 찍은 훈장을 받는 사진은 내일쯤 기사에 올라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명성을 얻게 되리라.

자신들과 다른 특례 입학생, 더러워 보이는 인상, 고유 능력 각성자에, 명성까지 현역 히어로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지녔다면…

보통의 신입생들이 쉽사리 다가서기 힘들 스펙인 건 분명했다.

내가 딱히 개입하지 않더라도 장혁은 친구를 만들기 힘들 것이다.

“들어가라.”

“어…. 너도 조심히 가고.”

“쫄아 있지 말고 당당히 행동해. 능력도 엄청 좋은 놈이 왜 그래?”

“하지만… 난 너한테 능력을 걸어준 것 말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훈장까지 받는 건 좀….”

“네 사기적인 강화 능력 아니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는데 뭘. 어깨 펴고 당당히 다녀.”

이왕이면 당당해지는 걸 넘어서 오만해지면 더 좋고.

뒷말은 속으로만 삼킨 채 발걸음을 돌렸다.

막힘 없이 계획이 진행되어서 그런 걸까?

집으로 향하는 발은 가벼웠다.

그렇기에 집의 문을 열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분명 홀로 자취하고 있어야 할 ‘내’ 집에 누군가가 미리 들어와 있던 것을.

­ 끼익. 쿵.

“…….”

얕게 긴장했다.

‘나’에게 주인공 몰래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다는 그런 가벼운 헤프닝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설마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나에게 보복하기 위해 삼도천에서 온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아니란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벽에 가려진 거실 너머.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티 나게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뭐해요? 왔으면 안 들어오고.”

성숙한 여성의 목소리.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호의와는 거리가 먼 목소리였으나, 그건 적대라기보다는 불만이 쌓였다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살의는 전혀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자친구인가? …뭐가 됐든 골치 아픈 일이 된 건 뻔하네.’

빙의 대상의 과거 기억을 알지 못한다는 건 이런 변수를 불러온다.

그렇기에 원작을 꼼꼼히 읽으며 장혁의 친구인 이 신체의 주인이 빙의 대상으로 적합한지 살폈다.

분명 빌런의 테러에 부모님을 잃고, 장혁과 가까이 하느라 마찬가지로 친구가 없던 인물이라고 했는데…

저 거실의 여성, 아마도 몸 주인의 몇 없는 인연 중 하나인 것 같다.

혹시 모르니 몸의 긴장을 끌어 올린 채로 거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넓지 않은 집이라 금방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연녹색의 장발.

시선을 내리니 짙은 갈색의 동공이 나와 마주쳤다.

미간을 모은 채 얼굴을 찌푸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미인이었으리라.

“매일 21시 연락. 어제 전 연락을 받은 적이 없으니 딱 18시간 초과했네요?”

한 번의 곁눈질로 좌측 벽에 달린 시계를 정확히 본 여성이 그리 말했다.

그 행동만으로 이 여자가 내 집의 구조에 대해 잘 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여자친구라고?

“미안해. 뉴스를 봤으면 알았겠지만… 어제오늘 좀 바빴거든.”

“…….”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지만, 무엇이 신경을 거스른 건지 여성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내 그녀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나는 몰래 그녀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이대로 이름조차 모르고 있으면 실수할 수도 있다.

­ 띠링!

=

[이름] 한나영

[직업] CSTO 정보 부대 대장

[힘] 19 [민첩] 21

[체력] 20 [지능] 63

[기교] 35 [매력] 31

[정신력(마나)] 141

[특성] ­

=

정보 부대 대장?

한나영이라는 이름보다 그녀의 직업이 내 시선을 더 끌었다.

이쯤 오면 그녀가 날 찾은 이유에 대해 짐작이 갈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나와 그녀는 연인 사이가 아닌 것 같다.

그보다 훨씬 심각하고, 복잡하며…

내가 이 소설에 난입한 뒤 마주하는 제일 큰 변수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적어도 이별을 고한다고 다신 안 볼 사이는 아닌 것은 확실했다.

“이제는 반말이라… 뭐, 됐어요. 제가 그런 거 따지는 사람도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반말을 한 것이 그녀의 불만을 키웠던 모양이다.

더 실수하기 전에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래요. 최근 당신에게 많은 일이 있기는 했겠죠. 그런 만큼 보고할 게 산더미처럼 쌓였을 텐데, 어제 온종일 연락을 기다린 저는 뭐가 되나요?”

“죄송…합니다.”

“왜요? 그냥 방금처럼 편하게 말 놓으시지.”

딱 상사에게 갈굼 받는 부하직원이 된 느낌이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라면…

아무래도 그런 느낌과 차이 없는 상황인 것 같다.

‘하… 어쩐지 이 몸의 주인에 빙의할 때 ‘영향력’ 부분에 대한 점수가 특이할 정도로 높더라니….’

나는 주인공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친구이기에 그런 높은 점수를 요구하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뒷사정이 조금 더 있었나 보다.

원작 속 서정우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의 친구는,

주인공에겐 비밀로 히어로 기관의 정보부 소속 요원이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당신, 대체 어떻게 각성한 건가요? 우선 그것부터 말해 봐요.”

“그건…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각성했습니다. 보통 각성자가 그러하듯이요.”

“…아직도 농담할 정신이 있어요? 박찬영 당신은 각성이 불가능한 신체잖아요.”

각성이 불가능한 신체.

그 단어는 내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보통 각성은 무작위 대상, 무작위 장소, 무작위 시간에 이루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여태 만 단위를 넘어서는 학자들이 달려들어도 그 연관성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저 CSTO 소속 정보 요원은 나를 더러 ‘각성할 수 없다’라 단언해 말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설마… CSTO는 각성의 비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단언하듯 나보고 각성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지금 현대에 미각성자로 남아 있는 이들은, 단순히 각성 시기가 엄청 늦는 것일 뿐이라는 설이 당연하다는 듯 퍼져있으니까.

그냥 직업만 얻고 말 거쳐 가는 세계라 생각하고 가볍게 들어 왔는데…

아무래도 이 세계의 속사정에 깊이 얽힐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다.

과연 이 우연을 좋아해야 할까?

“설마 스타 피스를 훔친 건 아니죠?”

“스타 피스?”

“…은어잖아요. 저희끼리는 그리 부르는 거고, 정식 명칭은 이능 변이 촉진제. 다 아는 사람이 왜 이럴까?”

각성을 앞당기는 약품이라 추정되는 무언가도 이미 개발되었나보다.

원작에서는 떡밥조차 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어쩐지 오늘 운수가 좋더라니…

상상도 못 한 거대한 변수에, 한숨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런데 당신은 스타 피스를 써도 각성을 못 할 텐데… 대체 어떻게?”

“잘은 모르겠습니다. 정말 평범히 각성했는걸요.”

“…네?”

“아직 이능에 대해 밝혀진 부분보다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지 않습니까? 이것도 그중 하나겠죠.”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아무리 CSTO가 많은 일을 밝혀냈다고 한들 초능력이 발생한 지는 고작 20년도 지나지 않았다.

시간의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 뻔했다.

“그건… 그렇죠. 당신은 특히나 더. 그만큼 희귀한 케이스이기도 했고….”

“혹시 저 잡아서 가둬놓고 실험하나요? 원래 각성이 안 되는 몸인데 해버렸으니까.”

가볍게 장난식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가둬놓고 인체 실험을 하려 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한 번 반응을 떠보고자 물어본 질문이다.

혹시 그런 생각을 속으로 가졌다면 겉으로 반응을 보일 테니까.

만약 저들이 내게 위협을 가한다면 도망칠 생각이다.

그녀도 어쩔 수 없으리라.

다행히도 나는 이미 실시간으로 얼굴이 많이 팔리는 도중이다.

최대한 공개적인 곳에서 행동한다면, 내가 대응 준비를 끝낼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왜 망설이나요? 설마 정말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겁니까?”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미안해요. 과거 일은…. 으…. CSTO를 대표해서 사과할게요. 원하실 때마다 몇 번이고.”

또 희한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눈이 죄책감에 젖은 것에 모자라, 내 눈치까지 보고 있다.

내뱉지 못한 한숨이 자꾸만 겹친다.

아무래도…

‘나’는 과거에 인체 실험 비스름한 것을 당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비꼬지는 말아주세요….”

그녀가 땅을 내려보았다.

내가 일부러 인체 실험을 들먹인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 몸의 과거에 대해 알아야 할 비밀이 많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변명을 쓰기에는 정보 부대 대장이라는 직함을 지녔지 않던가?

쉽사리 정보를 풀지 않고, 정말로 ‘내’가 ‘나’인지 끊임없이 의심할 것이 뻔했다.

초능력자들이 대부분인 세계인 만큼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당장 삼도천에 시체를 조종하는 능력자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보라.

이 요원의 시선에서 보면, 내가 녀석에게 당해 조종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틀림없이 의심할 것이다.

그냥…

이대로 과거의 나를 연기하며, 유도 신문 형식으로 의문을 해소하는 것이 더 빠르리라.

지금의 그녀는 지금의 나를 동료라고 여길 테니까.

나는 그리 판단했다.

“적어도 오늘부터라도 보고는 빼놓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연락책 변경이 가능할까요?”

그러니 연락책 변경부터.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난 현재 연락 방책을 전혀 모른다.

하지만 모른다고 순순히 말할 수도 없으니 기존의 방법에서 변경하도록 유도해 내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내가 연락 방법을 알 수 있는 길이었다.

“연락책을 변경하자고요? 어째서?”

“내일 되면 뉴스에 뜨겠지만… 저는 영웅 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서요. 앞으로 기숙사 생활을 할 텐데, 지금의 연락 방책보다 더 자연스럽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싶습니다.”

“여,영웅 학교. 당신 정말로 거기 들어가게요? …아! 설마 장혁과 같이 들어간다든지?”

“어… 네.”

“명령받은 임무, 그가 히어로의 길을 결심하도록 유도해내는 것에 성공했군요! 좋아요! 그런 이유에서라면야 얼마든지 새로운 연락책을 준비해 드리죠!”

한나영이 얼굴을 밝게 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혁을 히어로가 되게끔 유도해내는 것에 성공?…

그럼 정보부 소속 요원이던 내 임무가 그것이었다는 건가?

‘…일반인 소꿉친구가 흑막이었다니….’

대체 어떤 이유로 장혁을 히어로로 만들어야 하고, 그것이 장혁을 위해서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으나…

당장 상황에 문제는 없다는 것에 만족했다.

어차피 자세한 사정은 차차 알게 될 테니까.

“이렇게 보니 당신의 갑작스러운 각성은 호재였군요? 같은 학교에 입학해 장혁에게 계속 간섭이 가능해질 테니.”

“그렇죠.”

“후후. 좋아요. 바쁠 만한 사정이 있었단 것, 인정할게요. 그럼 그의 일은 계속 맡길게요? 당신의 친구가… 올바른 히어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유도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내게 새로운 임무를 내렸다.

원래 나의 목표와는 정 반대에 위치하는 임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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