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화 〉 지구
* * *
부우웅.
가속 패달을 밟으니 묵직한 배기음과 함께 몸이 작게 뒤로 쏠렸다.
뻥 뚫린 도로 위를 달리고 있으니 마음 또한 시원해진다.
운전대를 처음 잡은 지 대략 한 달.
무척 빠른 속도기는 하지만, 이미 고다연을 데려다주며 조작을 온몸에 익혔다.
큰 사고가 나는 건 고속도로 위라고 하다 보니 정도 이상으로 마음을 놓는 것은 안 되겠지만.
“으하핫! 속도 좀 봐. 장난 아닌데?”
“빨라요… 너무 빨라요오!!”
뒷좌석에서 통일되지 않은 감정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래 봬도 제한 속도를 지키며 안전 운전 중인데…
그녀들에게는 이조차 빠르게 느껴졌나 보다.
한 손으로 룸미러의 각도를 조종하자, 신나게 창밖을 구경하는 자넷과 눈이 빙글빙글 도는 멜이 거울 속에 보였다.
그리고 그런 멜의 무릎 위에 앉은 데이지까지도.
“미안해. 뒷좌석이 좀 좁지?”
“개자식… 나는 두고 너희끼리 가라니까.”
“에이. 이왕이면 같이 가야지. 막상 도착하면 재밌을걸?”
뒷좌석에 있는 시트는 2개뿐.
허나 조수석에는 제비뽑기에서 이긴 크리스가 앉아있으니, 다 같이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우리들 중 그나마 몸집이 작은 멜이 데이지를 안고 탈 수밖에.
“씨… 내가 왜 이런 꼴로… 안 그래도 할 거 많은데….”
“풋. 입이 튀어나왔네. 너 바쁠 만한 일이 있나?”
“야! 니가 나한테 부탁했잖아! 그 갑옷인지 뭔지 만들어달라고!”
“아. 그거.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좀 쉬면서.”
버럭 목소리를 높이며 내게 상체를 내미는 데이지를 말렸다.
4인승 차량에 데이지를 포함해서 5명이 탄 것이니 승차 정원 초과가 아니겠는가?
혹시 감시 카메라에 걸리면 벌금을 물게 될 수도 있다.
차에 탑승한 직후부터 투덜거림을 한시도 멈추지 않는 데이지.
멜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인형을 쓰다듬는 것 같은 손길이다.
“헤헤… 전 괜찮아요. 데이지는 가볍거든요.”
“…키가 어린애만하니까.”
“에이.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저는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귀여운데요! 오히려 이러고 있는 게 꽤 좋을 정도로.”
“나 너보다 언니인데….”
“그건 알지만… 헤헤. 머리 계속 만져도 괜찮죠?”
“…에휴. 좋을 대로 하던가.”
데이지는 누그러진 말투로 멜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들을 본 나는 속으로 놀랐다.
이렇게 쉽사리 물러선다고?
저 데이지가?
“의외네. 데이지, 이제 괜찮아?”
“아. 무릎 위에 앉은 거? 뭐… 멜이 좋다고 한다면야 나도 더는 미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뭐야. 여태 투덜거린 게 미안해서 그런 거였어?”
데이지가 입을 꾹 닫았다.
멜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속도가 약간 올라갔다.
사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그런데 내가 괜찮냐 물은 건 다른 쪽이었는데. 멜이 너보고 동생 같다고 했잖아? 근데 별로 화 안 난 것처럼 보여서.”
“나? 화를 갑자기 왜 내?”
“아니… 너 애 취급받는 거 싫어하잖아?”
“뭐? 아니? 그닥?”
데이지는 어리둥절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어떻게 내가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는 얼굴이다.
조금 억울했다.
데이지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길 자신을 애 취급하지 말라지 않던가?
그녀의 키에 닿지 않는 곳에 놓인 책을 내가 내려 줄 때도, 감사해하면서 동시에 입술이 손톱 정도는 튀어나오고는 했다.
항상 어른답게 무언가에 대한 책임을 지려 들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데이지는 유년기에서 멈춰버린 자신의 신체를 달가워하지 않아 보였다.
내가 괜한 오해를 한 것이 아니다.
“정말 싫지 않았던 거야?”
“바보. 애초에 난 너희들이랑 처음 만났을 때 순진한 어린애를 연기하고 있었잖아? 정말 애 취급이 싫었으면 그조차 안 했겠지.”
“생각해 보니… 근데 너 나한테 어린애 취급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그건….”
데이지도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짚이는 부분이 꽤 있지 않던가?
멜이 당장 데이지에게 하고 있는 머리 쓰다듬기.
옛날 그녀가 내게 안타까운 과거를 말해준 이후, 나 역시 종종 했던 스킨십이다.
데이지 역시 타인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스킨십을 좋아하는 듯 보였기에,
자주자주 해줬던 기억이 있다.
허나 이제와서는 그녀의 머리에 손대지 못하고 있다.
저번에 어린애 취급은 그만두라며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한때는 더 해달라 차마 말도 못 하고 눈으로만 조르던 주제에….
“나한테만 인색하게 굴기 있기야?”
“너는… 조금 달라. 너한테 애 취급을 당하면….”
“당하면?”
“……건방지다?”
“와. 너무한데.”
“뭐어, 아무튼 너는 어린애 취급 금지야. 킥킥.”
데이지는 그리 말을 일축했다.
눈치로 보아하니 멜에게만 특별히 애 취급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나만 금지 대상으로 지정했나 보다.
여리디여린 마음을 보유한 사람이라면 버티지 못할 무게의 진실이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나는 잠시 위태로웠지만…
데이지가 이러는 이유 중 짐작 가는 것이 있기에 가만 입을 다물었다.
특정 상대에게 어린애 취급 당하기 싫은 것.
그녀가 둘러댄 것처럼 ‘만만해서’도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증거도 논리도 부족하기 그지없는 비약일 뿐이다.
그러니 입을 가만히 다문 것이고.
“…다들 저 빼고 재밌어 보이네요! 너무해!!”
그때.
내 옆쪽 공간에서 얼굴이 솟아났다.
특징이라면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조금 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공간을 뚫고 등장한 사람… 아니 천사는 안젤리였다.
언젠가 이 육체의 부친인 용사를 실물로 보았을 때처럼 공간을 가른 것이리라.
다만, 이번에는 천계 기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으으. 찬영! 나도 가는 중 잡담에 끼고 싶어! 왜 나만…”
“그건 미안해… 이 차는 데이지까지 포함해도 5명이 한계라서.”
“그런데 왜 차에 못 타는 건 나야! 이런 건 공평하게 제비뽑기로 정해한다 생각해.”
“아니…. 네가 우리들 중 유일하게 날 수 있잖아.”
지금 안젤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곁에서 같은 속도로 나는 중이었다.
혹시 모를 고차원적인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그녀는 내 곁을 일정 이상 떨어질 수 없다.
지구에서 여행을 즐기는 한, 안젤리가 여행에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서 말없이 나는 건 엄청 지루하지만, 참을 테니까 나중에 나 따로 챙겨주기로 약속해!”
“…너 요즘 따라 어리광이 많아진 것 같다?”
“큼큼… 들켰어?… 찬영의 취향이 어리광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서… 이미지 변경 중. 후훗.”
“내 취향이?”
“그야 그렇지. 크리스씨만 봐도 어리광이 엄청 많잖아?”
둘만 있을 때 어리광이 많아진다는 것을 들킨 크리스가 얼굴을 붉히고는 안젤리를 째려보았다.
크리스가 아직 천사의 존재를 모르던 과거 시점.
다른 동거인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실컷 어리광을 부려댔으니 쪽팔려 할 만했다.
안젤리의 시선은 신빙성이 없지 않았다.
정확히는 챙겨주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맞으리라.
허나 크리스만큼 어리광을 부리는 안젤리는 상상이 가지 않기는 했다.
그녀는 그 넓은 가슴만큼이나 포옹하는 것이 주된 이미지였으니까.
“…나 없는 차 안은 어색함이 가득했기를 바랬는데.”
“너 정말 천사야?”
그녀의 툴툴거림을 들은 크리스가 이상한 표정을 했다.
방금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안젤리가 그제야 크리스를 돌아보았다.
“어… 당연히 농담이죠. 크리스씨 혹시 바보인가요?”
“너 방금 뭐라했…!”
메롱. 안젤리는 귀엽게 혀를 내밀고는 차원문을 닫고 도망쳤다.
한창 화를 내려던 크리스는 허공을 보고 언성을 높인 우스은 꼴이 돼버렸다.
그녀는 차원문을 열 수 없으니 일방적인 딜교였다.
“저,저,저 망할 비둘기가! 찬영!! 걔 지금 이 차 옆에 있다고 했지?? 이거 천장 좀 열어 줘!”
“…감시 카메라 나오기 전까지만이야.”
“어서!”
억대 오픈카의 첫 뚜껑을 열게 되는 계기가 치정 싸움 때문일 줄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천장을 열었다.
그리고, 이 차의 오픈 기능을 모르던 뒷좌석 여성들은 단체로 놀라버렸다.
“아하하핫! 야! 파계승! 이런 것도 됐어?!”
“으아아악! 차,찬영님!! 너무 빨라요! 무서워요오!!”
“메,멜? 잠깐! 으앗, 눈 가리지 마…! 최소한 머리핀은 건들면 안 된다?! 그,그거 엄청 소중….”
팔을 위로 뻗으며 바람을 만끽하는 자넷과, 당황해서 쓰다듬던 데이지의 머리를 꼭 끌어안은 멜.
그리고 양손으로 머리핀을 꼭 붙잡은 데이지까지.
옆자리는 한창 천사와 인간의 말다툼이 벌어지는 중이다.
소란스러웠지만, 그래서 더욱 여행하는 기분이 났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한층 더 유쾌해졌다.
다만…
안전띠를 풀고 달리는 차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크리스를 말릴 때는 진땀을 빼야 했다.
*
명색이 신혼여행 아닌가?
하물며 여행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숙소다.
돈 걱정은 하지 않고 최대한 좋은 펜션을 예약해 놓은 이유다.
그래도 직접 방을 보니 쓴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모든 객실에서 오션뷰가 감상 가능했고, 실내에 수영장까지 있으니 말 다 했다.
단순히 호텔의 파티룸 말고 프리미엄 풀빌라를 통째로 빌린 보람이 있다.
“으아아…. 피곤해요오….”
“나도 저 유해조수 때문에 기가 다 빨렸어….”
“…겍….”
쌩쌩한 것은 신나게 호텔 숙소를 이리저리 탐험 나선 자넷과, 여유롭게 날개를 팔락거리는 안젤리 뿐.
여기저기서 피로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데이지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없어서 반쯤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다들 오늘은 푹 쉴까? 애초에 따로 기한 없이, 만족할 때까지 있다 갈 생각이었고.”
“기한이 없다라, 엄청 호화로워! 그런데… 숙소 진짜 예쁘다. 보기만 해도 힐링 되네.”
“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너랑 내 신혼여행이니까.”
“…우린 같은 방 쓰는 거지?”
“당연하지. 신혼이잖아?”
크리스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기운이 좀 난 건지, 자넷처럼 넓디넓은 펜션을 구경 나서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멜은 그런 크리스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일단 장시간 이동에 넋이 나간 데이지부터 어떻게 해야겠다.
나는 벽에 기대 주저앉은 데이지를 근처 소파에 눕히기 위해 둘러업었다.
어찌 보면 어린애 취급이지만,
하얀 고래 용병단과 함께 이동할 때는 그녀를 업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제 와선 지적할 것도 못 될 수준의 익숙해진 일이었고, 이는 데이지가 얌전히 내 등에 몸을 맡긴 것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적당히 대꾸해주며 소파에 눕혔다.
담요를 들어 덮어줄까 물었지만, 고개를 젓는 것이 잠을 잘 건 아닌가 보다.
편히 쉬는 데이지를 뒤로한 채 인벤토리에서 여러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 포함 여섯 명의 짐은 꽤 많았기에, 적당히 당장 필요한 것들만 꺼냈다.
이로써 신혼 여행 동안 편안히 놀고먹을 준비는 끝이 났다.
“대충 짐은 다 옮겼나? 다들 주변에 없는 것 같고… 그럼 이제는?”
띠링.
어쩐지 오랜만에 듣는 것만 같은 시스템 효과음.
나는 먼저 복습해둔 ‘히어로 앤 빌런’의 스토리를 되새기며,
시스템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 * *